[주님 봉헌 축일]정결례(루카 2,22-40)
말라키 예언자는, 주님께서 홀연히 당신의 성전으로 오시리라고 한다. (말라 3,1-4)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2 그가 오는 날을 누가 견디어 내며 그가 나타날 때에 누가 버티고 서 있을 수 있겠느냐? 그는 제련사의 불 같고 염색공의 잿물 같으리라.
3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4 그러면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이 옛날처럼, 지난날처럼 주님 마음에 들리라.”
또는 예수님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히브 2,14-18)
14 자녀들이 피와 살을 나누었듯이, 예수님께서도 그들과 함께 피와 살을 나누어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15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6 그분께서는 분명 천사들을 보살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보살펴 주십니다.
17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8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
정결례를 거행할 날 예수님의 부모가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치자, 시메온은 아기가 반대받는 표징이 되리라고 예언하고 한나 예언자는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루카 2,22-40)
22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23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24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25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26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27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28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29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30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31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32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33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34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35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36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37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38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39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40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주님 봉헌 축일 제1독서 (말라3,1-4)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1ㄷ,ㄹ)
하느님께서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리고 고대하던 주님이 홀연히 그의 성전에 올 것을 예고하신다. 여기서 '주님'과 '계약의 사자'는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주님'과 '계약의 사자'가 동의어로 됨으로써, 계약의 사자인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와 주 하느님은 동일한 분이시라는 것이 성립된다.
이같은 사실은 요한 복음 1장 1절과 필리피서간 2장 6절에서도 유사하게 제시되지만, 삼위일체의 진리를 입증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계약의 사자'에 해당하는 '우말르아크 합베리트'(umallak habberith; the messenger of the covenant)로 표현된 것은 그가 성부 하느님에 의해 보내심을 받은 사자, 곧 하느님의 계약을 실현하기 위하여 파견된 분이심을 나타낸 것이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하느님의 계약이란 옛 시나이산 계약(옛 계약; 구약; 舊約)과 대비되는 '새 계약'(the new covenant)이다. 이 새 계약(신약; 新約)에 대해서는 과거 이사야 예언자(이사55,3; 61,8), 예레미야 예언자(예레31,31-34), 에제키엘 예언자(에제16,62; 37,26)등에 의해 이미 예언된 적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 구원 사업이라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당신 자신이 흘리신 피가 바로 새 계약을 이루시는 피임을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면서 선언하셨다(마태26,28).
그런 점에서 말라기 예언서 1장 1절ㄷ은 하느님께서 자신의 무죄한 피를 흘려 백성들과 하느님 사이를 새 계약으로 일치시킬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와 메시야를 보내실 것을 예언한 것임에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너희가 찾던'에 해당하는 '앗템 메바크쉼'(athem mebaqshim)은 히브리어에서 사용을 안해도 의미가 통하는 2인칭 복수 대명사와 '구하다', '추구하다', '찾다' 등의 의미를 지닌 '빠케쉬'(bakesh) 동사의 강조 분사형이 사용되어, 직역하면 '바로 너희들이 간절히 구하고 있는'으로 번역할 수 있다.
또한 '너희가 좋아하는'에 해당하는 '앗템 하페침'(athem hapetsim)은 '바로 너희가 몹시 기뻐하는'이라는 뉘앙스를 지니고 있다.
사실 동의적 대구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표현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시야를 얼마나 간절히 열망하였는지를 잘 드러낸다.
그들이 메시야를 갈망한 것은 메시야가 선민 이스라엘로 하여금 과거 다윗과 솔로몬 시대와 같은 영광을 누리는 시대를 도래케 할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주 하느님께서 계약의 사자, 곧 메시야가 '홀연히'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메시야가 오실 때 그들이 알지 못하고 준비하지 못할 것임을 의미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해당하는 '피트옴'(pithom)은 '갑자가', '놀랍게', '예기치 않은 때에' 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메시야가 누구도 알지 못할 만큼 은밀하게 온다는 의미,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놀라게 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메시야가 오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으로 나태하여 그를 알아보지 못할 것임을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장차 메시야의 재림 때의 상황과도 긴밀하게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메시야께서는 분명히 다시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그날을 준비하라고 말씀하셨다.
아울러 하느님께서는 그 계약의 사자가 '자기 성전'에 오실 것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 해당하는 '헤칼로'(hekallo)는 '그의 성전'(his temple)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그의 궁전'(his palace)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여기서 통치자가 머무는 처소인 '궁전'이라는 의미를 지닌 단어를 사용한 것은 성전이 바로 만왕의 왕이신 주 하느님께서 통치하시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탄생하신 지 여드레 만에 성전을 방문한 사건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지 40일 만에 성전에서 봉헌되었고(루카2,22-39), 마지막 수난 주간이 시작할 때에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셨던(마태21,12-17) 사건을 예고한 것으로 이해하기도 헀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메시야가 오시는 성전을 '그의 성전'이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관련해서 가시적이고 물리적인 예루살렘 성전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자리, 곧 메시야께서 당신 스스로 자원하여 이루실 구원사업으로 말미암아 세우실 당신의 몸인 교회, 당신의 인류구원사업이 계승되는 성사적인 인간 집단인 교회,
즉 하느님의 백성들이 거룩한 공동체 한 가운데 영신적 임금으로 좌정하셔서 통치하실 것임을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3)
'깨끗하게 하고'에 해당하는 '웨티하르'(yethihar)의 원형 '타헤르'(thaher)는 어원상 육체적, 도덕적으로 불결하지 않고 깨끗하고 순수한 상태를 나타낸다(창세35,2; 레위12,7; 민수8,21; 에례33.8).
이 단어는 구약에서 78회 나오는데, 그 가운데서 정결례 의식을 주로 다루는 레위기에서 무려 35회가 나온다. 그러니까 이 단어는 제사와 관련하여 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하느님께서 당신께 합당한 백성들로 세우기 위해서 그 선택한 백성들을 영적,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거룩하게 한다는 의미, 즉 성화(聖化)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말라기는 이러한 사실을 보다 힘주어 강조하기 위하여 주님께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마치 금과 은을 정련하듯이 그들을 정련하신다고 진술한다.
여기서 '정련하여'(단련,연단)에 해당하는 '웨직자크'(yeziqaq)의 원형 '자카크'(zaqaq)는 광석을 정련할 때에 불순물을 용해시켜 버리고 순수한 금속만을 추출해 얻는 과정을 나타내는 단어이다(욥28,1).
여기서 이 단어는 메시아께서 레위 자손으로 표현된 신약의 백성들을 깨끗하게 하시는 과정에서 수반되는 거룩한 고난, 시련과 환난 등을 암시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성령의 불로 그들의 죄악을 사를 때에 고통스러울 것이며, 그들의 인격의 모난 부분을 깎아 내고 연마할 때 아픔이 수반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결과 그들은 정금같은 순수한 면모를 갖춘 참 하느님의 백성, 거룩한 성도라 일컬음을 받기에 합당한 거룩한 신앙의 인격을 갖추게 될 것이다(욥23,10; 야고 1,4)
특별히 오늘 2월 2일은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봉헌 생활의 날'로 제정하여 자신을 주님께 봉헌한 수도자들을 위한 날로 정하여 모든 신자들이 수도 성소를 위해 특별히 기도하고 봉헌생활을 올바로 이해하도록 권고하고 있기에, 사제와 수도자 그리고 봉사자들의 거룩한 정결, 봉헌된 정결, 성결(聖潔)에 대한 가르침이라 생각하여 중요한 단어들을 묵상해 보았다.
조토 디 본도네의 성전에서 그리스도를 봉헌함(우측, 성 시메온)
giotto di bondone, presentation of christ in the temple, 1310s, fresco
north transept, lower church, san francesco, assisi
주님 봉헌 축일(봉헌 생활의 날) 복음(루카2,22~40)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29)
루카 복음 2장 29절부터 32절까지는 일반적으로 '시메온의 고별 노래'라고 불린다.
여기서 '주님'으로 번역된 '데스포타'(despota; sovereign lord)는 기본형 '데스포테스'(despotes)의 호격이다.
'데스포테스'(despotes)는 '주인', '소유주'라는 뜻인데, 동일한 의미로 성경에서 749회나 사용된 '퀴리오스'(kyrios)와 달리 10회 밖에 사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데스포테스'(despotes)는 자신이 '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절대적인 주권과 능력을 인정하는 분'에 대해서 사용하는 상대방을 매우 높이는 강한 의미를 지닌 말이다(사도4,24; 묵시6,10).
시메온은 하느님을 '데스포테스'(despotes)라고 표현했을 뿐 아니라, 자신을 '당신 종', 즉 '톤 둘론 수'(ton doulon sou; your servant)라고 분명히 말하는, 하느님의 절대 주권과 소유권을 인정하는 매우 경건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제야'라고 번역된 '뉜'(nyn; now)이 문장의 처음에 와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새로운 차원의 역사가 시작되고 있음을 강조한다.
이것은 인류 구원의 여명이 밝아오는 의미 뿐만 아니라 시메온 개인에게도 구원자를 기다리는 영적인 부담감과 책임감에서 해방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뒤이어 나오는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라고 번역된 '아폴뤼에이스'(apolyeis; depart; dismiss)는 '자유롭게 하다'를 의미하는 '아폴뤼오'(apolyo)의 2인칭 단수이다.
이 단어는 완곡어법으로 쓰여 '죽을 수 있도록 하다'라는 뜻을 내포한다.
이제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이루어 주셨으므로 아무런 미련없이 눈을 감을 수 있다는 말이다.
즉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라는 표현은 시메온이 매우 늙었으며, 지금까지는 구원자를 기다리는 사명과 희망으로 살아왔으나, 이제 그 사명과 희망이 완전히 성취되고 끝났음을 표현하고 있다.
'말씀하신 대로 ~평화로이'
'말씀'으로 번역된 단어 '레마'(rema; word)는 루카 복음 2장 26절에 나오는 '성령의 알려주심'을 가리킨다.
그런데 시메온은 '레마'(rema) 앞에 '토'(to)라는 정관사를 붙였을 뿐 아니라, 뒤에 2인칭 단수 소유격 대명사 '수'(sou)를 덧붙여서 '성령의 알려주심'을 '성부 하느님의 말씀'과 직접 연결시키고 있다.
이제 시메온은 자신이 바라던 바가 성취됨으로 인해 참 평화를 얻었다.
이 평화는 시메온 개인 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향해서도 구원자의 오심의 결과요 선물이 되었다.
이 '평화'로 번역된 '에이레네'(eirene; peace)는 하느님의 아들이 구세주로 이 땅에 오셔서 주시는 평화인데, 이 평화는 죄와 불순종으로 하느님과 원수가 된 인간과 하느님과의 화해에서 오는 구원이며(로마5,1.10), 반목과 질시로 벽을 쌓고 살아가는 인간들 관계 속에서의 평화일 뿐만 아니라(로마12,19), 염려와 근심, 격심한 감정의 혼란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인간 자신에게 이루어지는 평화이다(로마8,6).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원문의 서두에 나오는 '호티'(hoti; for)는 본문에서 이유 부사절을 이끄는 접속사로서, 앞에서 말한 자신의 평화로이 떠나감의 이유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밝히는 기능을 한다.
그리고 여기서 시메온이 '구원'을 본 주체는 '나', 즉 '에고'(ego)라고 하지 않고, '제 눈이' 즉 '호이 옵탈모이 무'(hoi ophthalmoi mou; my eyes)라고 한 것은 하느님의 구원을 분명히 보았음을 더 시각적으로 표현하여 강조하기 위함이다.
또한 여기서 '구원'이라고 번역된 '소테리온'(soterion; salvation)은 형용사인데, 명사처럼 쓰여 '구원의 수단' 혹은 '구원 그 자체'를 의미한다(시편50,23; 이사56,1).
그리고 구원은 예수님께서 하신 어떤 구체적인 영적을 말하기도 하지만, 예수님 자신이 바로 구원 자체이심을 보여 주는 표현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실을 자각했던 시메온은 사도 요한이 표현했던 그 기쁨을 맛보았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1요한1,1)
맏이는 모두 하느님께 바쳐야
류해욱 신부/예수회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미사 전에 초 축복과 형렬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듣는 아기 예수님의 봉헌과 더불어 우리들의 봉헌의 의미를 함께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온전히 인간으로 오셨을 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역사상의 한 사람,
바로 유대인으로 오셨던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정한 법에 따라 하느님께 봉헌됩니다.
야훼 하느님께서 모세와 계약을 맺으시면서 분명하게 하신 것이 인간은 온전히 하느님께 속한다는 것이었고 그 구체적인 상징으로 “어미의 태중에서 나온 맏이는 모두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탈출 13, 2)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맏아들, 곧 태를 맨 먼저 열고 나온 첫아들은 모두 나에게 봉헌하여라. 사람뿐만 아니라 짐승의 맏배도 나의 것이다.”
주님이 그 바쳐진 봉헌물을 받으셔서 무엇을 하시는가?
당신 창고에 쌓아 두시나요? 아닙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에게 봉헌된 모든 것을 다시 인간에게 돌려주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느님께 받은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리고자 하는 그 정신을 상기하는 것이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모든 것이 당신이 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알고, 늘 하느님께 돌려드리고자 하는 정신을 지니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부모가 다 아이를 바쳐야 하지만, 다 돌려받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돌려받을 줄을 분명히 알면, 쉽게 바칠 수 있지요. 다만 부모는 아이를 돌려받는 속전으로 예물을 받치도록 규정했던 것입니다.(민수 18, 14-16).
그 규정이 민수기에 있는데, 그 대목입니다.
“이스라엘에서 바쳐지는 완전 봉헌물도 모두 너의 것이 된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육체를 지닌 온갖 것들 가운데에서, 모태를 열고 나와 주님에게 바쳐지는 것도 모두 너의 것이 된다.
그러나 사람의 맏아들은 대속해야 한다. 부정한 짐승의 맏배도 대속해야 한다.”
몸이 정결하게 되는 기간이 차면, 산모는 정결 예식을 하면서 드리는 번제물로 일년 된 양 한 마리를 바치도록 되어 있고 습니다. 속죄 제물로는 비둘기를 바쳤어요. 이 규정은 레위기에 있는데, 이 대목도 읽어 보겠습니다.
“몸이 정결하게 되는 기간이 차면, 아들이나 딸을 위하여 번제물로 바칠 일 년 된 어린 양 한 마리와, 속죄 제물로 바칠 집비둘기나 산비둘기 한 마리를 만남의 어귀로 가져와서 사제에게 주어야 한다.
사제는 그것을 주님 앞에 바쳐, 그 여자를 위하여 속죄 예식을 거행한다.”
그런데 그 다음 구절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그러나 양 한 마리를 바칠 힘이 없으면, 산 비둘기 두 마리나 집 비둘기 두 마리를 가져다가, 한 마리는 번제물로, 한 마리는 속죄 제물로 올려도 된다.”
양 한 마리를 번제물로 바칠 힘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양 대신 산비둘기 한 쌍이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바칠 수 있었던 것이지요(레위 12).
예수님의 부모는 가난한 사람들이었고 따라서 ‘가난한 이들의 예물’로서 번제물로도 양이 아닌 비둘기를 바칩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들 안에 오심을 보여 주는 하나의 예표이지요.
시메온은 성령의 인도로 즉시 아기 예수가 누구인지 알아보았고 기쁨으로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그러나 시메온의 축복의 말에 이어지는 예고는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을 찌르는 칼날이었을 것입니다.
어머니 마리아가 아기를 두고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라는 시메온의 말을 듣고 감격하고 있을 때, 당신은 ‘이 아기가 사람들의 반대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이라고 듣습니다.
다시 말해, 마리아께서는 시메온의 예언의 말을 늘 가슴에 새기면서 사셨기에 예리한 칼에 찔리듯 가슴이 아파 오는 수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그때마다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은 하느님께 봉헌해 드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봉헌의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해야 하는 일이지요.
수도 삶을 ‘봉헌된 삶’, 또는 ‘축성된 삶’이라고 합니다. 하여, 오늘 주님 봉헌 축일은 수도자들의 ‘봉헌 생활의 날’이기도 합니다.
고 요한 바오로 2 세께서 이 날을 ‘봉헌 생활의 날’로 제정하여, 자신을 주님께 봉헌한 수도자들을 위한 날로 삼았습니다.
우리 모두가 처음부터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이고,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들이며 따라서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봉헌하면서 들으셔야 했던 같은 예고를 듣게 마련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인간 삶의 여정에 늘 아픔과 슬픔이 따르기 마련이라는 말이지요.
주님 봉헌 축일을 지내며 우리 신앙의 참 모범이신 어머니 마리아께 전구를 청하자고 여러분 모두를 초대합니다.
우리 삶에서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나 슬픔이 닥쳐올 때, 칼날에 찔리듯 아픈 마음을 그냥 하느님께 봉헌하며 묵묵히 사셨던 어머니를 떠올리며 우리의 삶의 모든 희로애락을 주님께 봉헌해 드릴 수 있도록 성령께 도우심을 청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