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제2주간 토요일]소문(마르 3,20-21)

2019. 1. 26. 오전 5:2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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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제2주간 토요일]소문(마르 3,20-21)



사울과 그의 아들들은 길보아 산에서 필리스티아인들과 싸우다가 전사한다. 한 사람이 이스라엘 진영에서 빠져 나와 다윗에게 찾아가 그 소식을 전하자, 다윗은 옷을 찢으며 그들을 애도하였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 했었지만, 다윗은 그들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사울과 요나탄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부른다. (2사무 1,1ㄴ-4.11-12.19.23-27)
그 무렵 1 다윗은 아말렉을 쳐부수고 돌아와 치클락에서 이틀을 묵었다.

2 사흘째 되는 날, 어떤 사람이 옷은 찢어지고 머리에는 흙이 묻은 채 사울의 진영에서 찾아왔다. 그가 다윗에게 나아가 땅에 엎드려 절을 하자,

3 다윗이 “너는 어디에서 왔느냐?” 하고 물었다. 그가 다윗에게 “이스라엘의 진영에서 빠져나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4 다윗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서 말해 보아라.” 하자, 그가 대답하였다. “싸움터에서 군사들이 달아났습니다. 또 많은 군사가 쓰러져 죽었는데, 사울 임금님과 요나탄 왕자님도 돌아가셨습니다.”
11 그러자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었다. 그와 함께 있던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하였다.

12 그들은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탄, 그리고 주님의 백성과 이스라엘 집안이 칼에 맞아 쓰러진 것을 애도하고 울며, 저녁때까지 단식하였다.
다윗이 애가를 지어 불렀다. 19 “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살해되어 언덕 위에 누워 있구나. 어쩌다 용사들이 쓰러졌는가?
23 사울과 요나탄은 살아 있을 때에도 서로 사랑하며 다정하더니, 죽어서도 떨어지지 않았구나. 그들은 독수리보다 날래고, 사자보다 힘이 세었지.
24 이스라엘의 딸들아, 사울을 생각하며 울어라. 그는 너희에게 장식 달린 진홍색 옷을 입혀 주고, 너희 예복에 금붙이를 달아 주었다.

 25 어쩌다 용사들이 싸움터 한복판에서 쓰러졌는가? 요나탄이 네 산 위에서 살해되다니!

 26 나의 형 요나탄, 형 때문에 내 마음이 아프오. 형은 나에게 그토록 소중하였고, 나에 대한 형의 사랑은 여인의 사랑보다 아름다웠소.
27 어쩌다 용사들이 쓰러지고 무기들이 사라졌는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다음, 예수님의 친척들은 그분이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붙잡으러 나선다. 그들은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한다. (마르 3,20-21 )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20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21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연중 제2주간 토요일 제1독서 (2사무 1,1-4.11-12.19.23-27)


사무엘 상권 31장과 사무엘 하권 1장에 기록된 사울의 죽음 두 부분이 조금 다르다. 

 사무엘 상권 31장에는 사울이 필리스티아인 궁수의 활을 맞고 큰 부상을 입자, 자기 무기병에게 자신을 칼로 찔러 죽이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무기병은 너무 두려워 찌르지 못한다. 그래서 사울은 자기 칼을 세우고 그 위에 엎어져 자결한다. (1사무 31,3-5참조)


그런데 오늘 사무엘 하권 1장에서는  길보이산의 전투에서 사울이 창을 맞아 겨우 목숨이 붙어 있었는데, 아말렉 사람이 사울의 간절한 부탁으로 자신이 죽이고, 머리에 쓴 왕관과 팔에 낀 팔찌를  벗겨 다윗에게 가져왔다고 전한다. (2사무 1,1-10참조)


다윗은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탄,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 집안이 칼에 맞아 쓰러진 소식을 듣고, 옷을 찢으며 울고 단식한다. 그리고 다윗은 사울을 죽였다는 아말렉인을 자기 부하를 시켜 죽인다.

"네가 어쩌자고 겁도 없이 손을 뻗어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를 살해하였느냐?" (14) "가까이 가서 그를 쳐라." (15)

"네 피가 네 머리위로 돌아가는 것이다.  네 입이 너를 거슬러 '제가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를 죽였습니다.'  하고 증언하였기 때문이다." (16)


다윗의 주님기름부음받은이에 대한 충성에는 변함이 없다. 사울이 살았으나 죽었으나 임금에 대한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사울의 죽음이 다윗에게 기쁜 소식이 아니었고, 주님기름부음받은이에 대한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한다.

다윗은 하던 모든 일을 멈추고, 노래를 짓고 애도를 한다. 영웅의 업적을 기록하는 '야사르의 책' 사울이 용감하게 싸우다 죽었다고 기록하여 벤야민 지파 사울에 대해 자신의 유다 지파에게도 가르칠 것을 명한다. (2사무 1,17-27)


다윗이 그동안 사울의 집요한 추적에도 가만히 있었던 것은 사울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의한 것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세상이 된 그 순간에도, 다윗은 하느님께 어디로 가야할 지를 여쭙고, 헤브론에 가서 7년 반이나 기다렸다. (2사무 2,1-11)

사울과 요나탄의 죽음에 대해서 다윗은 수만가지 생각과 감정들이 오고갔을 것이다. 자신을 그렇게 비방하고 헐뜯고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수십년을 아무 이유없이 대적해 온 사울에 대해, 다윗은 놀랍게도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을 토로하지 않는다.

자신의 속마음이야 어떻든 간에, 원칙적으로 하느님 앞에 이스라엘 임금으로서의 사울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고 진심으로 애도했다. 사울의 죽음은 이스라엘의 적인 이방인들에게는 기쁜 일이고,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손실이요 해이기 때문이다.


다윗은 이런 안목으로 자신의 모든 감정들 위에 바로 하느님이 세우신 나라인 이스라엘의 손실에 대해 가장 크게 애도하고, 사울에 대해 애도하고 있다. 다윗의 개인적인 감정은 가장 마지막에 나온다.

"나의 형 요나탄 형 때문에 내 마음이 아프오. 형은 나에게 그토록 소중하였고 나에 대한 형의 사랑은 여인의 사랑보다 아름다웠소." (1사무 1.26)


요나탄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애통해 하는 마음을 슬프디 슬프게 토로하고 있다. 다윗은 감정의 사람이 아니다. 다윗은 하느님의 사람이다. 다윗은 성령의 사람이다. 모든 것을 하느님의 관점에서, 하느님의 편에서 보고 판단하고, 원칙을 잡는 신본주의자이다.

우리 자신은 무엇이 원칙인가? 우리는 매사에 하느님보다는, 진실이라는 사실 보다는, 감정으로 사람과 사건을 대하고 있지는 않는가?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의 큰 안목과 가슴으로 보도록 노력하고, 개인적 감정은 개인적 감정일 뿐이며 매사에 하느님의 뜻으로 돌아가는 훈련이 참으로 필요한 것 같다.






 


 연중 제2주간 토요일 복음 (마르3,20~21)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1)


'예수님의 친척들'에 해당하는 '호이 파르 아우투'(hoi par autou; his family)'그에게 속한 자들' 또는 '그와 함께 한 자들'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친구들'이라고 번역할 수 있지만, 마르코 복음 3장 31절 이하의 예수님의 가족들이 예수님을 데리러 오는 문맥과의 조화를 생각하면, 이들은 '예수님의 가족들'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리고 '붙잡으러' 해당하는 '크라테사이'(kratesai; to take charge of; to lay hold on)원형 '크라테오'(krateo)'체포하다'라는 뜻이라서 (마르6,17; 12,12참조), 예수님께 대한 그의 가족들의 태도얼마나 무지하고  살벌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예수님께서 당신의 일을 이해하지 못한 그들에 대해 영적인 의미에서 가족이 될 수 없다고까지 말씀하신 반응이 더 잘 이해될 수 있다.

또한 예수님의 친척들이 보인 이런 부정적인 모습은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영적 무지와 어리석음에 빠져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는지에 대한 척도가 된다.


이제 예수님께 대한 평가의 하나인 '그가 미쳤다'에 대해서 알아볼 차례이다.

'예수님께서 미쳤다'에 해당하는 '엑세스테'(ekseste; he is beside himself; he is out of his mind) 원형 '엑시스테미'(eksistemi)'~의 밖으로' 라는 뜻의 전치사 '에크'(ek)'어떤 상황이나 관계 속에 있다'는 뜻의 동사 '히스테미'(histemi)의 합성어이다.

말하자면, 이 단어는 예수님께서 현재의 상황이나 현상들에 대하여 정상적인 이해가 불가능한 상태에 있다는 뜻이다.


예수님께 대한 이런 단정적인 소문은 예수님의 가족들로 하여금 그를 집으로 데려가야 한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특히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미쳤다'는 말은 '마귀가 들렸다'는 뜻이었다(마르1,23). 이 구절 이후에도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대해 베엘제불이 들렸고,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하는 내용이 나온다(마르3,22).


특히 마르코 복음 3장 30절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그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고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마르코 복음 6장 1절 이하를 보면 고향 사람들도 예수님의 일에 대해서 신뢰하지 않았고, 요한 복음 7장 5절에는 예수님의 형제들 역시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또한 마르코 복음 3장 21절3장 31~35절의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판단하고 그를 붙들러 온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마르코 복음 3장 22~30절에서 예수님을 향해 베엘제불이 들렸다고 하는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 학자들과 예수님의 논쟁을 앞뒤에서 둘러싸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한편에서는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고 마귀를 내쫓는 기적을 행하시는 능력의 소유자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소문도 돌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예수님께서 단순히 마귀들려 미쳤다는 소문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멀리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학자들 뿐만 아니라(마르3,22), 그의 일을 지켜본 갈릴래아의 사람들이나(마르3,21 후반절) 심지어 자신의 친척들과 가족들까지(마르3,21 전반절)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마귀에 들려서 미친 사람 취급을 했다는 사실을 통해 볼 때, 예수님께 대한 비난에 가까운 배척과 오해, 영적 무지와 불신이 더 지배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 주님께 미친 행복한 사람들 ♣ 

 

예수님께서는 집으로 가시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습니다(3,20). 그분의 새로운 가르침을 듣고, 병을 고치시며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는 능력을 본 이들이 치유와 해방의 샘물을 찾아 몰려든 것입니다. 자신들이 걸어온 길과는 다른 길을 가시는 예수님께로 방향을 튼 것이지요. 


한편 예수님의 친척들은 소문을 듣고 미쳤다고 생각하여 그분을 붙잡으러 나섭니다(3,21). '예수님의 친척들'을 직역하면 '그분에게서 오는 이들' 또는 '그분 곁에 있는 이들'입니다. 이 표현은 추종자들, 친구들, 가족들, 친척 등으로 옮길 수 있지요. 그러나 여기서는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은 그분을 ‘미쳤다’고 판단하여 붙잡아 데려가려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이 가는 길에 묶어두려 한 것입니다. '미쳤다'는 말은 '~의 밖에 서다'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 정신이 나가 있음을 표현한 고전적 그리스어입니다. 그들 가운데 아무도 열두 제자의 조직에 부름받지 못했지요. 그 결과 친척들은 예수님을 자신들과 무관한 저 밖에 있는 사람, 곧 정신 나간 사람으로 본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족들은 자신들이 가고 있는 인생길을 지극히 정상적이라고 여겼음이 분명합니다. 그런 그들의 눈에 고향, 친척, 직업을 저버리고 식사도 제대로 못하면서(3,20) 세리들, 죄인들과 어울리고 배척받으며 정처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시는 비정상적으로 비친 것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자신들의 삶과 생각과 행동의 범주 ‘밖에 서있는’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사람이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친척들이 정상이라고 여기던 그 길은 실은 선과 생명과 자유와는 거리가 먼 길이었습니다. 그 들은 자기중심적이고 탐욕적이며 심지어 하느님과 무관한 그런 길로 역주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실은 자신들이 제정신이 아니면서 정상이라고 착각하면서 말입니다. 


생명과 자유의 길이신 예수님께서는 역주행하고 있는 사람들을 다시 유턴하도록 초대하러 오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사람들이 정상이라 여기며 살아가는 그 길에서 벗어나 창조 때의 생명의 숨결과 영 안에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제정신을 차리고 자유와 참생명과 기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십자가를 지고 '미친듯' 걸어가신 것이지요.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는 세상의 강력한 도전과 유혹 속에 살아갑니다. 주님의 영과 복음가치를 추구하는 우리는 오해받고 미쳤다는 소리를 듣기도 하지요.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영원한 생명과 자유와 기쁨을 모르고 원하지도 않는 이들의 눈에 우리의 말과 생각과 행동은 죄다 미친짓으로 보일 테지요. 그럼에도 하느님께 미친 우리는, 굳건한 믿음을 갖고 예수님의 생활방식에 따라 선을 추구하고 남을 위해 헌신하며 함께 불의에 맞서며 해방의 길에 투신해야겠습니다. 


하느님을 잊고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세속의 가치와 인연, 고정관념과 편견, 하찮은 판단의 잣대와 굳어진 사고의 틀과 묵은 습관에서 벗어나, 주님께 미쳐 생명을 호흡하는 행복한 우리이길 기도하는 오늘입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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