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주간 목요일]하느님의 아드님(마르 3,7-12)
히브리서의 저자는, 예수님께서는 더 나은 약속을 바탕으로 세워진 더 나은 계약의 중개자이시라고 한다. (히브 7,25―8,6)
형제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25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그들을 위하여 빌어 주십니다.
26 사실 우리는 이와 같은 대사제가 필요하였습니다. 거룩하시고 순수하시고 순결하시고 죄인들과 떨어져 계시며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 되신 대사제이십니다.
27 그분께서는 다른 대사제들처럼 날마다 먼저 자기 죄 때문에 제물을 바치고 그다음으로 백성의 죄 때문에 제물을 바칠 필요가 없으십니다. 당신 자신을 바치실 때에 이 일을 단 한 번에 다 이루신 것입니다.
28 율법은 약점을 지닌 사람들을 대사제로 세우지만, 율법 다음에 이루어진 맹세의 그 말씀은 영원히 완전하게 되신 아드님을 대사제로 세웁니다.
8,1 지금 하는 말의 요점은 우리에게 이와 같은 대사제가 계시다는 것입니다. 곧 하늘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시어,
2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세우신 성소와 참성막에서 직무를 수행하시는 분이십니다.
3 모든 대사제는 예물과 제물을 바치도록 임명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대사제도 무엇인가 바칠 것이 있어야 합니다.
4 만일 그분께서 세상에 계시면 사제가 되지 못하십니다. 율법에 따라 예물을 바치는 사제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5 모세가 성막을 세우려고 할 때에 지시를 받은 대로, 그들은 하늘에 있는 성소의 모상이며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성소에서 봉직합니다.
하느님께서 “자, 내가 이 산에서 너에게 보여 준 모형에 따라 모든 것을 만들어라.”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6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더 훌륭한 직무를 맡으셨습니다.
더러운 영들은 예수님을 보기만 하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지른다. (마르 3,7-12)
그때에 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또 유다와 8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9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10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11 또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1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연중 제2주간 목요일 제1독서(히브7,25~8,6)
"사실 우리는 이와 같은 대사제가 필요하였습니다. 거룩하시고 순수하시고 순결하시고 죄인들과 떨어져 계시며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 되신 대사제이십니다." (7,26)
히브리서 7장을 마무리하는 26~28절은 레위 계통의 사제들과는 다른 멜키체덱의 반열을 따르신 대사제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대해 언급한다.
즉 우리 인간들의 필요를 완전하게 충족시켜 주실 대사제는 예수 그리스도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필요하였습니다'로 번역된 '에프레펜'(eprepen)의 원형 '프레포'(prepo)는 '적당하다', '어울리다'는 뜻이다.
비슷한 단어들 중에 '데이'(dei)는 필연성, '오페일로'(opheillo)는 의무를 표현하는 반면에, '프레포'(prepo)는 적당한 것, 알맞는 것을 표현한다.
이 단어에는 외부적 강제나 절대적 필연성이라는 요소가 나타나 있지 않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자세의 직무를 수행하신 것은 외부의 강제나 절대적 필연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기쁘신 뜻에 따른 결단이란 사실이 잘 드러나는 것이다.
한편 대사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하신 이유가 본절에서 다섯 가지로 나온다.
이러한 특징은 레위 계통의 사제들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의 영적, 도덕적 욕구를 정확하게 충족시켜 주시는 유일한 분이라는 사실을 이런 열거를 통해 한층 더 뚜렷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①먼저 그분은 거룩하시다.
여기서 '거룩하시고'로 번역된 '호시오스'(hosios)는 원래 '신의 법이나 자연법에 의해 재가된 혹은 허용된'이란 뜻이다.
신약에서 '호시오스'(hosios)는 하느님께 대해서 뿐 아니라 사람(티토1,8), 기도하기 위해 드는 손(1티토2,18) 등과 관련하여 쓰였으며, 이때에는 '경건한'이란 뜻이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가 말하는 예수님의 '호시오스'는 신적인 거룩함을 나타낸다.
그분이 가지신 거룩함은 인간이 아닌 하느님으로서의 거룩함이라는 것이다 (사도2,27; 16,35).
그분은 인간이시면서 동시에 하느님이시다. 이에 대한 증거는 성경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이사9,6; 요한1,1~3.14; 3,16; 10,30; 14,9; 20,28).
레위 계통의 사제들이 가지고 있는 경건과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거룩함을 대사제 예수님께서는 가지고 계셨던 것이다.
그는 천사도 가지지 못한 거룩함을, 모세와 여호수아, 아론도 가지지 못한 거룩함을 독점적으로 지니고 계신 분이다.
②둘째, 그분은 순수하시다.
여기서 '순수하시고'로 번역된 '아카코스'(akakos)는 부정 불변사 '아'(a)와 '악'을 의미하는 '카코스'(kakos)의 합성어로서 '죄없는', '악의가 없는', '교활함이 없는' 등의 뜻을 가진다.
여기에는 제3의 세력으로부터 받는 영향 및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고려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악이 전혀 손을 댈 수가 없는, 순수한 분이시다.
인간은 누구나 악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예외이다. 그분은 모든 악으로부터 자유로우시다.
또한 그분은 사람들에게 전혀 악한 일을 행하시지 않으시며, 결코 그들을 악으로 이끌고 가지고 않으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와 같은 점은 레위 계통의 사제들이 '악' 즉 '카코스'(kakos)의 영향을 받아 타락하고 그릇되게 행하였던 것(레위10,1~7; 1사무2,12~17)과 대조를 이룬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시 악의 영향을 받으시는 분이라면 절대 구원자가 될 수 없다.
③세째로, 대사제 예수 그리스도꼐서는 순결하시다.
여기서 '순결하시고'로 번역된 '아미안토스'(amiantos)는 부정 접두어 '아'(a)와 '더럽히다', '흠을 내다'등을 뜻하는 '미아이노'(miaino)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형용사로 종교적으로든지 도덕적으로든지 '순결한'(pure)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이것은 거룩하신 하느님께로 가까이 가는 것을 방해하는 흠이라든지 더러움이 전혀 없는 상태이다.
신약에서 이 단어는 하늘에서 받게 될 성도의 약속의 상태(2베드1,4), 혼인 관계에서 요구되는 성적인 순결(히브13,4), 실천적인 종교의 순결성(야고1,27)등에 대해서도 쓰였다.
레위 계통 사제들은 정결 의식을 치르지 않고서는 하느님께로의 접근이 불가능한 흠이 있는 자들이었으나, 그리스도께서는 한 점의 흠도 없는 순결한 분이시다.
④넷째로, 예수 그리스도꼐서는 죄인들과 떨어져 계시는 분이시다.
그분이 지상에서 비록 죄인들과 함께 하시고 친교하셨지만(루카15,1.2) 그들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분이셨다.
여기에서 '떨어져 계시며'로 번역된 '케코리스메노스'(kechorismenos)는 '코리조'(chorizo)의 수동태 완료 동사로 분리된 상태를 가리킨다.
고전 희랍어 문헌에서 이 '코리조'동사가 사람이 죽을 때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쓰였다는 사실은 문자적인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신약에서 '코리조'는 공간적인 분리(사도1,4; 18,1.2)라든지 감정적인 분리(로마8,35), 이혼(마태19,3)등을 나타내어 쓰였는데, 본절에서 저자가 이해시키려는 것은 정신적인 것과 공간적인 것을 포함하는 그리스도의 양면적 분리성이다.
즉 하나는 그분이 무죄하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분이 악한 세상에서 떠나 계시다는 점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심에도 죄는 없으셨으며(히브4,15), 이 세상에 오셨지만 결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셨다(요한17,14).
또한 지금은 완전히 거룩한 하늘 옥좌에 계신다.
⑤다섯째로, 예수 그리스도꼐서는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시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어 최고의 지위에 오르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분은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승천하셨으며(사도1,9~11), 하느님 아버지 옥좌 오른편에 앉으셨다(마르16,19).
스테파노는 순교 직전에 하느님 오른편에 서 계신 그리스도를 보고 이에 대해 증거하였다(사도7,36).
'~보다 더 높으신'으로 번역된 '휩셀로테로스'(hyselloteros)는 '높은'을 뜻하는 '휩셀로스'(hysellos)의 비교급으로 '더 높은'(higher)이란 뜻이다.
하늘은 지상의 모든 피조물보다 높은 곳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그 하늘보다도 더 높아지셨다는 것은 그분께서 천사들과 레위 계통 사제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분이심을 잘 알게 한다.
그분께서는 아버지의 옥좌 오른편이라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신 것이며, 그분의 사제직이 아래에서 난 레위 계통 사제들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이 얼마나 우월하신지를 잘 보여준다.

연중 제2주간 목요일 복음(마르3,7~12)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9)
예수님께로부터 선포되는 복음과 능력의 치유 행위는 바리사이들과 같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극단적인 반대자를 만들어내는 동시에, 예수님의 말씀과 능력을 덧입으려는 추종자들을 양산하는 대조적 결과를 낳았다.
마르코 복음 3장 8절의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는 것은 온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한순간에 몰려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관한 소문이 퍼지자 이곳 저곳에서 끊임없이 계속해서 예수님께로 몰려들었음을 묘사한다.
이것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여기서 '거룻배 한 척'에 해당하는 '플로이아리온'(ploiarion; a small ship)를 마련하라고 했을 때, '마련하다'에 해당하는 '프로스카르테레'(proskartere; should wait on; ready for)는 '미리 준비하고 기다리다', '온 힘을 기울여 대기하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당신께 몰려든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작은 배를 준비시키신 것은, 여기의 본문 외에도 하느님 나라의 여러 비유를 가르치시기 위한 경우도 있었다(마르4,1).
그런데 여기서는 특별히 마르코 복음 3장 10절에 나오는 데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한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전능하신 제2위 천주 성자 하느님이시므로 신적인 방법으로 얼마든지 어려움을 모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병고침이나 자연 재해를 다스리는 목적 이외에, 당신을 신기하게 보이도록 하는 깜짝 놀랄 기적은 극히 제한함으로써, 당시 희랍 사회에 성행하던 미신적인 '신적 인간'으로 비치는 것을 철저히 경계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마르코 복음 3장 12절에 나오는 데로, 성부 하느님의 구원 사업이 이루어질 때까지, 말씀과 영적을 통해 하느님의 나라가 선포되는 과정에서 당신 자신의 정체가 알려지는 것을 피하셨고, 특히 더러운 영들을 통해 당신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로 알려지는 것을 더욱 원치 않으셨다.
우리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과정에서 효과적인 복음 전파 뿐만 아니라 소위 인기와 명성의 바다에 익사하지 않기 위해서 '거룻배 한 척'을 미리 준비시키고 대기시키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깊이 묵상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전교가 잘 되는 한 장소에서 계속해서 오랫동안 머무시지 않고, 또한 당신의 인기와 명성에 연연하지 않으시고, 다른 곳으로 떠나시기 위해 '거룻배 한 척'을 미리 준비하시며 그곳과 거리를 두신다.
오로지 하느님 아버지의 뜻만을 생각하시고 기도하시기 위해 한적한 곳으로 가시기 위해서, 그리고 또 다른 곳에 전교하러 가시기 위해서 인간성의 모든 찌꺼기와 폐단을 초월하시는 동선을 그리신다.

많은 기적을 일으키시는 예수님께서는 그야말로 온 나라의 슈퍼스타가 되셨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께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배를 한 척 마련하시고 그들로부터 조금 떨어지셨습니다.
보통은 사랑하면 더 가까워지는 것이 정상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셨습니다.
너무 가까워지다 보면 오히려 서로가 보아야 할 것을 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상대가 들어오라고 허락하지 않았는데 자신의 영역에 들어오면 그것은 폭력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어느 선에서는 사람들이 더 이상 가까이 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제대로 보지 못하고 폭력을 당해 주는 것이 사랑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오히려 자신의 자리에서 굳건히 서 있을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누구든 나와 함께 설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쓰러지는 사람과 함께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그를 일으켜 주려고 혼자라도 그 옆에서 굳건하게 서 있을 수 있는 능력이 사랑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일이 있으신 다음 곧바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을 고쳐 주셨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는 더러운 영이 들린 이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그분 앞에 엎드리며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습니다.
만약 병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다 받아들이셨다면,
좋은 사람들도 받아들일 수 있었겠지만 마귀들도 받아들일 뻔하였습니다.
사랑은 마치 영원히 만나지 않는 기찻길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어느 선에서 절대 포기하지 않는 공간을 가지고 계셨듯이,
우리 모두도 ‘하느님 외에는’ 내어 주어서는 안 되는 공간이 있습니다.
사랑은 그 공간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질 때부터 시작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