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공현 대축일 후 목요일]은혜로운 해 선포 (루카 4,14-22ㄱ)
요한 사도는,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다고 한다. (1요한 4,19―5,4)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느님을 19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20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21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5,1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합니다.
2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실천하면, 그로써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3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
4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그 승리는 바로 우리 믿음의 승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를 펴시고,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신다. (루카 4,14-22ㄱ)
그때에 14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
15 예수님께서는 그곳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
16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17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18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19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0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22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주님 공현 후 목요일 제1독서 (1요한4,19~5,4)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4,20)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는 '반드시' 형제를 사랑하게 된다는 사실과
또한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는 자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
그 가운데서 본문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임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사랑한다'로 번역된 '아가포'(agapo)는
하느님 대전에 올려드리는 신앙 고백적인 어투가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인정을 받기 위해서 뱉어진 말이다.
그리고 '거짓말쟁이'로 번역된 '프슈스테스'(pseustes)는 하느님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자를 가리킨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는 당연히 형제를 사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미워하면'으로 번역된 '미세'(mise)의 원형 '미세오'(miseo)는
강한 의지로 어떤 대상을 싫어하고 증오하는 의미도 있지만(히브1,9)
보다 덜 사랑하는 상태를 가리키기도 한다(로마9,13).
본절인 요한1서 4장 20절에서 사용된 '미세'(mise)는 이웃에 대한
이러한 두 가지 감정을 다 포함하는 내용이다.
특히 여기서 이 단어는 가정법 현재 능동태로 사용되어 형제에 대한
지속적으로 이러한 부정적 감정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요한1서 4장 20절 후반부에서는 눈에 보이는 형제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대조되고 있다.
'눈에 보이는'으로 번역된 '헤오라켄'(heoraken; he has seen)의
원형 '호라오'(horao)는 눈으로 보는 것을 나타내는 동사이다.
하느님께 대해서는 이 동사와 더불어 부정어 '우크'(uk)가 함께 쓰여
하느님은 인간의 눈으로 절대로 볼 수 없는 분이심이 잘 드러나고 있다.
순수한 영적 존재이신 하느님께서는 그 어느 누구도 볼 수 없다.
인간의 눈으로 영적인 존재를 인식할 수 없고 볼 수도 없기 때문이다.
혹 보는 일이 있더라도 부정(不淨)한 인간으로 절대 거룩하신
하느님을 보는 것은 죽음을 가져온다(탈출33,20).
한편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더 쉬운 일인데, 이렇게 보다 쉬운 형제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사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검증이 잘 되지 않는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형제에 대한 사랑은 쉽게 검증된다.
따라서 하느님을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의 여부는
형제 사랑의 여부로 확인할 수 밖에 없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지적을 사도 요한은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 당시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떠들어대는 이단들의
거짓말들을 매우 강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 공현 후 목요일 복음 (루까4,14-22ㄱ)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20~21)
'시중드는 이'에 해당하는 '휘페레테'(hyperete; the attendant; the minister)의
기본형 '휘페레테스'(hyperetes)는 원래 '하급 노잡이'(subordinate rower)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서는 대다수 자신의 손으로 윗사람을 섬기는 자라는
뜻으로 쓰였다(마태5,25; 마르14,54; 루카1,2; 요한7,32).
여기서는 회당에서 성경 두루마리를 관리하고, 회당을 청소하는
봉사 직책을 담당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내려오는 전통적 순서를 따라
그 사람에게 성경 두루마리를 건네주신다.
일반적으로 회당에 초청된 랍비들은 일어서서 성경을 봉독한 후에
그것을 회당지기, 즉 '핫잔'(hazzan)이라고 불리우는 사람에게 주고
마련된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나서 그는 읽은 성경에 대한 가르침을 베푼다.
이때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귀를 기울여 그 말을 경청하는 것이다.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는 것은 당시의
회당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대목인데, 당시 예수님의 활동에 대한
소문이 퍼져 있었던 것을(루카4,14) 감안한다면, 다른 어떤 랍비들보다
더 많은 주목을 받았을 것이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
성경 봉독 후 예수님께서 하신 교훈이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더 길었고,
내용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루카 복음사가는 4장 21절과 4장 18절,19절의 내용만으로도
예수님께서 베푸신 교훈의 요지를 전달하기에 부족함이 없기에, 이렇게
압축 요약해서 전달하였다.
여기서 '이루어졌다'로 번역된 '페프레로타이'(peplerotai; is fulfilled)는
구약 예언의 완성과 성취를 묘사하는 전문 용어 '플레로오'(pleroo)의
완료 수동태로서 이사야서 61장 1절과 2절의 예언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회당의 청중들에게 이미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즉 이사야서 61장 1절과 2절에 나오는 '주님의 영을 받은 의로운 종'은
예수 그리스도 당신 자신을 가리키며, 당신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공생활을 시작하는 시점에 이미 그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이심을 증명하는
중요한 예언으로서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앞으로 계속 성취될 예언이기도 한 것이다.
즉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고, 죄와 죽음의 포로되었던 이들이
자유롭게 되며, 영적으로 눈먼 이들이 진리를 보게 되고,
좌절과 절망에 빠진 이들이 희망 가운데 기쁨을 회복하며,
주님께서 베푸실 구원의 은혜의 해(레위25,8~55참조)가 도래하는 일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성취되었고, 또한 성취되어 가는 것이다.
-자유롭게 하는 사랑-
요즘 계속되는 제1독서 요한1서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사랑입니다.
비상한 사람이 아니라 평범하면서도 항구한 진정성 가득한 사랑이 제일입니다. 사랑하라 연장되는 우리의 삶입니다. 어느 자매님이 전해 준 그 남편의 임종어도 생각납니다. “1.미안하다, 2.고맙다, 3.사랑한다.”라는 세마디 임종어를 평생 잊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앙금은 다 녹았고 살아있을 때보다 더 남편을 사랑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결정적 “사랑한다.”라는 고백이 주효했음을 봅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해야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형제를 사랑합니다. 형제 사랑을 통해 검증되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이 두 사랑은 구별할 수는 있어도 분리할 수는 없습니다. 얼마전 병원 외출시 6층에서 바라보니 공사장 현장에서 안전모를 쓰고 일하는 분들이 참 작게 보였습니다.
문득 ‘저 분들 마음의 중심에는 무엇이 자리잡고 있을까?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그 마음 중심에 사랑이, 하느님 사랑, 형제 사랑이 자리잡고 있으면 얼마나 좋겠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하느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이들은 형제를 사랑합니다. 멀리 있는 형제보다 오늘 지금 여기 함께 사는 형제를, 함께 만나는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라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나날의 선물들입니다. 요한 사도의 계속되는 참 다정한 사랑의 권고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합니다.”
설명이 필요없는 너무나 자명한 사랑의 진리 말씀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형제 사랑은 하나로 직결되었음을 봅니다, 정말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의 자녀들인 형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 사랑은 저절로 형제 사랑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이런 사랑의 항구하고도 한결같은 사랑이 하느님을 닮아가게 합니다. 예수님처럼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표지의 삶이 됩니다. 말그대로 살아있는 복음서, 걸어다니는 복음서입니다.
요즘 만나는 이들 마다 권하는 말이 있습니다. 면담고백성사든, 피정강의든 혼자든 함께든 “행복기도”를 소리내어 정성껏 읽게 한다음 꼭 성인이 되라 당부합니다. 사실 누구나의 근원적 소망이 바로 하느님을 닮은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삶의 모두입니다.
바로 사랑이 성인 되게 합니다. 끊임없는 하느님 사랑, 형제 사랑을 통해 예수님을, 하느님을 닮아가는 우리들입니다. 결국 삶의 여정은 사랑의 여정이요 살아갈수록 그분을 닮아가는 것이요 나중 하늘 나라 입장시 확인하는 것도 우리의 내적 얼굴일 것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얼마나 닮았나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통해 예수님을, 하느님을 닮아갈수록 본래의 “참 내 얼굴”일 것입니다.
영적성장과 성숙도 결국은 사랑의 성장이요 성숙입니다. 두려움을 몰아내는 사랑이, 세상을 이기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입니다. 바로 그의 빛나는 모범이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하느님 사랑은 그대로 형제 사랑으로 표출됨을 봅니다. 이사야서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깨달으셨던 것입니다. 흡사 예수님의 오도송悟道頌처럼, 또 출사표出師表처럼 느껴지는 힘찬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 삶의 비전이 고스란히 요약된 말씀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히 현실성을 띠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사랑으로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의 면모가 약여합니다. 이처럼 진정한 하느님 사랑은 이웃 형제 사랑으로 표출되기 마련입니다. 이웃을 통하지 않고는 하느님도 만날 수도, 이를 수도 없습니다. 이웃없는 하느님과의 만남은 십중팔구 환상이나 착각입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 실현되는 해방과 자유의 구원이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사랑의 해방활동에 동참하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의 우선적 관심사가 “가난한 이들, 잡혀간 이들, 눈먼 이들, 억압받는 이들”입니다. 여기에 해당하지 않을 자들 얼마나 될까요? 거의 없을 것입니다. 뭔가 보이지 않는 것들에 예속되어 내적 노예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참으로 내외적으로 해방시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두려움을 몰아내는 사랑, 세상을 이기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을 선사하시어 만나는 이웃 형제들과 이런 사랑을 나누게 하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