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공현 대축일 전 토요일]나를 따라라(요한 1,43-51)
요한 사도는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하자고 한다. (1요한 3,11-21)
사랑하는 여러분, 11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말씀은 이것입니다. 곧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2 악마에게 속한 사람으로서 자기 동생을 죽인 카인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가 무슨 까닭으로 동생을 죽였습니까? 자기가 한 일은 악하고 동생이 한 일은 의로웠기 때문입니다.
13 그리고 형제 여러분, 세상이 여러분을 미워하여도 놀라지 마십시오.
14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는 것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죽음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
15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알다시피, 살인자는 아무도 자기 안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16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17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18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음을 알게 되고, 또 그분 앞에서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20 마음이 우리를 단죄하더라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또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21 사랑하는 여러분, 마음이 우리를 단죄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필립보의 권유로 예수님을 만난 나타나엘은,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라고 한다 (요한 1,43-51)
그 무렵 43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기로 작정하셨다. 그때에 필립보를 만나시자 그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44 필립보는 안드레아와 베드로의 고향인 벳사이다 출신이었다.
45 이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만나 말하였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46 나타나엘은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였다. 그러자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47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당신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48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고 대답하셨다.
49 그러자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50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이르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51 이어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주님 공현 전 토요일 제1독서 (1요한3,11-21)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알다시피, 살인자는 아무도 자기안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15)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자이며, 살인한 자는 영생이 그 안에 없으니 따라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그 안에 영생이 없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미워하다'라는 뜻으로 번역된 '미손'(mison)의 원형 '미세오'(miseo)는 신약성경에서 40회 사용되었는데, 특히 요한1서에서는 형제 사랑과 관련하여 그 반대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요한은 요한1서 2장 9절에서 형제에 대한 미움은 어둠 속에 있는 표라고 말했으나, 본절에서는 더 극단적으로 살인하는 자라고 말한다.
사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이미 교훈하신 내용이다(마태5,21.22). 예수님께서 미움과 살인을 동일시하는 것은 살인은 미움(분노;화;성)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카인의 예와 같이 형제에 대한 미움의 극단적 행동은 살인으로까지 이어지며 그 살인의 시작은 미움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미움을 살인의 행위와 동일시하신 것이다.
'살인자'라는 뜻의 '안트로폭토노스'(anthropoktonos)는 고의적인 목적으로 계획되고 준비된 살인을 하는 자라는 말이다.
요한1서 3장 12절에서 '죽인'으로 번역된 '스파조'(sphazo)는 살인을 비롯해서 짐승의 살육을 포함한 단어지만, '안트로폭토노스'는 '사람'을 뜻하는 '안트로포스'(anthrophos)와 '죽이다'라는 뜻을 지닌 '크테이노'(kteino)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오직 사람을 죽이는 자(murderer; manslayer)만을 지칭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살인의 원조를 악마라고 말씀하셨다(요한8,44). 따라서 이 세상의 모든 살인자는 마귀에게서 났고, 그에게 속한 자들이다.
한편, 요한은 본절에서 요한1서 3장 14절의 '사랑하지 않는 자'를 '미워하는 자'로 제시함으로써, 미워함이 곧 사랑하지 않는 소극적 자세에 대한 적극적 반응임을 나타낸다. 또한 형제 사랑에는 어떤 회색 지대도 없음을 보여준다.
사실 하느님 대전에는 하느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녀, 곧 형제를 사랑하는 자와 미워하는 자 두가지 종류의 인간밖에 없다.
'영원한 생명' (eternal life)
형제에 대한 미움이 곧 살인임을 피력한 요한은 이러한 자를 영원한 생명과 관련시켜 설명한다. 여기서 특별히 영생을 말하는 것은, 당시 영지주의 이단들이 실제 삶에 있어서는 형제를 무시하고 미워하면서도, 그들 스스로는 특별한 영지를 가지고 있으며
영생하는 자처럼 처신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한은 그들의 주장이 허구임을 밝히기 위해서, 영생이 형제를 미워하는 자와는 전혀 상관이 없음을 설파했던 것이다. 실로 '영원한 생명'으로 번역된 '조엔 아이오니온'(zoen aionion)는 복음의 주제일 뿐 아니라 요한의 주요한 신학 주제에며,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이다.
요한은 예수를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으며(요한3,15.16),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임을 설파하였다(1요한5,20).
영원한 생명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은총으로서, 하느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아가게 하는 구원(salvation)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형제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영생이 없다고 말함으로써, 형제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도 부각시키는 것이다.
위의 요한의 서간을 읽으면서 우리는 참 구원과 영생에서 먼 사람들이구나!~~하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누구를 미워하고 욕하고 싸우는 것은 우리 속에 상대방에 대한 사랑과 상생 혹은 공생 공존의 의식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너무 자조적인 생각을 가질 필요가 없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대로 경천애인,애주애인을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의 노력하는 마음을 보신다.
요한 1서의 둘째 부분(3,11-5,12)의 주제어는 사랑이다.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말씀은 이것입니다. 곧 우리가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3,11)
저자는 카인과 예수님을 비교하면서, 형제를 미워하여 살인을 저지른 카인과는 달리,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목숨마저 내놓으셨으니, 우리도 그분의 모범을 따라 서로 사랑하라고 권고한다.
히브리서 11장 4절에도 "믿음으로써, 아벨은 카인보다 나은 제물을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믿음 덕분에 아벨은 의인으로 인정 받고, 하느님께서는 그의 예물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카인보다 더 나은 제물을 드린 아벨의 믿음은 무엇인가?
속죄제, 번제등 희생물을 잡아서 규칙대로 드리는 제사는 모세 시대 이후에 율법을 통해 들어왔다. 카인과 아벨의 시대는 모세 이전의 시대이다. 그때에는 제사에 대한 규례가 없었다.
다만 자연 계시와 아담과 하와를 통한 감사의 제사가 있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제사는 수확의 한 절기, 혹은 목축의 한 절기가 지난 후에 드려야 하고, 반드시 감사의 제사여야 옳다. 창세기 4장 4절의 '세월이 흐른 뒤에'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카인의 제사를 거절하시고, 아벨의 제사를 기쁘게 받아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 곡물이든, 동물의 희생물이든, 제물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마음의 자세와 태도에 달려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세월이 흐른 뒤에 카인은 땅의 소출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고, 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굳기름을 바쳤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 보셨으나,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 그래서 카인은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 뜨렸다."(창세4,4)
창세기 4장 4절을 보면, 하느님께 예물을 드리는 카인과 아벨의 태도가 확연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벨이 드린 양 떼 가운데 '맏배들'이 무엇인가? '첫 새끼들'이라는 말이다. 성경을 보면 '맏배(첫 새끼)'는 하느님의 것으로 구별되고 있다. 즉 '맏배(첫 새끼)'는 만물이 하느님의 것임을 압축해서 나타내는 상징이다.
따라서 맏배를 드렸다는 것은, 일상 생활에서 하느님을 향한 아벨의 고백과 행위, 그리고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척도이다.
아벨은 양이 새끼를 낳을 때마다 생명의 탄생을 무한히 경이로워하고 감사하면서, 생명의 주권(절대권)은 하느님이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마음에 새긴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맏배를 하느님께 드리려고 미리 구별(성별)해 놓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봉헌의 정신이다.
그런데 아벨의 봉헌의 정신을 알 수 있는 표본은 맏배만이 아니다. 그는 또한 '굳기름'을 드렸다는 것이다. 히브리어로 '기름을 드렸다'는 것은 '최상품, 가장 좋은 것으로 드렸다'는 뜻이다.
이것은 아벨이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충성과 믿음의 고백을, 자신의 일상의 삶의 가장 중심으로 여기며 살았다는 증거이다.
카인은 아우 아벨을 들에 데리고 가서 살인을 한다(창세4.8). 카인이 아우 아벨을 죽여 형제의 관계가 완전히 파괴된 것은, 그전에 먼저 카인과 하느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이다.
둘 중에 하나를 택하는 것이 자유이다. 그러나 이 자유는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도 있다. 믿음과 정성에 있어서, 하느님 마음에 들었던 아벨의 '양떼의 맏배들과 굳기름'을 받으시는 것은 하느님의 자유이다.
하느님의 자유는 절대 진리와 절대선에서 나오는 무한히 완전한 자유요, 그르침이 없는 자유이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이러한 자유와 선택에 간섭하고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이 카인의 죄이다.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수직적으로 깨어진 사람은 수평적으로 부모와 형제, 형제와 형제, 자연과의 관계도 깨어진다는 진리를 창세기에서 야휘스트 저자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다시 말해서 수평적으로 깨어진 인간과의 관계, 형제들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싶으면, 먼저 수직적으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회복하라는 것이다.
이런 구약의 사상을 염두에 두고, 오늘의 요한 1서 말씀으로 돌아가 생각을 해보자.
결국 카인과 예수님이 비교될 수 있는 차원도 아니지만, 카인에 의해 죽은 아벨의 모습속에서, 아버지 하느님(성부)께 충성과 순명을 하시면서 인류(우리 죄인들)를 위해 목숨을 대속의 제물로 내놓으신 예수님이 미리 예표되고 암시됨을 알아야 한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우리 존재와 생명의 근원이시요 목적이신 하느님, 우리 영혼, 육신 생명의 참 부모이신 하느님을 만유 위에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절대로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고 그리스도가 피로써 구속한 인간들을(한 부모 아래 같은 형제, 자매요 같은 자녀들) 미워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형제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죽음을 벗어나 생명의 나라에 들어와 있지만,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14)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 ~ 살인자는 아무도 자기 안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15)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16)
"누군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18)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 수직적인 보이지 않는 하느님 사랑은 수평적인 눈에 보이는 형제의 사랑으로 반드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17-18)
사람은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납니다(요한 3,5 참조).
이를 구원이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물과 성령의 원천이신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교회를 만나야 하고, 이어 그 안에 머물려는 노력이 병행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 독서 말씀처럼 이웃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으로 새로 태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분 안에 머물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하는 가장 큰 작업은 ‘진실해지는 것’입니다.
사탄은 거짓의 아비입니다(요한 8,44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거짓을 버리지 않고서는 진리요 생명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나타나엘은 처음에는 예수님을 거부하지만 그 진실성 하나 때문에 그분의 사도로 부름을 받습니다.
처음 거짓말을 시작했던 사람이 아담입니다.
아담은 죄를 짓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을 가립니다.
그리고 나무 사이에 숨습니다.
이 과정이 어떻게 죄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가를 잘 설명해 줍니다.
죄는 거짓을 만들고 거짓은 관계를 막는 담과 같습니다.
다시 그분 앞에 나서려면 모든 것을 벗어던져야 합니다.
절대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착한 거짓말 따위도 없어야 합니다.
거짓은 모든 것이 거짓입니다.
거짓은 이웃만이 아니라 자신도 속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자신의 죄를 서로 고백하라고 하며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지 말라고 충고합니다(야고 5,16 참조).
이웃에게 솔직할 수 있어야 하느님께도 솔직할 수 있습니다.
솔직하지 않은 신앙보다 솔직한 불신앙이 더 하늘 나라에 가깝습니다.
하늘 나라는 예수님께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라는 칭찬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의 몫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주님과의 만남-
오늘 제1독서 요한1서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온통 형제애에 대한 강조입니다. 사실 믿는 이들에게 형제애의 실천은 모두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 요한사도의 말씀은 너무 자명하기에 주석이 필요없습니다.
사랑, 삶, 사람의 우리말이 재미있습니다. 사랑의 삶을 살기에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할 때 비로소 참으로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 형제들을 사랑할 때 비로소 우리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갑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죽음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사랑하지 않으면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동안 사랑하라 주어진 시간의 선물들입니다. 하루하루가 사랑하라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선물의 시간들입니다. 삶이 허무하고 무의미한 것은 사랑이 빠졌기 때문입니다. 자기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자이며 죽은 자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면 우선 내가 먼저 영적으로 죽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하는 누구나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도 그 안에 계십니다. 그러니 사랑이 없으면 살아있다하나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살기위해서라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니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진리는 하나입니다. 진리의 표현이 사랑의 실천입니다. 사랑의 실천을 통해 살아있는 진리를 체험합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진리를 알길이 없습니다. 바로 사랑할 때 우리는 진리자체이신 주님을 체험하고 그분 앞에서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습니다. 오늘 요한 사도는 제1독서에서 온통 사랑의 실천을, 형제애의 실천을 강조합니다.
바로 이런 형제애의 모범이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제자들입니다. 어제는 두 제자들 중 하나인 안드레아가 그의 형 시몬을 주님께 인도했고, 오늘은 빌립보가 주님을 만납니다. 만남중의 만남이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기위해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중인 우리들입니다.
“나를 따라라.”
필립보는 물론 우리 모두를 부르시는 주님이십니다. 당신 사랑의 여정에 동참케 하는 주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삶은 ‘사랑의 여정’입니다. 결국 영적성장과 성숙도 사랑의 성장이요 성숙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삶의 유일한 의미입니다. 과연 살아갈수록 사랑의 성장, 성숙인지 자문하게 됩니다.
필립보의 형제 사랑은 나타나엘을 주님께 인도함으로 환히 드러납니다. 나누고 싶은 것이 사랑의 본능입니다. 어제에 이은 똑같은 말마디가 “와서 보시오”입니다. 어제 요한의 두 제자를 직접 초대했을 때 예수님의 말씀이었고 오늘은 빌립보가 나타나엘에게 한 말입니다. 와서 보면서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배우라는 것입니다. 와서 보라는 주님의 초대에 응답해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입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만남중의 만남이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예수님과 나타나엘의 만남은 언제 읽어도 감동적입니다. 참 사람과 참 사람의 인격적 만남이요, 참 사랑과 참 사랑의 만남입니다. 오늘날 가장 결핍된 것이 이런 사랑의 만남, 인격적 만남입니다. 하여 삶이 마냥 공허하고 허전한 것입니다. 사랑의 눈이 활짝 열려있는 예수님은 한 눈에 나타나엘을 알아 보십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이보다 더 좋은 찬사는 없습니다. 나타나엘처럼 사랑할수록 거짓이 없는 참 사람입니다.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할수록 마음의 순수와 진실입니다.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놀라서 묻는 나타나엘에게 주님의 말씀이 또 놀랍습니다.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언제나 우리를 눈여겨 보시는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평소 당신을 항구히 찾으며 진리 탐구에 전념했던 나타나엘을 눈여겨 봐뒀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때가 무르익었을 때 주님과의 결정적 만남입니다. 결코 우연한 만남이 아닙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전광석화, 사랑의 눈이 활짝 열려 주님을 알아 본 나타나엘의 고백입니다. 이런 주님과 감격적 만남의 추억이 나타나엘에게는 평생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이 되었을 것입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만남으로 참 나를 알았고 주님도 알았으니 바로 이것이 구원입니다.
예수님에 관해 들어서, 읽어서가 아니라 긴 기다림 끝에 때가 되었을 때 이런 주님과의 직접적 은총의 만남입니다. 이어 나타나엘에게 주신 주님의 마지막 말씀도 우리에겐 깊은 깨달음이 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레서 오르내리는 것을 볼 것이다.”
아버지와 예수님과의 깊은 소통의 일치관계를 상징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내려 오시고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께 올라가니 예수님이야 말로 우리와 하느님 아버지 사이의 ‘천상 계단’임을 깨닫습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체험하는 진리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중 주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를 만나 은총의 선물을 가득 받는 우리들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