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학살당한아기들 (마태 2,13-18)

2018. 12. 28. 오전 7:11:40

글자


 [아기 순교자들 축일]학살당한아기들 (마태 2,13-18)


요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는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시라고 한다. (1요한 1,5―2,2)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5 듣고  이제 여러분에게 전하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곧 하느님은 빛이시며 그분께는 어둠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6 만일 우리가 하느님과 친교를 나눈다고 말하면서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7 그러나 그분께서 빛 속에 계신 것처럼 우리도 빛 속에서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친교를 나누게 되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줍니다.
8 만일 우리가 죄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우리 안에 진리가 없는 것입니다.
9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면, 그분은 성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10 만일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고  우리 안에 그분의 말씀이 없는 것입니다.
2,1 나의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죄를 짓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죄를 짓더라도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요셉은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고, 헤로데는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여 버린다. (마태 2,13-18)
13 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14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15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6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크게 화를 내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내어, 박사들에게서 정확히 알아낸 시간을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17 그리하여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18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죄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제1독서 (1요한1,5-2,2)

 

"만일 우리가 하느님과 친교를 나눈다고 말하면서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6)

 

앞선 요한1서 1장 5절에서 "곧 하느님은 빛이시며 그분께는 어둠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티끌만한 어둠도 없으신 완전한 빛이시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전혀'로 번역된 '우데미아'(udemia)'어떤 종류의 ~도 없다'부정의 뜻으로서, 빛이신 하느님께서는 어떠한 종류의 어둠도 없다는 뜻이다.


특히 사도 요한은 '우크'(uk) '우데미아'(udemia)라는 부정어를 같이 사용함으로서 부정의 의미를 보다 강조하고 있다.

빛이신 하느님 안에는 빛이신 하느님의 속성에 어떤 손상이나 흠집을 낼 만한 어떠한 종류의 어둠도 전혀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어둠'으로 번역된 '스코티아'(scotia)사도 요한의 전용어라고 할 정도로 그의 저서에 절대적으로 많이 쓰였다.

즉 신약의16회 용례 중에서 요한의 저서에 14회가 쓰였다.  그중의 12회가 모두 자연적 어둠이 아닌 죄와 불의 상징적 의미로 쓰였으며 (요한1,5; 8,12; 12,35.46; 1요한2,9.11), 요한1서 1장 5절에서도 같은 의미로 쓰였다.


이것을 통해 사도 요한은 하느님과 친교하는 모든 사람은 친교의 대상이신 하느님의 속성을 바로 알아야 됨을 보여주고 있다.

어둠이 조금도 없으신 빛이신 하느님과 친교하려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그 자신도 철저히 거룩함에 머물러야 함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면'


A.D.1세기 말 교회에는 빛이신 하느님과 친교한다고 하면서도 어둠 가운데 살아가는 자들이 있었던 것 같다.

여기서 '살아간다면'으로 번역된 '페리파토멘'(peripatomen)'둘레', '근처','주위'를 의미하는 전치사 '페리'(pari)'밟다'(루카10,19)란 뜻의 동사 '파테오'(pateo)의 합성어로서 '이리저리 거닐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페리파테오'(peripateo)의 현재 가정법이다.

 

현재 가정법은 현재의 반대적이고 계속적인 행동을 나타내므로  본문에서 이것은 빛보다도 어둠을 사랑하는 습관적인 방식을 가리킨다.

특히 요한의 편지에서 이 단어는 윤리적인 의미를 포함하며, 한 인간의 개인적인 삶의 스타일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되었다(1요한2,6.11; 2요한1,9.6; 3요한1,3.4).


한편,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1요한2,22) 당시 영지주의자들하느님과의 친교는 영적 진리를 깨닫는 지적인 측면을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하느님과 친교는 단순히 지적인 깨달음과 동의가 아니라 행위를 동반한 윤리적인 삶이라고 말하고 있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거룩한 영을 소유한 자들은 어떠한 죄로부터도 자유롭다고 가르쳤다. 그들은 하느님께로부터 거룩한 영적 지식을 선물받은 사람은 육체의 죄가 자신을 더럽히지 못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직접 주시는 놀라운 영지(靈知)를 가진 자에게는 더 이상 죄의 원리가 지배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 인간의 본성과 경험은 죄가 하느님과의 영적 관계에 막대한 영향을 주고 있음을 가르쳐준다.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이 있을 수 없고,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이 있을 수 없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요한3,20-21)


빛이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의 구세주로 모신 자는 진리를 실천하는 실질적 변화가 일어난다.

그리스도의 구속 성혈의 공로가 모든 허물을 깨끗하게 하므로 인간으로 하여금 더 이상 어둠 가운데 머물수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과 친교한다고 고백하는 이가 계속 어둠 가운데 살아가는 것은 모순인 것이다.


참된 회심과 죄의 보속은 인간을 더 이상 어둠 속에 살아가도록 놔두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안에 머무시는 거룩한 성령께서 속성상 어둠을 싫어하고 어둠과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내주(內住)하시는 하느님의 자녀는 진리의 영의 속성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빛과 진리 안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부분은 전체를 능가 하지 못한다
<마태,2/13-18.>

하느님은 이스라엘에 오시였지만 그 나라의 왕이 아니라 만왕의 왕으로써 우주의 주인으로 온 인류의 왕으로 오신 분을 헤로데는 자기 지역적 왕의 위치를 침범 할 가 두려워 새로나신 주님을 죽이려다 무죄한 어린 아기를 죽였습니다. 이는 부분은 전체를 받아 들이지 못하고 이해 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부분을 위한 것이고 전체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역사는 이를 증언합니다. 주님이 오심을 온 나라가 반기며 축하합니다. 저 높이 떠 있는 태양은 미국만 아니고 온 지구의 나라가 평등하게 관계 지어져 있습니다.

전체가 아닌 부분에 매여 있는 사람들은 시대적 사상이나 필요에 따라 일어난 사건에 휘말려 전체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주님으로 마치는 것으로 주님에 의지하여 지속되고 결실을 맺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분만 보고 의지하여 욕망을 체우려 하니 무리수를 놓고 애매한 희생을 만들어 냅니다. 세계역사 안에 일어난 무죄한 사람들의 희생은 전체적 생각보다 부분적 생각으로 일어난 불행입니다.

나치즘이 유대인을 대학살 한 사건을 인류 전체의 어울리는 공동체가 아니라 부분적 불편을 참지 못하여 일어난 사건이며 전쟁의 대부분 전체를 보지 못한 어리석은 자들의 작태입니다.

너만 없으면 내가 일어서 잘 살 수 있겠는데 너만 없으면 우리당이 잘되고 너만 없이하면 정의가 실현 된다고 하며 제거하고 감옥에 가두고 죽게 합니다.
우리는 어떤 위치에 있던지 이 나라의 안녕 평화 기쁨에 있지 나의 당 나의 위치를 생각하면 나라는 전체는 망하고 부분도 망하게 됩니다.
만인은 한 사람위해 있고 한 사람은 만인을 위하여 존재함을 깨닫고 개인이나 지역주의나 이기심에서 자기욕망을 체우려는 생각에서 벗어나 전체를 보는 눈과 마음을 가지고 살기를 기도합니다.

이석진 신부님


<예기치 않은 일에>

  반영억 라파엘 신부



우리는 살아가면서 생각하지 못한 많은 일을 접하게 됩니다. 기쁜 일도 있고 그렇지 못한 일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정말 분하고 원통하기 짝이 없는 일도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 마음을 흔들어 괴로워합니다.

시간이 흐르고 날이 지나면 괜찮을까 해도 어느 날 갑자기 떠올라 속이 쓰리고 아픕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원망해 봐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어떤 위로도 소용이 없습니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소리. 라헬이 자식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마태 2,18)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헤로데 임금은 이스라엘의 두 살 이하의 아기를 죽이도록 명령하였습니다(마태 2,16).

그것은 자기의 권력을 넘보는 싹을 잘라버리겠다고 한 행위입니다.

이런 일이 이미 이스라엘이 한창 피어날 때 이집트에서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힘과 생명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파라오는  “히브리인들이 계집아이를 낳으면 살려두되 사내아이를 낳으면 모두 강물에 집어넣어라.” (탈출1,22) 하고  이스라엘 백성의 아들들을 죽이도록 명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파라오의 학살에서 구출되어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도 헤로데의 잔악한 행위에서 살아 남으셔서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온 인류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십니다.




사람들은 파라오의 행동을 욕합니다. 헤로데 임금의 악한 행동에 분노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무서운 일이 오늘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느 전쟁보다 더 큰 희생을 가져오는 소리 없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보호막이 되어야 할 어머니의 뱃속에서 수많은 태아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보건복지부가 공식 집계한 임신 중절 수술만도 1년에 35만명에 가까운 태아들이 어머니와 아버지의 손에 의해 죽어가고 있으니 이 보다 더 큰 전쟁의 살상이 어디 있습니까?


부모들의 이기적인 마음이 무죄한 생명을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유린하고 있으니 그들의 통곡을 누가 위로해 줄 수 있겠습니까?

사형 제도를 찬성하거나 낙태 합법화를 찬성하면서 누구를 악하다고 욕하고 비난합니까?

아무 죄도 없이 죽어간 어린이들은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연약한 모습을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마음 씀씀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 쿠옷볼트데우스는 헤로데 임금에 의해 살해된 무죄한 어린이들의 죽음을

“어린 것들은 자기도 모르게 그리스도를 위해 죽어가고 …그들은 아직 말을 하지 못하면서도 그리스도를 고백합니다. 그들은 사지를 움직여 투쟁할 힘이 없는 아기에 불과 하지만 벌써 승리의 월계관을 얻었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예기치 않은 일이 하느님께서 주신 벌입니까? 그래서 하느님을 원망해야 합니까? 하느님께 책임을 물어야 합니까?

먼저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소유와 지배욕, 시기와 질투, 불필요한 욕심을 버려야 하지 않을까요?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마태 2,13)고 했을 때  요셉은 일어나 그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끊임없이 가르침을 줍니다.


그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면 바로 그때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앞날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대로 합니다.  그렇다면 그에 대한 책임도 스스로 져야 합니다.

 

“인간이 역사를 만들고 역사가 인간을 낳습니다.”

무고한 아기들의 떼죽음, 그 비참한 학살의 소용돌이에서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혼돈 속에서 오셨습니다.

성 베드로 크리솔로그의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순교자들은 죽음으로 태어나고, 끝남으로 시작을 이루며, 죽임 당함으로 살아 있습니다.  사람들은 순교자들이 이 지상에서 소멸된 것으로 생각하지만 천국에서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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