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4주간 월요일]별 (루카 1,67-79)
주님께서는 나탄 예언자를 시켜 다윗에게,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겠다.”고 하신다(2사무 7,1-5.8ㄷ-12.14ㄱ.16)
다윗 1 임금이 자기 궁에 자리 잡고, 주님께서 그를 사방의 모든 원수에게서 평온하게 해 주셨을 때이다.
2 임금이 나탄 예언자에게 말하였다. “보시오, 나는 향백나무 궁에 사는데, 하느님의 궤는 천막에 머무르고 있소.”
3 나탄이 임금에게 말하였다.“주님께서 임금님과 함께 계시니, 가셔서 무엇이든 마음 내키시는 대로 하십시오.”
4 그런데 그날 밤, 주님의 말씀이 나탄에게 내렸다.
5 “나의 종 다윗에게 가서 말하여라.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살 집을 네가 짓겠다는 말이냐?
8 나는 양 떼를 따라다니던 너를 목장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웠다.
9 또한 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물리쳤다. 나는 너의 이름을 세상 위인들의 이름처럼 위대하게 만들어 주었다.
10 나는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곳을 정하고, 그곳에 그들을 심어 그들이 제자리에서 살게 하겠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고, 다시는 전처럼, 불의한 자들이 그들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11 곧 내가 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판관을 임명하던 때부터 해 온 것처럼, 나는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평온하게 해 주겠다. 더 나아가 주님이 너에게 한 집안을 일으켜 주리라고 선언한다.
12 너의 날수가 다 차서 조상들과 함께 잠들게 될 때,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14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16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그때에 요한의 67 아버지 즈카르야는 성령으로 가득 차 이렇게 예언하였다.
68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69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
70 당신의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예로부터 말씀하신 대로
71 우리 원수들에게서,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72 그분께서는 우리 조상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당신의 거룩한 계약을 기억하셨습니다.
73 이 계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로
74 원수들 손에서 구원된 우리가 두려움 없이
75 한평생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기도록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76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77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
78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79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야훼를 찬양하는 다윗왕 (지거 쾨더)
대림 제4주간 월요일 제1독서 (2사무7,1-5.8ㄷ-12.14ㄱ.16)
"나는 양 떼를 따라다니던 너를 목장에서 데려다가, 네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웠다. 또한 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물리쳤다. 나는 너의 이름을 세상 위인들의 이름처럼 위대하게 만들어 주었다." (8-9)
사무엘 하권 7장 8절부터 16절까지는 그 유명한 '다윗 계약'(David's Covenant)이 주어지고 있다.
하느님의 대변자 나탄 예언자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일방적으로 다윗과 맺으신 편무(片務) 계약인 다윗 계약은 만왕의 왕, 만방의 주이신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육적, 혈통적 후손으로 오셔서 영원히 왕 노릇하실 것을 암시하는 계약이다.
이것은 인류 최초의 복음이요 약속인 여자의 후손 언약(창세3,15) 이후 맥맥히 이어온
그 이전의 모든 구약의 계약을 총망라하는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다윗 계약은 다음과 같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사무엘 하권 7장 8절, 9절은 다윗 개인의 영광을 보장하는 내용이다. 다음 7장 10절, 11ㄱ절은 이스라엘의 평화를 보장하는 내용이다. 마지막 7장 11ㄴ절-16절은 다윗 가문의 왕권 보존과 성전 건축에 대해 약속하시는 내용이다.
한편 이러한 다윗 계약은 하느님의 "그러므로 이제 너는 나의 종 다윗에게 말하여라" 는 명령으로 시작된다. 즉 하느님께서는 계약의 대상을 '나의 종 다윗' 으로 명명하신 것이다.
사무엘 하권 7장 8절 이후로는 하느님께서 다윗을 어떻게 오늘의 모습까지 이끌어오셨으며, 앞으로 어떠한 모습으로 높이실지를 말씀하고 있는데, 이러한 문맥에서 볼 때에
'나의 종'이란 칭호는 과거의 신실한 다윗의 행적을 보여주는 영예로운 호칭임과 동시에 그가 하느님 대전에서 언제나 섬기는 자의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을 암시해 주는 호칭이라고 할 수 있다.
사울은 하느님께 대한 순종의 자세를 상실했기 때문에 왕의 지위를 박탈당했다(1사무15,22). 그러나 영원한 왕이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께 순종하심으로써 영원한 왕권을 세우셨다(이사42,1; 마태12,18).
하느님께서는 다윗을 그 그리스도를 예비하는 자로 세우고자 뜻하셨기 때문에 그를 이미 '나의 종'으로 확정하여 부르고 계신 것이다.
'나는 양 떼를 따라다니던 너를 목장에서 데려다가,내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웠다'
본문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은 스스로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를 취하여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우셨기 때문임을 밝힌다.
여기서 본문 서두에 나오며, '나는'으로 번역된 1인칭 대명사 '아니'(ani)는 강조 용법이다. 이는 '너를 ~데려다가' 로 번역된 '레카흐티카'(leqahthika)에 이미 1인칭의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즉 '아니 레카흐티카'(ani leqahthika)를 번역하면, '나,곧 내가 너를 취했다' 가 되며, 이것은 하느님의 절대 주권적 행사를 강조하는 표현이다.
그리고 '양 떼를 따라다니던 목장에서'로 번역된 '민 한나웨 메아하르 핫촌'(min hannaweh meahar hatson) (min~에서, hannaweh 목장, meahar 따라다니던, hatson 양떼를)에는 '~로부터'란 뜻의 출신을 나타내는 전치사 '민'(min)이 맨 앞에와 메아하르에 두 번 쓰였는데, 이것은 다윗의 과거 이력을 말해주는 역할을 한다.
즉 과거 다윗은 벽촌 베들레헴에서 이사이의 여덟 아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나 양을 치던 목동으로서, 지금의 이스라엘의 왕의 신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천한 신분이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이런 자리에 있던 다윗을 친히 취하여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우신 것이다.
한편 '영도자'로 번역된 '나기드'(nagid)는 '현저하다', '보고하다' 라는 뜻의 '나가드'(nagad)동사의 수동 사역형에서 파생한 명사라고 볼 수 있다. 이 경우에는 '선포되어진 자', '지명되어진 자' 라는 뜻을 가진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영도자(지도자; ruler)는 스스로 권위를 쟁취한 자가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지목되어 공적으로 '선포되어진 자'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왕은 왕권을 자의적으로 행사할 수 없고, 앞절에 나온 '나의 종' 이란 호칭에서 암시되는 바와 같이 계약 안에서 하느님께 대한 순종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자였음을 알 수 있다.
사울 왕도 '나기드'(nagid)란 호칭으로 불리웠던 것을 보게 되는데(1사무9,16 ; 10,1), 그는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왕이신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통치권을 행사하여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떠나 자의로 왕권을 행사하였기 때문에, 결국 하느님에게서 부여받은 그 직분을 잃게 된 것이다.
더욱이 본문에서 다윗이 다스릴 백성은 그의 백성이 아니라,'내 백성 이스라엘' 로 소개되어 있다. 이것은 다윗의 직분이 청지기(관리인)의 사명인 것을 확실하게 나타내 준다.
'또한 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물리쳤다'
본절 서두에 나오는 '내가 ~있으면서' 로 번역된 '와에흐예'(waehyeh)는 와우 계속법으로서 '와우'(wau) 접속사와 '하야'(haya) 동사의 미완료형이 합하여진 형태이다.
이 와우 계속법은 앞절에서 '너를 ~데려다가(취하여)' 로 번역된 완료형 '레카흐티카'(leqahthika)를 이어가고 있기 때문에 완료형으로 번역해야 하며, 뒤에 '물리쳤다'로 번역된 와우 계속법인 '와아크리타'(waakrithah)도 완료형의 의미로 번역해야 한다.
이렇듯 본문이 완료형의 의미를 가지는 것을 굳이 밝히는 것은 사무엘 하권 7장의 시기적인 배경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하기 때문이다.
즉 사무엘 하권 7장 1절에서 이미 나오듯이, 사무엘 하권 7장의 내용은 사무엘 하권 6장을 곧바로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무엘 하권 8장 이후에 전쟁이 다 끝나고 평화의 시기가 도래하였을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무엘 하권 7장의 언급은 결국 다윗이 왕에 즉위한 이후 사무엘 하권 8장에 나오는 데로 오랜 세월 동안 하느님 당신께서 그의 적대자를 물리쳐 주신 것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왜 사무엘서의 저자는 6장과 7장 사이의 오랜 세월동안 발생하였을 여러 사건들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지나쳐 버린 것일까? 를 묻게 된다.
사무엘서의 구조를 자세히 보면, 이것은 그대로 지나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평화로운 시대를 먼저 언급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즉 사무엘 하권 8장 이후에 보면, 여러 전쟁 기사들이 언급되고 있다. 이것을 볼 때, 사무엘 하권 7장은 사무엘 하권 8장에 언급된 여러 전쟁들 이후에 찾아온 평화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평화의 시기를 사무엘 하권 7장에 먼저 소개한 것이다.
따라서 사무엘 하권 8장을 시작하는 '그 뒤에' 라는 표현은 사무엘 하권 7장의 내용과 연관된 표현이 아니라 사무엘 하권 6장을 이어가는 말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말하자면 사무엘서 하권은 6장, 8장, 7장의 순서로 이야기가 전개되어야 매끄러운 것이다.
그렇다면 왜 저자는 7장을 이런 사건이 기록된 8장에 앞서서 소개한 것일까?
첫번째 이유는 사무엘 하권 5장에서 언급된 웅장한 '다윗성'(5,9)과 사무엘 하권 6장에서 언급된 주님의 궤를 모시는 천막(6,17)의 초라함이 현격히 대조되고 있는 현실상의 문제를 먼저 결론 짓고자 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저자는 하느님의 성전 건축에 대한 이야기를 부각시키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사무엘 하권 5장 9절에서 다윗성, 5장 11절에서 다윗궁의 건축 사실을 한 구절로 간단히 매듭짓고, 사무엘 하권 6장에서 성전의 중심이 될 주님의 궤를 다윗성에 안치한 사실을 그토록 상세하게 언급했는지도 모른다.
만약에 주님의 궤가 천막에 머문 것으로 사무엘 하권 6장을 끝내고 바로 사무엘 하권 8장의 전쟁 이야기로 이어졌다면, 독자들에게 다윗은 주님의 궤가 천막에 머물러 있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 오랜 세월을 지낸 자 라는 인상을 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계약 궤의 다윗성 안치 사실을 다룬 사무엘 하권 6장에 바로 이어 사무엘 하권 7장에서는 성전 건축에 대한 다윗의 생각을 드러냄으로써, 오랜 세월 동안 다윗의 성전 건축에 마음을 쏟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두번째 이유는 사무엘 하권 6장 23절에서 사울의 딸 미칼이 죽는 날까지 아이가 없었다는 언급과 관련된 사항을 더 상세하게 확대하려는 의도에서였다고 볼 수 있다.
즉 미칼 사건을 끝으로 다윗의 왕가는 사울의 왕가와는 전혀 무관하게 되었으며, 하느님께서는 인본주의적인 왕 사울의 혈통과는 전혀 관계없는 다윗의 후손으로 왕위가 계승되게 함으로써, 결국 신본주의적인 영원한 나라를 세우시려 하셨다는 사실을 부각시키려 한 것이다(7,12).
이러한 사무엘 하권 7장의 내용이 사무엘 하권 6장과 8장 사이에 배치되어 들어간 위치를 통해, 성경의 역사는 세상 역사와 같은 연대기적인 기술이 아니라, 신학적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연대기를 초월하여 기술된 역사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사무엘 하권 7장 9절의 회상은 하느님의 주도적 역사하심을 중심으로 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것은 사무엘 하권 7장 6절과 9절에서 '와에흐예'(waehyeh) 즉 '그리고 내가 ~(하고) 있었다' 라는 말이 쓰여 말하는 주체 하느님과 행위의 주체 하느님을 일치시키는 것을 볼 때 확인된다.
대림 제4주간 월요일 복음(루카1,46~56)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 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51~52)
루카 복음 1장 51절의 '팔'로 번역된 '브라키오니'(brachioni; arm)는 단순히 신체의 한 부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 '야드'(yad)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능력을 상징하는 구약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신명26,8; 시편89,13).
그런데 여기서 이 단어는 '권능'으로 번역된 '크라토스'(kratos; mighty; trength)와 함께 사용되어 하느님의 크고 무한하신 힘과 능력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한편 '교만한 자들'에 해당하는 '휘페레파누스'(hyperephanus; the proud)는 '~위에', '~을 넘어서','~이상의' 등의 뜻을 가진 전치사 '휘페르'(hyper)와 '나타나다','자신을 나타내 보이다' 등의 의미를 가진 '파이노'(phaino)의 합성어에서 파생한 단어로 '하느님 앞에 자신을 지나치게 내보이는 자들','하느님을 대적하는 자들'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이다.
이것은 루카 복음 1장 50절의 '경외하는 이들'과 분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그 결과 또한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에게는 그분의 자비가 대대로 미치지만, 반면에 그를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흩어지는' 심판이 따른다는 것이다.
'주님이신 그분께 맞서는 자들은 깨어진다'(1사무2,10)는 한나의 노래를 연상케 하는 루카 복음 1장 51절에서, 마리아는 현명하게도 교만한 자를 치시는 하느님의 성품을 정확히 깨닫고, 자신의 모습을 비천한 계집종의 위치에 놓음으로써 높고 위대하신 하느님의 능력을 찬양하고 있다.
루카 복음 1장 52절은 '가난한 이를 먼지에서 일으키시고 궁핍한 이를 거름 더미에서 일으키시어 귀인들과 한자리에 앉히시며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1사무2,8)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노래를 떠올리게 한다.
이 문장은 분명한 대조를 이루는 단어로 구성되어 있는데, '통치자들'과 '비천한 이들', '끌어내리시고'와 높이셨으며'이다.
권세있는 자와 비천한 자에 대한 하느님의 공평하신 심판을 다루고 있는 이 구절은 이러한 단어들의 대조를 통해 하느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를 분명하게 나타내주고 있다.
여기서 '통치자들'로 번역된 '뒤나스타스'(dynastas; the rulers; the mighty)는 '주권자','통치자' 등을 의미하는 명사 '뒤나스테스'(dynastes)의 복수이므로 '권세있는 자들'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왕좌에서'로 번역된 '트로논'(thronon; their thrones; their seats)는 그 권세자들이 앉는 '옥좌들'(보좌들)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그들을 '끌어내리신다'는 것은 비록 세상 가운데서 권세있는 자들이라고 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그 마음에 합당하지 않은 자들을 얼마든지 그 보좌에서 내리칠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분임을 밝히는 것이다.
한편 '비천한 이들'로 번역된 '타페이누스'(tapeinus; the humble; them of low degree)는 '낮은 지위의','천한','겸손한'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형용사 '타페이노스'(tapeinos)의 복수형이므로 '비천한 자들'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이 단어는 앞의 '통치자들'과 대조를 이루며, 직접적으로는 세상에서 소외되고 낮은 지위에 있는 자들을 의미하지만, 영적으로는 하느님 앞에서 겸손한 자들을 가리킨다.
결국 이러한 표현 속에서 하느님께서는 비록 그들이 세상 가운데서는 낮고 천한 자들일지라도, 당신 앞에서 겸손하며 당신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들을 높이시는 분임이 드러나고 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좀더 높은 지위와 권세와 명성을 차지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안달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하느님 대전에는 도무지 의미없는 일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먼저 하느님 대전에 자신의 한계와 분수와 피조성을 인정하는 겸손한 모습을 가지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들어 높이 쓰실 것이기 때문이다.

다윗 임금은 주님께 바칠 성전을 세우려고 합니다. 나탄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몸소 다윗에게 한 집안을 일으키시어 그 나라의 왕조를 영원히 튼튼하게 해 주시리라고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합니다.
옛날부터 늘 유다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은 그 예언을 메시아 왕국의 의미로 이해하였습니다.
성령으로 가득 찬 즈카르야는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시어 아들을 낳으리라는 약속을 지켜 주신 하느님께 찬미를 드립니다.
그의 아들이며 메시아의 선구자인 세례자 요한의 탄생은 하느님께서 당신 약속에 충실하시다는 표징입니다.
즈카르야의 노래는 교회의 기도로, 시간 전례의 아침 기도에서 날마다 반복해서 바칩니다. 이 노래는 ‘마니피캇’처럼 이스라엘 백성의 기다림과 희망을 다시 반복해서 들려주며, 구약의 인용과 설명으로 이루어진 모자이크입니다.
이 노래의 첫째 부분은 하느님께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노래이고,
둘째 부분은 다가오는 메시아에게 길을 준비하는 선구자 요한의 등장으로 미래의 희망을 노래합니다.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떠오르는 별이신 메시아께서 우리를 찾아오실 것입니다.
이 성탄의 밤에 태어날 아기 예수님께서는 한밤중의 별을 권위 있게 밝혀 주십니다. 그 밤은 오직 파스카 축제의 밤과 비교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려고” 당신 백성을 찾아오십니다.
죄의 어둠과 죽음의 그늘이 눈앞을 가릴 때 사람은 오직 하느님만이 자신을 구원해 주실 분이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