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3주간 월요일]족보(마태 1,1-17)

야곱은, 형제들이 유다를 찬양하리라며, 지휘봉이 유다의 다리 사이에서 떠나지 않으리라고 한다. (창세 49.1-2.8-10)
그 무렵 1 야곱이 아들들을 불러 말하였다. “너희는 모여들 오너라. 뒷날 너희가 겪을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일러 주리라.
2 야곱의 아들들아, 모여 와 들어라. 너희 아버지 이스라엘의 말을 들어라.
8 너 유다야, 네 형제들이 너를 찬양하리라. 네 손은 원수들의 목을 잡고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엎드리리라.
9 유다는 어린 사자. 내 아들아, 너는 네가 잡은 짐승을 먹고 컸다. 유다가 사자처럼, 암사자처럼 웅크려 엎드리니 누가 감히 그를 건드리랴?
10 유다에게 조공을 바치고 민족들이 그에게 순종할 때까지 왕홀이 유다에게서, 지휘봉이 그의 다리 사이에서 떠나지 않으리라.”
마태오 복음사가는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소개한다. (마태 1,1-17)
1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2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고 이사악은 야곱을 낳았으며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들을 낳았다.
3 유다는 타마르에게서 페레츠와 제라를 낳고 페레츠는 헤츠론을 낳았으며 헤츠론은 람을 낳았다.
4 람은 암미나답을 낳고 암미나답은 나흐손을 낳았으며 나흐손은 살몬을 낳았다.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즈를 낳고 보아즈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다. 오벳은 이사이를 낳고
6 이사이는 다윗 임금을 낳았다.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7 솔로몬은 르하브암을 낳았으며 르하브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삽을 낳았다.
8 아삽은 여호사팟을 낳고 여호사팟은 여호람을 낳았으며 여호람은 우찌야를 낳았다.
9 우찌야는 요탐을 낳고 요탐은 아하즈를 낳았으며 아하즈는 히즈키야를 낳았다.
10 히즈키야는 므나쎄를 낳고 므나쎄는 아몬을 낳았으며 아몬은 요시야를 낳았다.
11 요시야는 바빌론 유배 때에 여호야킨과 그 동생들을 낳았다.
12 바빌론 유배 뒤에 여호야킨은 스알티엘을 낳고 스알티엘은 즈루빠벨을 낳았다.
13 즈루빠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야킴을 낳았으며 엘야킴은 아조르를 낳았다.
14 아조르는 차독을 낳고 차독은 아킴을 낳았으며 아킴은 엘리웃을 낳았다.
15 엘리웃은 엘아자르를 낳고 엘아자르는 마탄을 낳았으며 마탄은 야곱을 낳았다.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17 그리하여 이 모든 세대의 수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십사 대이고, 다윗부터 바빌론 유배까지가 십사 대이며, 바빌론 유배부터 그리스도까지가 십사 대이다.
대림 제3주간 월요일 제1독서 (창세47,1-2.8-10)
"유다는 어린 사자, 내 아들아, 너는 네가 잡은 짐승을 먹고 컸다.
유다가 사자처럼, 암사자처럼 웅크려 엎드리니, 누가 감히 그를 건드리랴?
유다에게 조공을 바치고 민족들이 그에게 순종할 때까지 왕홀이 유다에게서,
지휘봉이 그의 다리 사이에서 떠나지 않으리라." (9-10)
'유다는 어린 사자'
'사자'(아르예;aryeh)는 '잡아찢다'(아라;arah)에서 유래하였다.
백수의 왕 사자는 몹시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무척 사나운 동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군대에서 용사를 묘사할 때나(1역대12,8; 이사5,29) 정복을 묘사할 때(시편57,5; 에제19,2-9),
특히 승리하는 이스라엘을 묘사할 때에(민수23,24; 24,9) 자주 사자의 이미지를 사용하였다.
여기서 유다를 어린 사자(사자의 새끼)로 표현한 것은, 유다의 후손이
장차 승리자 혹은 정복자가 될 것이라는 예언이다.
성경은 미래의 용맹한 승리자를 예언할 때 흔히 어린 사자(사자의 새끼)로
표현하였기 때문이다(신명33,22; 에제19,2.3.5).
'누가 감히 그를 건드리랴?'
원문의 '미 예키멘누'(mi yeqimenu)를 '누가 감히 그를 건드리랴?'로 번역했는데,
'미'(mi)는 무엇(what) 혹은 누구(who)를 뜻하는 의문사이다.
그리고 '예키멘누'(yeqimenu)는 '일으키다'는 뜻이 있는 '쿰'(qum)의 사역형 미완료로서, '그는 그를 일어나게 하다' 라는 뜻을 갖는다.
그런데 본문의 의문사 '미'(mi)는 사실 반어법적인 표현으로서,'아무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결국 '유다를 일으켜 세우게 할 자는 아무도 없다' 는 뜻이다.
즉 유다는 독보적인 힘을 갖게 될 것임을 강조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본문에서 미완료형이 사용된 것은 이러한 현상이 계속 지속될 것을 보여준다.
이 예언은 유다의 후손으로서 근동 지방의 패권을 차지했던 다윗과 솔로몬에 의하여
일차적으로 성취되었다(2사무8,1-10.19).
그러나 마침내는 유다의 혈통적 후손이신 예수님께서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만왕의 왕이 되심으로써 완성되었다(묵시5,5).
'왕홀이 유다에게서, 지휘봉이 그의 다리 사이에서 떠나지 않으리라'
본문은 절대 부정을 나타내는 '로'(lo)가 문장의 서두에 나오며, 이어 '떠나지'(야쑤르;yasur)가 미완료형으로 쓰여 절대 왕홀이 떠나지 아니한다는 말로 시작되고 있다.
그런데 '왕홀'에 해당하는 '셰베트'(shebet)는 일차적으로 '막대기'(레위27,33; 1역대11,23), '지팡이'(판관5,14)를 가리키나, 상징적으로는 '권세'(시편125,3)라는 뜻이 있다.
여기서는 왕권 혹은 통치권을 상징하는 작은 지팡이를 가리키는데,
왕들은 공중 집회할 때 항상 이 홀을 휴대하였다.
그러므로 왕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한다는 것은
유다 지파가 계속 왕권을 계승할 것이라는 예언이다.
그러나 '지휘봉'(우메호케크; umehoqeq)의 해석에 대해서는 다소 다른 견해들이 있다.
먼저 '통치자의 지팡이'로 보는 견해이다.
히브리어 '하카크'(haqaq)가 본문처럼 분사로 쓰일 때 '통치자','입법자','지도자'
(판관5,14; 이사33,22)를 나타낸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 것이다.
많은 학자들이 이에 동의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본문이 운율을 가진 히브리 시(詩)로서,
시에서 자주 등장하는 평행법에 따르면,'하카크'(haqaq)는 '사람'이 아니라
앞서 나온 '왕홀'과 대비를 이루는 '지팡이'나 '지휘봉'이라는 견해를 취한다.
이러한 입장을 지지하는 새 성경은 그 다리 사이에서 지도자(사람)가 나온다는 해석이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그의 다리 사이'라는 말은 남자의 생식기를 가리키는 말로서
'그 후손들 가운데서' 라고 이해할 수 있으며, 이것은 왕권의 '혈통적 보존'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어떤 입장을 따르든지,본문은 유다의 자손들이 끊이지 않고 왕권을
계승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예언임을 알 수 있다.
이 예언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를 거쳐 남부 유다가 바빌론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유다의 후손들이 통치권을 이어감으로써 성취되었다(2사무5,3; 2역대36,11).
'유다에게 조공을 바치고 민족들이 그에게 순종할 때까지'
원문에 나오는 '쉴로'(shillo)를 '평화(안식)의 시기'를 의미하는 추상 명사로 보아서,
'안전하게 됨'(욥기3,21)을 뜻하는 '샬라'(shalla)에서 유래된 것으로 본다.
그래서 유다가 그들의 적들을 정복하여 '안전하게 될 때'까지
유다 후손의 통치가 계속될 것이라는 뜻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일부 학자들은 어근으로 추정되는 '쉴'(shill)이
갈대어나 아랍어의 '후손'을 의미하는 단어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아,
'쉴로'는 '후손' 곧 유다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성경의 주요 예언이 그리스도에 이르러 완전히 성취된다는 점과 더불어,
창세기 49장 8절로부터 계속되는 유다에 대한 예언은 궁극적으로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으로 종결된다는 점에서, '쉴로'(shillo)를 사람의 이름,
그 중에서도 유다 가문을 통해서 오실 '메시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타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순종할'로 번역된 '익케하트'(yikkehath)는, 아랍어 동족어인 '와크하트'(waqhat)가
'복종'이라는 뜻이며, 잠언 30장 17절에서도 이 단어는 '순종'의 뜻으로 번역되었다.
따라서 본문은 메시아의 도래와 하느님 나라의 임재,
그리고 영원한 천상 나라의 백성이 될 성도들이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기꺼이 순종하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이 된다(필리2,9-11; 묵시5,9-14 ;17,14).
대림 제3주간 월요일 복음 (마태1,1-17)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그리하여 이 모든 세대의 수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십사 대이고,
다윗부터 바빌론 유배까지가 십사 대이며,
바빌론 유배부터 그리스도까지가 십사 대이다." (16~18)
예수님의 족보 이야기가 복음에는 두 군데 나온다.
루카복음에는 3장 23~38절에 예수님으로부터 아담에 이르기까지 77(=7x11)대를 거슬러 올라가고, 마태오복음에는 1장 1~17절까지 아브라함에서부터 예수님까지 42(=14x3)대를 내려가며 기록한다.
두 족보 모두 객관적으로 조상들의 계보를 밝히기보다는 주관적으로 예수님의 정체를 밝힌다.
루카는 예수님께서 아담의 후예요, 하느님의 후예임을 강조하며(3,38),
마태오는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예요, 다윗의 후예인 메시아 이심을 강조한다(1,1).
b.c.1750 년경,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세상의 모든 족속들이 너로 말미암아
축복을 받으리라."(창세12,3; 22,18)고 말씀하셨는데, 예수님께서 바로 저
축복받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시다.
또한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은 b.c.1010~970년경 통일 국가 이스라엘의 2대 임금으로 재위한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위대한 성군 메시아(희랍어로 'christus')가 탄생하리라고 기대했었는데, 예수님께서 바로 '다윗의 아들','그리스도'이시다.
족보에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말고 다른 부인 4명이 등장한다.
ㄱ) 타마르(3절)
ㄴ) 라합(5절)
위 두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가나안 원주민이다.
ㄷ) 룻(5절)~모압 출신 여자
ㄹ) 바쎄바(6절)~우리야의 아내; 솔로몬의 어머니 바쎄바는 다윗의 아내가 되기 전에
본디 이방인 동네 히티트 출신 군인 우리야의 아내였다.
그러니까 네 부인은 자신이 이방인이거나 남편이 이방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 뿐 아니라 이방인들의 메시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마태오 복음사가가 일부러 이런 부인만 골라서 올렸는지도 모른다.
네 부인들의 또 한가지 공통점은 정상적인 부부관계가 아닌,
매우 기이한 인연으로 아들들을 낳았다는 사실이다.
타마르는 자식없이 남편과 사별한 다음에 기상천외하게도 시아버지 유다와 동침한다.
이미 '피앗사랑 카페'의 '오늘 미사의 독서 말씀' 2011년12월 17일 대림 제3주간 토요일
제1독서 창세기 49장 1~2절, 8~10절에서 전부 설명했다.
라합은 예리고의 소문난 창녀로서 살몬과 관계하고,
룻은 보릿가리 옆에서 잠든 보아즈를 유혹하여 결혼하고,
바쎄바는 자신을 범하고 자기 남편을 전사케 한 다윗과 결혼한다.
이렇게 네 여인들은 제각기 기이한 인연으로 아들들을 낳았던 것이다.
오늘날의 독자들은 윤리적, 도덕적 관점에서 이 여인들의 불륜을 나무랄 것이다.
그러나 유대교 율사들은 그런 일들을 달리 풀이 했다.
곧 다윗의 가계, 메시아의 가계가 바야흐로 끊어지려는 순간 순간에
하느님께서는 불가사의한 방법으로 가계를 이어 가셨다고 풀이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 여인들은 하느님께서 극적으로 개입하신
순간순간의 유용한 도구들인 셈이다.
마침내 불가사의의 극치로, 마리아는 처녀의 몸으로 에수님을 잉태하고 낳는다
(마태1,18~25).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 가문의 부도덕을
정당화, 합리화, 미화하시고 계시는 것인가?
그건 아니고, 하느님께서는 불완전하고 나약한 인간들이 저지르는 죄악과 실수,
허물로 가득찬 인간사(세속사)를 통해서도 구원의 역사를 만들어 가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보여 주신다.
말하자면, 악에서도 선을 끌어내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인간이 되어 오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예수님 조상들의 혈통, 족보,
계보도 그리 개끗하지도, 산뜻하지도, 거룩하지도 못한 구석들이 있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피가 더러우냐? 하면, 그렇지 않다.
그러한 부족하고 모자라기 짝이 없는 인간의 역사도 내치지 않으시고,
구원의 역사로, 하느님의 역사로 만들어 나가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보여준다.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한번 하신 약속을 그대로 이어가시고,
신실하게 지켜 나가시는 분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마태오 복음 1장 16절에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요셉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가 아니고,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부부의 자연 생산력이 아닌, 출산전(前)도 출산시(時)도 출산후(後)도
동정녀(평생)이신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말미암은 수태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성모님은 이런 의미에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다윗 가문의 후예이시다.
우리도 성모 어머니의 믿음을 통해 아브라함의 축복 누릴 수 있다.
마니피캇에 나오는 데로, '이제로부터 만세가 나를 복되다 일컬으리니'하신 성모님의 말씀은 우리가 매일 바치는 묵주의 기도의 '성모송'에서 그대로 실현되고 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우리도 수평적인 사회적 관계에서 상대방을 자꾸 칭찬하고 격려하고 좋은 점만
자꾸 이야기하고 긍정적인 말을 하면, 자신에게도 좋게 복으로 돌아오는
피드백을 알고 있다.
무한히 선하시고 완전하시고 지엄하시고 거룩하신 성삼위의 내적 영광은
부족함이 없이 완벽하다.
그러나 성삼위 하느님이 지니고 계신 지극히 존귀하심, 엄위하심, 거룩함과 진실함, 권능과 권세 등등을 하느님의 자녀들과 천사들이 자꾸 밖으로 드러내어 기릴 때, 하느님의 외적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다.
끊임없이 '주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통해서 그리고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라고 하면서 찬양과 감사와 흠숭을 드릴 때, 하느님께서도 기뻐하시며
축복해 주신다.
이것이 인간에게 축복으로 돌아오는 원리이다.
어떤 처지에서도 나부터 주님 대전에, 주님 뜻대로 잘 살고 거룩하게 걸으면 된다.
그러면 나를 통해 나의 주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축복이 전해진다.
창세기의 이집트의 재상이 된 요셉처럼 말이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여기서 '남편'으로 번역된 '안드라'(andra)는 원형 '아네르'(aner)의 목적격 단수로서
정관사 '톤'(ton)과 함께 '톤 이오세프'(ton ioseph)와 동격으로 쓰였다.
'아네르'(aner)는 여성과 구별된 '남성', 아내와 구별된 '남편', 그리고 미성년자와 구별된 '어른'이라는 명사인데, 여기서는 '남편'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그리고 '요셉'에 해당하는 '이오세프'(ioseph)는 '더하다'(to add)는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인명 '요쎄프'(yoseph)에 대한 희랍어 음역이며, 족보상 예수님의 아버지지만, 혈통적으로나 육체적으로는 예수님의 아버지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마태1,18)에게서 출생했기 때문이다
(마태1,18~25).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마태오 복음 1장 2절부터 16절 상반절까지는 모두 남자가 그 아들을 낳는 것으로 기록되었지만, 본문에 이르러서는 예수님께서 여자에게서 출생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족보상으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시지만, 육체적으로는
그들과 관계없이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의 후손이라는 사실과 하느님께서 하와에게
하신 예언('여자의 후손'; 창세3,15)과 이사야가 한 예언('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이사7,14)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것은 지금까지 '낳다'라는 표현인 '에겐네센'(egennesen)이 능동형이었는데,
본문에서는 '태어나셨다'에 해당하는 '에겐네테'(egennethe)가 수동형이라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즉 마리아는 자의적으로 예수님을 낳은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잉태된
메시야를 육체적으로 낳는 역할을 한 것이다.
이처럼 마태오 복음사가는 단어 하나의 선택에 있어서도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이
인간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느님의 역사임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리고 '마리아에게서'로 번역된 '엑스 헤스'(eks hes; of whom)에서
'엑스'(eks; of)는 '(공간적으로)안에서 밖으로'라는 의미로서 분리와
이탈을 나타내는 전치사이며, '헤스'(hes; whom)는 관계대명사 '호스'
(hos)의 여성 소유격 단수로서 본절 상반절의 '마리아스'(marias)를 받고 있다.
따라서 '엑스 헤스'(eks hes)는 문자적으로 '그녀로부터'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불리는'으로 번역된 '레고메노스'(legomenos; is called)는
'말하다'(to say)는 의미를 지닌 동사 '레고'(lego)의 현재 수동태 분사
남성 단수 주격으로서 앞에 있는 정관사 '호'(ho)와 함께 형용사적 용법으로 쓰였다.
즉 '호 레고메노스 크리스토스'(ho legomenos christos)는
'(일반적인 사람들에 의해서) 그리스도라고 말해지는
(일컬어지는)'이라는 의미이다.
이 시점은 예수님께서 출생하던 당시가 아닌, 마태오 복음사가가
복음을 기록하던 초대 교회 시대인 것이다.
초대 교회 때부터 사도들과 선교사들은 나자렛 예수님이 바로 유대인들이
그토록 대망해 오던 메시야, 즉 그리스도라고 가르치며 선교했으며
(사도 5,42; 17,3; 18,5.28), 자연히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식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집안에 있는 족보에 여자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출가외인’이라는 생각이 담겨있었나 봅니다. 그리고는 나이에 상관없이 아저씨뻘이니 형님뻘이니 하며 ‘촌수’를 따지곤 했습니다. 누가 출세하면 그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하며 호들갑을 떨고, 먼 친척도 그때는 아주 가까운 것처럼 느끼며 자랑했습니다. 지금도 혈연, 지연, 학연에 목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미 그리스도의 족보에 여인이 등장했습니다. 그것도 훌륭한 사람이라고 여겨지지 않은 사람도 부끄럼 없이 올라 있습니다. 시아버지와 동침하여 자식을 낳은 타마르, 창녀로써 적군과 내통한 라합, 라합은 예리코를 정탐하러 갔을 때에 여호수아가 보낸 심부름꾼들을 그 여자가 살려 주었기에 그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와 형제, 그리고 그에게 딸린 모든 이를 살려주었습니다(여호6,23-25). 그리고 젊은 과부로 보아즈를 유혹했던 이방인인 룻,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이를 갈며 싫어했던 이방인을 보아즈는 아내로 삼았습니다. 조상이 번듯해야 행세하는 세상인데 예수님의 조상은 별 볼일 없어 보입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다윗은 우리야라는 병사의 아내를 취하여 잠자리를 가졌고, 그녀가 임신을 했다고 하자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하여 우리야를 최전선으로 보내 죽게 한 다음, 그의 아내, 바쎄바를 취하였습니다. 그렇게 빼앗은 여인에게서 얻은 자식을 메시아의 조상으로 삼았으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감추고 싶은 죄인들이 등장함은 의미가 큽니다. 메시아의 가계가 끊어지지 않도록 기묘한 방법으로 대를 이어가셨다고 할 수 있고, 또한 의인과 죄인의 장벽이 무너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룻을 등장시킴으로써 유다인만의 메시아가 아니라 이방인의 메시아도 된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계십니다. 첩의 자식을 드러냄으로서 구박과 멸시 속에 살아가야할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줍니다. 내 부모, 혹은 윗대의 조상에서 이상한 가족관계가 형성되었다고 실망하거나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러셨고 예수님께서는 누구든 사랑하시고자 오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이에게 구원을 주시러 인간역사 안에 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계속 이어지는 족보의 끝에 나의 이름도 기록될 것입니다. 기왕이면 하느님의 섭리 안에 내로라하는 인물이 아니더라도 죄인으로 기록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아니 우리는 회개한 사랑받는 죄인이기를 희망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역대 이스라엘 왕 가운데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 그분 마음에 드는 아들(마태3,17)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기 위해 기름부음 받은 자요, 주님의 영을 받은 이(루카4,18) 입니다. 그분은 구원역사를 완성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완성의 여정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족보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기에 앞서 그분 마음에 드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