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1주간 수요일]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마태15,29-37)

2018. 12. 5. 오전 5: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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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1주간 수요일]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마태15,29-37)


이사야 예언자는, 만군의 주님께서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시리라고 한다. (이사 25,6-10ㄱ)
그날 6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
7 그분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겨레들에게 씌워진 너울과 모든 민족들에게 덮인 덮개를 없애시리라.
8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
정녕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9 그날에 이렇게들 말하리라. “ 보라, 이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이분께 희망을 걸었고 이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희망을 걸었던 주님이시다. 이분의 구원으로 우리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10 주님의 손이 이 산 위에 머무르신다.”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많은 병자를 고쳐 주시고 광야에서 군중을 배불리 먹이신다. (마태15,29-37)
그때에 29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로 가셨다. 그리고 산에 오르시어 거기에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
30 그러자 많은 군중이  다리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왔다. 그들을 그분 발치에 데려다 놓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31 그리하여 말못하는 이들이 말을 하고 불구자들이 온전해지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눈먼 이들이 보게 되자, 군중이 이를 보고 놀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32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
33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 광야에서 이렇게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일 만한 빵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34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하시자, 그들이 “일곱 개가 있고 물고기도 조금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5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땅에 앉으라고 분부하셨다.
36 그리고 빵 일곱 개와 물고기들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37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찼다.






 대림 제1주간 수요일 제1독서(이사25,6~10ㄱ)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  정녕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8)


'죽음'에 해당하는 '함마웨트'(hammaweth) 죄의 결과에서 오는 인간의 죽음을 의미하는 '무트'(muth)에서 유래한 명사로서(창세2,17), 육체적 죽음 뿐만 아니라 영적 죽음까지 모두 포괄한다.


영적 죽음은 하느님의 생명이 없는 상태로서(에페4,18),  생존시에도 하느님을 전혀 알지 못하고 하느님과의 관계가 없으며, 죽어서는 하느님의 의노의 심판에 처해지는 운명을 나타낸다.


죄를 범함으로 이 땅에 들어온 육체적 죽음과 더불어 이러한 영적 죽음이 지배하는 한, 완전한 구원은 이루어질 수 없다.

따라서 주 하느님은 하느님 나라의 잔치를 마련하여 사람들이 거기에 참여하기 전에 죽음을 완전히 없해 버리실 것이다.


한편 '없애 버리시리라'에 해당하는 '빨라'(balla)의 원형 '빨라으'(ballah)는  일반적으로 음식물 따위를 목구멍 아래로 삼켜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창세41,7; 탈출7,12; 민수16,30; 욥기20,15). 이 죄많은 세상에서 악마가 으르렁대는 사자처럼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지만(1베드5,8), 장차 다가온 종말의 날에 주님께서 생명의 원수인 죽음을 삼켜 버리실 것이다.


이 단어는 본문에서 강조 능동형으로 사용되어 그 의미가 한층 강조되어 있으며, 완료 시제로 사용되었다. 여기에서 완료 시제는 과거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언적 완료(prophetic perfect)로서 비록 미래의 일이지만 그 실현이 과거에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분명히 이루어질 것임을 강조한다.

한편 이러한 죽음의 파멸에 대해서는 묵시록 21장 4절에 확정적이고 선명하게 예언되어 있다.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내고'


'눈물'에 해당하는 '띠므아'(dimah)슬픔과 애도의 문맥에 사용되는 것으로서 성도들이 세상에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 무수한 고난을 당할 수 밖에 없음을 함축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마지막 날이 되면, 주 하느님께서는 핍박과 어려움 속에서도 신앙을 굳게 지키기 위해서 흘렸던 성도들의 모든 눈물을 말끔히 씻어주실 것이다.

이것은 주 하느님의 위로가 넘칠 것을 의미하는데, 그의 위로가 세상에서 흘렸던 모든 눈물과 당했던 모든 고통을 다 잊어버리고도 남음이 있는 넘치는 것임을 암시한다.


온 천하를 주관하시는 주 하느님께서는 자비가 풍성하여 어머니가 바깥에서 다쳐 울면서 집으로 돌아온 자녀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듯이 세상에서 상처받고 고난당한 자녀들의 얼굴을 어루만지시며 눈물을 씻어주실 것이다. 이러한 예언은 묵시록 7장 17절, 21장 4절에서도 다시 한 번 찾아볼 수 있다.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


본문은 주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는 하느님의 백성들이 결코 단죄를 당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되는 축복을 받을 것을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은 이 땅에서 주님을 믿지 않고 교만하여 범죄한 대가로 인해 주님의 심판대 앞에 나설 때 단죄를 당해 그 수치를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구속성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씻음을 받은 하느님의 백성들은 하느님 대전에 설 때에 세상에서 연약하여 지었던 죄로 인해 결코 단죄를 당하거나 수치를 입지 않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총과 관계된 진리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당신 백성'에 해당하는 '암모'(ammo)구약 시대에 오직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에게만 한정하여 주로 사용하던 명사 '암'(am)3인칭 소유격 단수 접미어가 결합된 형태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 단어는 이스라엘 민족의 혈통을 가진 자들만을 한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받아들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 모든 백성을 포함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로마8,14-17). 


'정녕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본문은 이사야 25장 6~8절의 예언이 이사야 예언자 자신이 지어낸 허탈한 희망의 말이 아니라 역사의 주인이신 주님께로부터 비롯된 계시의 말씀임을 나타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모든 예언이 신적 권위를 지녔음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본문은 이유의 의미를 지닌 접속사 '키'(ki; 왜냐하면)로 시작되는데, 이것은 주님께서 계시로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위의 예언들이 반드시 성취되고야 만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



 품어 생각하면

 반영억라파엘신부


아침잠에서 깨면서 살아있구나 오늘 하루를 또 허락 하셨구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날을 허락하신 이유가 있고, 기대하시는 바가 있는데 얼마나 알아듣고 그에 부합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를 반성합니다. 그리고 하루의 끝에서 어떻게 감사할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이 새로워지면 매일이 새 날인데 새날을 만들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안고 삽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찼습니다. 정말 이런 일이 가능한 일입니까? 그렇다면 왜 오늘날엔 기아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그냥 버려두십니까? 그들에게 기적을 베풀어주지 않으시는 주님이 야속합니다. 영적으로 뿐 아니라 육체적인 질병을 고쳐 주셨고 육체적인 굶주림을 채워주셨던 주님께서 오늘도 여전히 당신의 능력을 밝히 드러내시길 기도합니다.


사실 세상의 굶주림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기적을 베풀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나누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제대로 베풀면 세상의 기아는 사라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아무리 큰 기적을 하신다 해도 내가 베푸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굶주림은 여전히 계속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기적을 베풀어 주신 의미를 품어 생각하면 능력의 주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어진 은총의 결과물에 매여 있으면 언제든지 풍요롭게 베풀어 주실 수 있는 주님은 뵙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총의 열매보다도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감사를 드리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슴에 새겨야겠습니다. 


예레미야서 31장 33절을 보면 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게 된다고 하시며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나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하고 말합니다. 이스라엘백성의 하느님이 되신 그분이 오늘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지켜주시고 앞길을 열어주십니다. 허물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위해 기적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도구 삼아 당신의 할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고 제자들이 다시 군중에게 나누어준 행위는 바로 나눔의 가르침을 줍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은 자기들끼리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필요로 하는 모든 이와 함께 나눠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적을 보지 말고 오히려 주님의 능력에 응답하여 기적을 이루는 사람, 기적을 전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먹고도 남는 일곱 바구니는 주님을 따르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측은지심, '가엾구나‘ 하는 마음으로 백성을 바라보셨던 예수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모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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