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4주간 목요일]속량 (루카 21,20-28)

요한 사도는, 대바빌론이 무너졌다는 천사의 소리와 하느님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우시다는 소리를 듣는다.(묵시 18,1-2.21-23; 19,1-3.9ㄱㄴ)
나 요한은 1 큰 권한을 가진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는데, 그의 광채로 땅이 환해졌습니다.
2 그가 힘찬 소리로 외쳤습니다. “무너졌다, 무너졌다, 대바빌론이! 바빌론이 마귀들의 거처가 되고 온갖 더러운 영들의 소굴, 온갖 더러운 새들의 소굴, 더럽고 미움받는 온갖 짐승들의 소굴이 되고 말았다.”
21 또 큰 능력을 지닌 한 천사가 맷돌처럼 큰 돌을 들어 바다에 던지며 말하였습니다. “큰 도성 바빌론이 이처럼 세차게 던져질 터이 다시는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22 수금 타는 이들과 노래 부르는 이들, 피리 부는 이들과 나팔 부는 이들의 소리가 다시는 네 안에서 들리지 않고 어떠한 기술을 가진 장인도 다시는 네 안에서 찾아볼 수 없으며 맷돌 소리도 다시는 네 안에서 들리지 않을 것이다.
23 등불의 빛도 다시는 네 안에서 비치지 않고 신랑과 신부의 목소리도 다시는 네 안에서 들리지 않을 것이다. 너의 상인들이 땅의 세력가였기 때문이며 모든 민족들이 너의 마술에 속아 넘어갔기 때문이다.”
19,1 그 뒤에 나는 하늘에 있는 많은 무리가 내는 큰 목소리 같은 것을 들었습니다.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권능은 우리 하느님의 것.
2 과연 그분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우시다. 자기 불륜으로 땅을 파멸시킨 대탕녀를 심판하시고 그 손에 묻은 당신 종들의 피를 되갚아 주셨다.”
3 그들이 또 말하였습니다. “할렐루야! 그 여자가 타는 연기가 영원무궁토록 올라간다.”
9 또 그 천사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행복하다.’고 기록하여라.”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적군에 포위되는 징벌의 날에,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라고 하신다.(루카 21,20-2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
21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
22 그때가 바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이기 때문이다.
23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이 땅에 큰 재난이, 이 백성에게 진노가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24 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지고 포로가 되어 모든 민족들에게 끌려갈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25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26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27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사람들이 볼 것이다.
28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제1독서 (묵시록 18,1-2.21-23.19,1-3.9ㄱㄴ)
"무너졌다. 무너졌다. 대바빌론이! 바빌론이 마귀들의 거처가 되고, 온갖 더러운 영들의 소굴, 온갖 더러운 새들의 소굴, 더럽고 미움 받는 온갖 짐승들의 소굴이 되고 말았다." (2)
하느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천사(묵시18,1)가 외치는 내용이다.
특히 '무너졌다. 무너졌다. 대바빌론이!' 라는 외침은 이미 묵시록 14장 8절에서 언급된 다른 두 번째 천사가 외쳤던 바로 그것이다.
즉 대바빌론(큰 성 바빌론)의 멸망은 이미 묵시록 14장 8절에 암시되었고, 묵시록 16장 19절에 묘사된 일곱째 대접 재앙에서 본격적인 멸망에 이른 것으로 묘사된 것이다.
여기서 '무너졌다'로 번역된 '에페센'(epesen;fallen)은 '무너지다', '떨어지다' 라는 뜻을 지닌 '핍토'(pipto)의 예언적 부정 과거로서, 이것이 이중으로 언급되어, 향후 반드시 도래할 대바빌론의 완전한 멸망을 확신에 찬 어조로 드러낸다.
그런데 본문에서 선언된 바빌론의 멸망은 명백히 '무너졌습니다. 무너졌습니다. 바빌론이!'(이사21,9) 라고 말한 이사야의 언급과 연관되는 것이다.
그리고 '대'(큰)로 번역된 '메갈레'(megalle)가 '바빌론'과 함께 사용된 용례가 자주 발견되는데, 이것은 그 성의 실제 크기나 위대함을 가리킨다기보다는, 네부카드네자르처럼 스스로를 과대 평가하는 교만함에 대한 상징적 묘사이다.
묵시록에서 바빌론은 문자적 의미의 고대 바빌론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사도 요한 당시 로마 제국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따라서 대바빌론은 일차적으로 네부카드네자르와 같이,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교만한 로마 제국의 정치 권력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1베드5,13).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제국이 바빌론의 궁극적인 상징은 아니다. 왜냐하면, 묵시록은 단순히 로마의 멸망을 예언하는 예언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단순히 로마를 거점으로 하여 종교적, 도덕적 타락의 극치를 바빌론으로 형상화한 것일 뿐이다.
다시말해서, 사도 요한이 바빌론으로 상징하고 있는 것은 종말에 드러날 '악의 총체'이다.
따라서 대바빌론의 멸망은 곧 사탄에 의해 통제되던 악의 총체가 괴멸당할 것이라는 의미를 축하고 있는 것이다.
대바빌론은 '땅의 탕녀들과 역겨운 것들의 어미'(묵시17,5)로서, 이 탕녀에게 내려질 심판은 묵시록 17장에,그것의 패망은 묵시록 18장에 더욱 확대되어 자세하게 묘사된다.
'바빌론의 마귀들의 거처가 되고, 온갖 더러운 영들의 소굴, 온갖 더러운 새들의 소굴, 더럽고 미움 받는 온갖 짐승들의 소굴이 되고 말았다'
하느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천사는 힘찬 소리로 바빌론의 함락을 선포하고, 그 결과 그곳이 마귀들의 거처와 온갖 더러운 영들의 소굴과 온갖 더러운 새들의 소굴, 더럽고 미움받는 온갖 짐승들의 소굴이 되고 말았다고 언급한다.
묵시록 16장 13절,14절에서 사도 요한은 "그때에 나는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예언자의 입에서 개구리같이 생긴 더러운 영 셋이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마귀들의 영으로서 표징을 일으키는 자들입니다" 고 언급한다.
즉 사도 요한의 어법에서 '더러운 영'과 '마귀들의 영'은 상호 교환이 가능한 표현으로서,'마귀'(다이모니온;daimonion)는 곧 '더러운 영'(프뉴마토스 아카다르투;
pneumatos akathartu)과 동격 관계를 형성한다.
따라서 바빌론이 '온갖 더러운 영들의 소굴, 온갖 더러운 새들의 소굴, 더럽고 미움받는 온갖 짐승들의 소굴이 되고 말았다'라는 언급은 '바빌론이 마귀들의 거처가 되었다'라는 언급을 더욱 풍부하게 부연 설명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여기서 '거처'로 번역된 '카토이케테리온'(katoiketerion)과 세 차례나 '소굴'로 번역된 '퓔라케'(phyllake)는 언어적으로 병행한다.
그런데 '퓔라케'는 단순히 삶의 근거지(dwelling place)나 모이는 곳만이 아니라 '감옥', '소굴'이란 부정적 의미도 지닌다(묵시20,7).
이런 의미에 유의할 경우, 본문은 틀림없이 바빌론의 과거의 화려했던 모습과는 대조되는 황폐하고 불결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부각시킴으로써, 멸망한 바빌론의 참상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되고 말았다'로 번역된 '에게네토'(egeneto)는 '발생하다', '일어나다' 라는 뜻을 지닌 '기노마이'(ginomai)의 부정 과거로서, 이러한 발생을 동적 이미지로 드러낸다.
영적 차원에서 보면, 바빌론은 이미 이전에도 마귀들의 '거처' 였지만(에이미,eimi), 본문에서는 그것을 마귀들의 거처가 '되고 말았다'(기노마이, ginomai)라고 묘사하여, 멸망당한 바빌론의 폐허를 더욱 선명하게 연상시킨다.
그러나 다른 한편, '퓔라케'(phyllake)는 '감시하는 곳' (watching place)이란 의미도 나타낸다.
이럴 경우 이것은 하바쿡서 2장 1절의 "나는 내 초소에 서서, 성벽 위에 자리 잡고서 살펴보리라" 라는 어구와 병행한다.
즉 반신적 세력들은 마치 먹이를 기다리는 더러운 새들처럼 멸망해 가는 그들의 파수대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더럽고 미움 받는'으로 번역된 '아카타르투 카이 메미세메누'(akathartu kai memisemenu)는 묵시록 17장 4절에 언급된 '손에는 자기가 저지른 불륜의 그 역겹고 더러운 것이 가득 담긴 금잔을 들고 있었습니다' 에도 나온다.
여기서 '더러운 것'으로 번역된 '아카타르타'(묵시17,4)는 부정 접두어 '아'(a)와 '깨끗한', '정결한' 이란 뜻을 가진 형용사 '카타로스'(katharos)에서 파생한 명사 '카타로테스'(katharotes)의 합성어로서, 탕녀가 자행한 불륜 때문에 역겹고 더러운 것들이 금잔 속에 담겨져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불륜의 역겹고 더러운 것'이란 우상 숭배로 인한 도덕적, 영적 타락 일체를 형상화한 것이다(마태23,25참조).
그리고 신명기 14장 12-20절에는 먹을 수 없는 부정한 새의 목록이 언급되고 있으며, 구약 성경은 도처에서 동물과 사람의 썩은 시체를 먹이로 찾는 새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므로 (신명 28,26;1열왕14,11; 21,24; 예레7,33; 15,3;1 6,4; 19,7; 34,20; 에제29,5; 32,4),
'온갖 더러운 새들'은 이러한 새들을 염두에 둔 표현이며, 앞에 나온 '마귀들', '더러운 영들' 등 악령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복음(루카21,20~28)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침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27~28)
루카 복음 21장 27절은 예수님의 영광스런 재림을 직접적인 어휘로 묘사하고 있다.
루카 복음 21장 25절과 26절은 종말에 두려워 떨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한 반면에, 21장 27절은 그리스도께서 권능과 큰 영광으로 오시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사실 21장 27절은 다니엘서 7장 13절과 14절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 구절로서 '사람의 아들'(인자,人子)의 재림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특히 이 모습은 승천하신 예수님의 모습과 깊은 관련이 있는데(사도1,9~12), 하늘로 올라가실 때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재림 때에도 동일하게 재현될 것임을 보여 준다.
한편 루카 복음 21장 28절의 '이러한 일들'로 번역된 지시 대명사 '투톤'(tuton; these things)이 무엇을 가리키는 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많은 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나타나는 우주적 징조를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재림 시기의 정확한 때와 시간을 알 수 없지만, 말씀에 예언된 나타나는 징조들을 통해 그 시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재림의 시간에는 사람들이 극단의 대조적인 모습을 보일텐데, 그것은 그 재림의 날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벌에 처해지는 두려움과 고통의 날이 될 것이며, 믿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얻는 완전한 기쁨의 날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사람들에게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로 권고하신다. 이 표현은 공관 복음의 병행 기사에서 루카 복음에만 나온다.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직접 천사를 보내어 선택하신 이들을 모으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약속이 나온다(마태24,31; 마르13,27).
이러한 차이는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사가가 마지막 날에 하실 예수님의 일을 중심으로 기록하였고,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들을 중심으로 기록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말하자면,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사가의 시선은 하늘에 있었고, 루카 복음사가의 시선은 땅에 있었다.
루카 복음사가가 이렇게 기록한 것은 특별히 예수님을 따름으로 인해 고난을 당하는 이들에게 용기와 격려를 주기 위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허리를 펴고'라는 뜻으로 번역된 '아나큅사테'(anakypsate; stand up)의 원형 '아나큅토'(anakypto)는 '스스로 일으키다','치켜 올리다'는 뜻이다.
그러나 비유적으로는 사람의 정신이나 원기를 '돋우어주다','고무시키다'는 뜻도 있다.
그리고 '들어라'로 번역된 '에파라테'(eparate; lift up)의 원형 '에파이로'(epairo)는 자신의 신체의 일부, 즉 '손'(1티모2,8)이나 '머리'등을 '높이 들어올리다'는 뜻이다.
따라서 세상의 마지막 때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징조를 볼 때, 신앙인들은 머리를 들고 그 징조들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주님의 재림의 때를 기다리라는 것이다.
믿지 않는 이들은 세상의 마지막 때에 두려움으로 숨을 곳을 찾게 될 것이지만, 신앙인들은 그 때에 세상의 모든 것에 미련을 두지 말며 세상적인 관심을 내려놓고, 오로지 도래할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바라보며, 새롭게 펼쳐질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대하고 희망을 가지라는 말씀이다.

♣ 두려워 말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 이유 ♣
루카 복음은 예루살렘의 파괴를 최종 심판의 전조로 봅니다. 따라서 예루살렘 안에 있는 이들은 빠져나가고, 시골에 있는 이들은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합니다(21,21). 서기 70년 8월 29일 예루살렘은 로마군에 의해 완전히 점령당하여 성전이 파괴되고 무려 110만 명이 죽었으며 9만7천명이 로마군 총사령관 티투스의 포로가 되어 여러 지방에 끌려갔습니다. 예루살렘은 로마의 지배가 끝날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입니다(21,24).
기근까지 확대되어 “다락에는 굶주림으로 죽어 가는 여자들과 어린 아이들로 가득 찼고, 거리의 길이란 길은 모두 늙은이의 시체로 채워져 있었으며, 어린 아이들도 젊은이들도 굶주림으로 퉁퉁 부어서 망령처럼 거리를 헤매다가 쓰러졌습니다. 이런 재난에 대하여 슬퍼하는 사람도 없었고 슬프게 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유대 고사)
사실 성전 파괴는 서기 66-70년 사이에 일어난 로마와의 독립 전쟁에서 인간의 힘에만 의존했던 유다인들 스스로가 부른 참혹한 결말이었습니다. 누구든 이런 파멸의 경고 앞에 공포에 휩싸일 수 있습니다(21,25-26).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두려워 떨 것이 아니라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21,28) 사람의 아들의 오심을 기쁨으로 맞이해야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끝이 아니며”(21,9),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입니다.”(21,28)
성전 파괴와 갖가지 징벌로 표현되는 나 자신과 이 사회의 일그러진 모습들은 절망의 끝이 아니라 회개하라는 신호입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하느님의 뜻과 내 의지, 선과 악, 육과 영, 실제의 나와 되고 싶은 나 사이에서 갈등과 고통을 겪곤 합니다. 무게는 달라도 저마다의 십자가와 아픔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목숨을 바쳐 속량하시려고 우리 삶에 끼어드십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아닌 것을 선택하고 따름으로서 떠안게 되는 죄와 어둠에서 벗어나라는 사랑의 촉구 외에 다른 것이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멈추어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깨어 하느님의 그 눈길로 자신과 이 사회를 바라봄으로써 파멸의 징후를 알아차려야 합니다(21,20). 영혼의 파멸이 아닌 생명의 길로 가려면 예루살렘에서 빠져나가고 들어가지 말아야 합니다(21,21 참조). 이기심과 탐욕, 증오와 폭력, 분노와 교만에서 벗어나 세상의 불의와 차별, 박해와 탄압, 폭력에 맞서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오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21,28) 하고 말씀하십니다. 파멸과 영혼의 어둠 속으로 치닫는 그 상황은 또한 영광의 주님을 만나 뵈올 절호의 기회요 더 큰 은총으로 나아갈 전환점입니다.
육의 정신에 이끌려 주님을 거스르고 어둠과 괴로움을 맛보고 불평등하고 정의롭지 못한 사회를 보는 아픔 속에서도 "허리를 펴" 주님의 영(靈)을 호흡하고, "머리를 들어" 주님을 바라보며 다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넘어져도 또다시 시작해야 하는 까닭은 주님만이 나의 희망이시기 때문입니다. 넘어지는 것보다 넘어졌을 때 일어나 다시 시작하지 않는 태도가 주님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오늘도 자신과 교회, 사회의 아픔과 어둠 가운데서도 희망이신 주님께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는 카이로스의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