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성전정화 (요한 2,13-22)

2018. 11. 9. 오전 5: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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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성전정화 (요한  2,13-22)


에제키엘 예언자는, 성전 오른쪽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보고, 그 물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는 천사의 말을 듣는다. (에제 47,1-2.8-9.12)
그 무렵 천사가 1 나를 데리고 주님의 집 어귀로 돌아갔다. 이 주님의 집 정면은 동쪽으로 나 있었는데, 주님의 집 문지방 밑에서 물이 솟아 동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 물은 주님의 집 오른쪽 밑에서,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려 갔다.
2 그는 또 나를 데리고 북쪽 대문으로 나가서, 밖을 돌아 동쪽 대문 밖으로 데려갔다. 거기에서 보니 물이 오른쪽에서 나오고 있었다.
8 그가 나에게 말하였다. “이 물은 동쪽 지역으로 나가,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로 들어간다. 이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가면, 그 바닷물이 되살아난다.
9 그래서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 물이 닿는 곳마다 바닷물이 되살아나기 때문에, 고기도 아주 많이 생겨난다.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12 이 강가 이쪽저쪽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제2독서 1코린 3,9ㄴ-11.16-17)
형제 여러분, 9 여러분은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10 나는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따라 지혜로운 건축가로서 기초를 놓았고, 다른 사람은 집을 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집을 지을지 저마다 잘 살펴야 합니다.
11 아무도 이미 놓인 기초 외에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16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17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자를 파멸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시고, 이 성전을 허물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고 하신다. (요한  2,13-22)
13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14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16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17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18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1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20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21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22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제1독서(에제 47,1-2,8-9.12)

 

에제키엘 47장을 보면, 주님의 집 문지방 밑에서 물이 솟아 동쪽으로 흐르고 있다.

만남의 천막을 고려한다면, 지성소의 계약의 궤(서쪽)에서 물이 나와

동쪽 입구쪽으로 물이 흘러 내리는 셈이다.

 

천사는 그 물길을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이동거리를 측량하였고,

천 암마(천 척; 약 530m: 1암마는 팔꿈치에서 중지까지의 길이로 보통 45~55cm를 말한다)를 진행한 뒤에,

에제키엘에게 물을 가로질러 건널 것을 명령하였다.

이렇게 천 암마를 재고서는 물을 건너게 했을 때, 물이 "발목'까지 찼다(47,3)고 한다.

 

여기서 '발목까지'에 해당하는 '오프싸임'(ophsaim) '발목' 해당하는 명사 '에페쓰'(ephes)의 복수형이다.

발목에 해당하는 명사 '에페쓰' '끝'이나 '아무 것도 아님'이라는 의미의 단어이다.

문자적인 의미로서는, 성전으로부터의 일천 암마를 잰 지점에서의 수심은

물이 거의 없는 상태이거나 겨우 발바닥에 이를 정도라고 보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를 '발바닥의 물'이라고 번역하지 않고,

'발목의 물'('메 오프싸임; me ophsaim; waters of the ankles)라는 의미로 번역했다.  

성전으로부터 530여 미터 정도 흘러온 물이 발바닥에 닿을 정도라면,

거의 물이 흐르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우리 신앙인의 성숙 단계로 보면, 하느님과 교회에 속한 자이지만,

이제 새롭게 신앙을 시작하는 단계를 말한다.

처음 신앙 생활을 시작하면, 하느님의 말씀과 성사를 그저 "기본적인 말씀이나 의식"인 것 처럼,

"아무 것도 아닌 것"과 같이 받아들이는 어린 신앙의 기초 단계를 말한다.

이 단계는 하느님의 말씀과 성사의 은총을 알고자 하는 단계에 까지 이르러야 된다.

 

에제키엘서 47장 4절(ㄱ)을 보면, 거기에서 다시 천 암마까지 성전에서 흘러온 물이 '무릎'까지 찬다.

이 "무릎"은 히브리어 "베레크"(berek)로서 "사랑하는 자의 자리"라고 말한다.

사랑과 대화를 나누는 자세와 자리를 의미한다.

하느님과 대화하는 자리, 기도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 이 단계에 속한다.

기도하는 사람, 대화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입으로 고백하는 사람이며,

성사의 은총으로, 특히 성체성사의 은혜로 하느님께 사랑받는 자인 것이다.

 

47장 4절(ㄴ)을 보면, 다시 거기에서 천 암마까지 흘러온 물을 재니,

물이 "허리"(엉덩이)까지 찼다.

"허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모템"(motem)인데, "묶는 것"을 상징한다.

하느님의 말씀과 성사의 은총이 나에게 힘이 되는 단계를 말한다(욥기40,16참조).

약속의 말씀과 생명의 양식이 나에게 힘이 되고, 원동력이 되며, 의미와 가치가 되는 단계이다.

 

"그분만이 내 바위, 내 구원, 내 성채, 나는 흔들리지 않으리라.

 내 도움과 내 영광이 하느님께 있으며,

 내 견고한 바위와 피신처가 하느님 안에 있네."(시편62,7~8)

 

다윗이 이렇게 노래한 것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성사의 은총을 신앙생활의 원동력으로 삼아 모든 것을 이루어 나가며,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이 단계에 속한다.

 

47장 5절을 보면, 또 다시 거기에서 천 암마를  가면, 물이 "건널 수 없는 강"이 되었다고 한다.

원문은 "메 사후"(me sahu)로서, "헤엄칠만한 물"(헤엄칠 곳)이란 뜻이다.

하느님의 말씀이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어서 좌우의 날선 검처럼 지켜주고 축복을 주는 단계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던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4,12)

 

이 단계에서 살아 계시고 존귀하신 하느님을 경험하고 성체안에서 하나가 되면,

에제키엘 47장 8절~12절의 축복을 받게 된다.

 

"이 물은 동쪽 지역으로 나가,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로 들어간다.

 이 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 가면, 그 바닷물이 되살아난다.

 

 그래서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 물이 닿는 곳마다 바닷물이 되살아나기 때문에, 고기도 아주 많이 생겨난다.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이 강가 이쪽저쪽에는 모든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이 된다."  

 

여기서 "되살아나다"로 해석되는 히브리어 "라파"(rapha)는

'고치다','치료하다','건강하게 하다'는 뜻이다.

하느님의 말씀과 성체의 사랑이 우리 안에 가득 넘칠 때,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치유가 임하고, 축복이 흘러 넘치게 된다.

 

이렇게 물의 양이 많아진 이유는 염도가 너무 높아 생물이 도저히 살 수 없는 사해의 염도를, 생명체가 살 수 있을 정도로까지 낮추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즉 천사가 47장 8~12절에 말한 것처럼, 사해 즉 죽은 바다로 흘러간 물이 바다를 살리고

생명체가 번식하게 되고, 풍성한 어족을 되돌아 오게 만들기 위해서는 막대한 양의 생수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천사가 에제키엘에게 성전으로부터 흘러나온 물을 그냥 관찰하게만 하지 않고,

4~5절에서 직접 물안으로 들어가 체험하게 한 것은, 물의 양이 사해 바다를 되살리기에

충분한 양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성전에서 흘러넘치는 성령,

곧 주님 은총의 샘인 성심에서

흘러나오는 성령을 받으면 우리는 변화된다.

이것을 믿어야만 한다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복음(요한2,13~22)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14~16)

 

요한 복음 2장 13~25절예수님께서 하신 제1차 성전 정화 사건

이로 말미암아 야기된 유대인과의 언쟁기적을 보고 믿는 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 기록되어 있다.

 

이 사건제1차 성전 정화 사건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의 생애 후반에

제2차 성전 정화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마태21,10~18; 마르11,15~19; 루카19,45.46).

 

그런데 제1차 성전 정화 사건은 요한 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 반면에,

제2차 성전 정화 사건은 공관 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공관 복음서 저자들이 유사한 두 사건 가운데서 예수님의 구속 사업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십자가상 죽음과 밀접하게 관련된 후기 사건만을 기록

반면에, 요한 복음사가는 이러한 공관 복음서의 내용을 염두에 두고

초기 성전 정화 사건만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특히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활동 초기에 있었던 이 사건을 기록함으로써,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유대인들의 종교적 부패상을 부각시키며,

예수님의 이들의 위선과 죄악상을 깨우치기 위한 새로운 역할이

필연적이었음을 보여 주려고 했다.

 

요한 복음 2장 14절'보시고'에 해당하는 '휴렌'(huren; found)

'휴리스코'(hurisko)의 부정 과거이다.

 

이 동사는 그 무엇을 집요하게 찾다가 본 것이 아니라 우연히 발견하거나

만난 것을 나타낸다.

 

시기적으로 이때는 예수님께서 활동을 시작하신 첫 해 겨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전 안에서 자행되던 불법 행위들은 너무나 쉽게 목격되는 일반적인 현상이며,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를 지키고자 예루살렘에 와서 성전에 들어가셨다가

우연히 이러한 현상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한편, '성전'에 해당하는 '히에론'(hieron) '성소'(sanctuary), '성전'(temple)

이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정관사 '토'(to)와 같이 쓰여서 예루살렘 성전을 지칭한다.

 

'히에론'(hieron)성전 건물 그 자체를 가리키는 '나오스'(naos)보다는

더 넓은 의미를 가지는데, 성전의 건물은 물론이고 마당(뜰)까지도 모두 포함된다.

 

예수님께서는 매매와 환전이 이루어지던 성전 마당의 이방인 뜰을 유심히 보셨다.

 

하느님께서 성별하신 이런 성전 영역 안에서 불법이 행해진다는 것은

당시 유대인들의 영적 타락의 심각성을 보여 준다.

 

성전에서 공공연히 자행되던 범죄는 제물로 바쳐진 짐승들을 팔며

돈을 바꾸는 일과 관련 되어 있다.

 

멀리서 성전을 방문하는 순례자들은 희생 제물을 가져올 수 없어서

예루살렘에서 구해야 했다.

 

이 제물은 흠없는 것이어야 했고, 사제가 적격 여부를 심사했다.

 

비록 흠없는 제물이라 할지라도 멀리서 가져온 경우,

사제들은 쉽게 트집을 잡아 불합격 판정을 내렸다.

 

사제들은 가져갈 수 없는 제물들을 헐값에 사들여서

성전에서 비싼 값에 되팔았다.

 

결국 성전에서 파는 제물들은 불합격을 받을 우려가 없어서 선호되었고,

대사제 무리들은 이것을 이용해서 막대한 이득을 올리고 있었다.

 

또한 환전 행위는 많은 순례자들이 성전을 찾는 기회를 이용해서

매년 바쳐야 하는 성전세 반 세켈을 바치는 것과 관련된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20세 이상의 유대인 남자는 성전세를 바쳐야 하는데,

이것은 이방의 군주나 우상의 얼굴이나 각명이 들어 있지 않으면서

순도가 높은 은으로 만들어진 세겔 주화여야 한다.

 

유대인들은 보통 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 이 주화를 바쳤다(마태17,27).

파스카 축제 약 20일 전부터 환전소가 예루살렘 성전에 설치되었고,

이때 환전 수수료는 12.5% 정도였다.

 

대사제 무리들은 자신들의 직권을 이용해서 이러한 일에 관여하여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따라서 당시 대사제 무리들은 큰 부(富)를 누렸고, 이렇게 모은 돈으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사용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요한 복음 2장 19절에서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고 하신다.

 

여기서 '성전'에 해당하는 '나온'(naon)2장 14절성전 경내 전체를

가리키는 '히에론'(hieron)보다 좁은 의미로 쓰였는데, 이것은 비유적으로

예수님의 몸과 성도의 몸(1코린6,19), 교회(1코린3,16.17; 에페2,21) 등을 가리킨다.

 

여기서도 예수님께서 염두에 두신 성전은 바로 자신의 몸이며,

그분은 이것을 허물어 보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 안에는 돌로 지은 예루살렘 성전과 그 안에서

행해지던 일체의 의식들이 이 땅에서 소멸되고 없어질 수 있지만,

예수님을 통한 구원 사업은 아무도 막거나 없애지 못한다는

중요한 메시지가 함축되어 있다.

 

요한 복음 2장 20절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나오스'(naos)라는 성전은

'헤로데 성전'으로서 B.C.19년에 착공하여 A.D.46년에 이르러셔야

완공이 되었기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때는 아직도 20 여년

가까이 앞둔 시점이었다.

 

예수님께서 요한 복음 2장 19절에서 성전을 허문다는 것은

위의 성전이 아니라, 인류 구속 사업이라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 상에서 죽어야 하는 당신 육체의 죽음을 가리키며,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것은 사흘 안에 부활하시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성전

 반영억라파엘신부


라테라노 대성전은 로마에 있는 최초의 바실리카 양식 대성전입니다. 324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세웠습니다. 로마교구의 주교좌성당으로 교구장인 교황좌가 있는 대성당입니다. 대성전의 공식이름은 “라테라노의 지극히 거룩한 구세주와 성 요한 세례자와 성 요한복음사가 대성전”입니다. 로마에 있는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첫째가는 지위를 가졌으며, 전 세계 모든 지역교회의 유대관계 안에서 “모든 성당의 어머니”로 불리 웁니다.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표현대로 “사랑의 전 공동체를 이끄는”베드로좌에 대한 존경과 일치의 표지로써 이 날을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전이라고 하면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드리기 위해서 건축한 외적인 건물을 생각하고 또 말합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3,16.17). 하고 말합니다. 단순히 눈으로 보이는 기도의 집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곧 성전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몸은 성령님이 계시는 성전입니다. 더욱이 성체성사로 오시는 예수님을 모시고 있기에 성전입니다. 성체를 모시는 우리의 몸은 성전이요, 움직이는 감실입니다.


또한 오늘 복음은 예수님 자신이 성전임을 가르쳐 줍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요한2,19-21). 당신 몸을 성전으로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사흘 안에 세우겠다.’는 말씀은 죽음에서의 부활을 상징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그 의미를 알아들었습니다. 


묵시록에서는 새 예루살렘의 도성을 얘기하면서 “나는 그곳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도성은 해도 달도 비출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곳에 빛이 되어 주시고 어린양이 그곳의 등불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묵시21,22-23).하고 말합니다.


성전이란 특정건물만도, 내세에서 영적으로 성별된 장소만도 아닙니다. 성전이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곳, 하느님과 만나는 곳, 함께하는 곳이니 거룩한 곳입니다. 성전에서의 모든 만남이 거룩할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봉헌해야 하겠습니다. 거룩함으로 속됨을 정화해야 하고 우리의 거룩함이 세상의 속됨을 이겨가야 합니다. 그 힘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이시고, 성체이십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참된 성전이신 주님을 제대로 모셔야 하고 그 주님을 모신 내가 거룩함을 지녀야 하며 그러한 준비된 마음으로 기도의 집에서 하느님을 경배하고 찬미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마지막에 하느님의 성읍인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그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의노와 열정으로 정화하시는 예루살렘성전은 이스라엘의 종교와 삶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 안에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계약의 궤가 모셔져 있었고, 이는 주 하느님의 현존과 그들의 선민과 구원을 상징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전의 참된 의미는 환전상들과 제사에 필요한 물품을 파는 장사꾼들의 지나친 상혼에 가려져 있었고, 그 뒤엔 제사장들의 권력과의 결탁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성전의 상점은 올리브산 언덕에 있는 산헤드린의 상점과 경쟁하기 위해 대제관 가야파가 연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네 이익과 특권을 유지하고 증진시킬 목적으로 종교를 이용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돈이 되니까 장사를 하였습니다. 성전에 예물을 바치러 온 사람들을 잘 도와줘야 하는데 그들을 이용하여 폭리를 취하고 부담을 주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정성과 거룩한 마음이 모아져야 할 성전에서 정성껏 준비한 제물은 무시되고 부정과 부패, 착취가 난무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예루살렘 성전 앞에서 장사꾼들을 꾸짖으시고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단호하게 꾸짖지 않으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결국 심판 날에 ‘손과 발이 묶여서 바깥 어두운 곳에 버려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쫓겨난 것은 그들 마음 안에 하느님은 없고, 물질과 개인적인 이득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욕망에 가득 차 있으니 혼이 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성전에 하느님의 거룩한 영 대신‘돈’과 물질이 들어가서 주인행세를 하니 그 결과 46년이나 걸려서 지은 예루살렘성전도 ‘장사하는 집’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썩으면 산천이 썩고 사람이 무너져서 종교도 무너지고 모두가 망그러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악한행실로 하느님의 살아있는 성전에 흠을 내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웅장한 성전이라도 그곳에 거룩함을 지닌 백성이 없다면 이미 성전의 품위는 없습니다. 그저 잘 지어진 건물일 뿐입니다. 성전은 겉모양이 아니라 마음의 성전이 더 소중합니다. 어느 성당 기공식에서 하신 주교님의 말씀이 생생합니다. “성전을 건축한다고 더 큰 성전인 마음의 성전이 무너지고 상처 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성당에 앉아 있으면서도 물질적인 이익을 계산하고 있잖습니까? 개인적인 이득을 추구하며 이웃을 돌려놓기도 하고, 마음으로 미워하며 시기 질투하고 ‘너 어디 잘되나 보자’ 하고 괘씸하게 생각도 하고….. 남의 허물에는 ‘너 정말 그럴 수 있나?’ 하면서, 자기의 허물에 대해선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하고 합리화합니다. 이런 마음이 장사꾼의 소굴이죠. 주님께서는 이런 속마음을 아시고 엎어 버리시는 겁니다. 그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성전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허물을 벗어야 합니다. 이기적인 허물을 벗고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은 사람답게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수확 때에 가라지는 걷어내고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입니다. 우리의 곳간은 천상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알곡으로 만들지 않는 한 곳간은 있으나 마나입니다. 따라서 알곡이 되기 위한 수고와 땀은 우리의 몫입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우리의 할 일은 알곡을 만드는 일입니다. 영혼의 정화를 통해 알곡이 되어야 합니다. 화장을 하고 옷을 잘 입어 겉모습을 잘 꾸미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성전, 영혼의 상태를 잘 보고 가꿀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혹 마음의 성전에 흠이 간 것이 있으면 그 흠을 고쳤으면 좋겠습니다. 고치는 방법 아시죠? 예, 맞아요. 고해성사입니다. 성사를 자주 보고 새 삶을 시작하시기 바라며 보속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는 집에 물이 새거나 낡아서 파손 된 곳이 있다면 놀랄만한 열성으로 빨리 복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의 성전이고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거처하신다면 우리 마음이 그처럼 고귀한 손님께 부당한 거처가 되지 않도록 최선의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 집에 귀한 손님이 오신다면 청소를 하고 집안정돈 하는 것은 그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요? 고해성사를 통한 영혼의 정화는 하느님의 성전인 우리 영혼에 존귀하신 그분을 합당하게 모실 수 있도록 더러운 곳을 깨끗이 하고 파손된 부분을 복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집인 성전은 그 안에 거룩함을 잃지 않으려 기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그 아름다움이 결정 됩니다. 초라한 마구간이 빛난 것은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웅장하지도 값진 예술품 하나 없어도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집은 아름다운 성전입니다. 그러나 많은 돈을 들여 지은 건물에 갖가지 값진 예술품으로 장식을 해 놓았다 하더라도 기도하는 사람이 없다면,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없다면 그 집은 그저 건물일 뿐입니다. 결코 성전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주님을 제대로 모시고 거룩함을 간직한다면 대성전이든 마당이든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주님께서 친히 우리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다면 어디에서든 거룩함으로 빛나야겠습니다. 외적인 건물의 화려함보다도 마음의 성전을 빛내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우리 마음을 기도의 찬미, 말씀선포의 성전이 되게 하시고 우리 마음을 성모님의 발현장소로 강복하시길 청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시기 질투, 미움, 분노, 증오, 탐욕으로 차 있다면, 악습에 젖어 있다면,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을 정화할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로마에 있는 최초의 바실리카 양식의 대성당이다. 오늘 축일은 324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라테라노 대성전을 지어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 대성전은 ‘모든 성당의 어머니요 으뜸’으로 불리면서 현재의 베드로 대성전이 세워지기 전까지 거의 천 년 동안 역대 교황이 거주하던, 교회의 행정 중심지였다. 라테라노 대성전의 봉헌 축일을 지내는 이유는 각 지역 교회가 로마의 모(母)교회와 일치되어 있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오늘 레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을 맞이해서, 복음은 예수님의 성전 정화 장면을 보여줍니다. 성경에서 유일하게 예수님께서 채찍을 들고 폭력을 휘둘렀던 부분입니다. 사랑을 그렇게 많이 보여주셨던 예수님이지요. 심지어 죄인이라고 평가를 받던 세리, 창녀, 병자들에게도 그 큰 사랑을 던져 주신 예수님께서 왜 채찍을 드셨을까요?

그냥 놔두면 그 통증이 더 커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위로와 치유를 받아야 할 하느님의 집인 성전이 오히려 아픔과 상처가 커지는 불의의 공간이 되고 있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순간의 아픔을 선택하셔서 채찍을 휘두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삶 안에서 채찍을 휘두르시기 전에, 우리 스스로 움직여야 합니다. 즉,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의 나라가 될 수 있도록, 나눔과 봉사를 통한 사랑의 실천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렇게 많은 사랑의 움직임을 통해 내 마음으로 다가오는 통증들이 줄어드는 것은 물론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체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명언마태오신부 글중에서~~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신하들이 싸워 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요한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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