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진복팔단 (마태 5,1-12ㄴ)
욥은, 구원자께서 살아 계시고 그분께서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고 한다.(욥기 19,1.23-27ㄴ)
1 욥이 말을 받았다.
23 “아, 제발 누가 나의 이야기를 적어 두었으면! 제발 누가 비석에다 기록해 주었으면!
24 철필과 납으로 바위에다 영원히 새겨 주었으면!
25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26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27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고 한다. (로마 5,5-11)
형제 여러분, 5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6 우리가 아직 나약하던 시절,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7 의로운 이를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착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8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9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0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1 그뿐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자랑합니다.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오르시어 여덟 가지 참된 행복을 가르치신다. (마태 5,1-12ㄴ)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2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7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축일 11월 2일 위령(慰靈)의 날
All Souls’ Day
Commemorazione di tutti i fedeli defunti
Commemoratio Omnium Fidelium Defunctorum
Last Judgement - GIOTTO di Bondone
1306.Fresco, 1000 x 840 cm (full fresco).Cappella Scrovegni (Arena Chapel), Padua
위령의 날(11월2일)에 대하여
위령의 날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전례력 안에서 모든 죽은 이를 기억하는 날로 추사이망첨례(追思已亡瞻禮)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통상 11월2일에 거행하며 만약 11월2일이 주일이라면 11월3일로 옮겨 거행하기도 한다. 이날은 무엇보다도 아직 연옥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영혼들이 빨리 정화되어 복된 나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그들을 위한 위령미사를 봉헌하는 날이다.
비잔틴 전례를 거행하는 동방교회에서는 성령강림 전 토요일과 칠순절 전 토요일을 각각 위령의 날로 지내며 아르메니아 전례는 부활절 다음 월요일을 위령의 날로 지낸다. 고대 로마의 관습에는 죽은 이를 기리기 위한 기념행사가 있었다.
특히 기일에 무덤에 모여 죽은 이를 추도하며 헌주를 하고 음복을 나누는 것은 대중적인 일이었다. 시이저 시대까지 일 년의 마지막 날로 여겨졌던 2월, 즉 2월13일부터 22일 사이에 가족 중에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념하는 위령제(Parentalia)를 지냈으며 2월 마지막 날인 22일에는 죽은 이들의 가족들이 모여 함께 음식을 나누며 죽은 이를 추모하는 가족행사(Cara cognatio)를 거행하였다.
이러한 관습을 받아들여 로마교회는 4세기부터 베드로좌에 모였고 베드로를 추모하였다. 이날이 오늘날까지 베드로 사도좌 축일로 남아있다. 초대 교회는 로마의 이러한 이교 관습을 그리스도교적으로 재해석하여 수용하였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세례로 시작된 부활을 향한 파스카 여정의 완성으로 여겼으므로 찬미와 감사의 마음으로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하고 미사도 봉헌하였다.
교회가 죽은 이를 위한 기도를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위령의 날이 공식 전례 축일로 선포된 것은 상당히 후대의 일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전래 이전에 이교도들의 위령의 날에 행해졌던 죽은 이들을 향한 미신적인 관습이 상당 기간 동안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중세 초기에 수도원에서 먼저 세상을 떠난 수도자들을 기억하던 관습에서 시작되었고 이를 지역 교회가 받아들이면서 비로소 위령의 날이 전례 안에 등장하게 된다.
세비야(Sevilla)의 이시도로(Isidorus +636) 시대에 스페인에서는 성령강림 후 월요일을 죽은 이들을 기억하는 날로 지냈다. 그러나 998년에 이르러 클뤼니 수도원의 5대 원장이었던 오딜로(Odilo +1048)는 자기의 관할 밑에 있는 모든 수도자들에게 모든 성인의 날(11월1일) 다음날인 11월2일에 죽은 이를 위해 특별한 기도를 드리고 성무일도를 노래할 것을 명함으로써 위령의 날이 11월2일로 정해지게 되었고 이것이 서방교회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11월1일(모든 성인의 날)은 하느님 나라를 완성한 성인들을 기념하는 축제의 성격이 강하다면 그 다음날인 위령의 날(11월2일)은 연옥영혼을 생각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이다. 모든 성인의 날과 위령의 날은 살아있는 이들에게 삶과 죽음을 묵상하게 하는 기회를 주며 특히 전례력으로 연중 마지막 시기인 11월에 자리잡음으로써 종말에 성취될 구원을 미리 묵상하게 하는 날이라 하겠다.
위령의 날에 모든 사제들은 3대의 위령미사를 집전할 수 있는 특전을 받았다. 이 특전은 15세기의 스페인의 도미니코 수도회에서 시작되었고 1748년 교황 베네딕도 14세에 의해 이 특전이 승인됨으로써 스페인, 포르투갈, 남미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교황 베네딕도 15세는 많은 전사자들을 제대로 기억하기 위하여 모든 사제들에게 이 특전을 주었다.
그러나 3대의 미사 중에서 첫째 미사 하나만 미사 예물을 받을 수 있으며, 둘째 미사는 모든 영혼을 위하여, 셋째 미사는 교황의 지향에 맞춰 봉헌하여야 한다. 중세를 거치면서 위령의 날과 관련된 많은 전설이 생겨났다. 위령의 날에 이미 죽은 이들이, 살아있을 때에 자기에게 나쁘게 대했던 사람들 앞에 도깨비불, 두꺼비, 마녀 등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전설이 대표적인 것이다.
또한 이 위령의 날에 연옥영혼을 위한 미사가 많이 봉헌되었으며 특별한 음식을 먹거나 특별한 놀이를 하는 등 지역에 따라 여러 가지 풍습이 전해진다. 오늘날까지 서구의 많은 본당들이 묘지까지의 행진을 하고 친지들의 무덤을 방문하여 꽃과 초를 선물하는 등의 관습을 보존하고 있다.

욥기는 인간이 겪는 고통의 신비를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지혜의 책입니다. 욥이 누린 세상의 행복은 결코 영원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해 주고, 고통 속에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탄원한 욥의 마지막 기도는,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는 희망의 외침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간직한 희망이 우리를 어떤 처지에서도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죽음을 당당하게 받아들이시고,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으신 예수님 덕분에 우리는 구원자 그리스도를 얻게 되었고, 사탄의 힘인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었다고 바오로 사도는 기쁨에 차 선포합니다.
사람들은 행복의 기준을 세상에 두지만,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세상 너머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세상에서 도피하고, 세상을 혐오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행복은 세상 속에서 씨앗처럼 자라나는 하느님의 능력과 지혜를 볼 줄 아는 사람에게 주어진 행복입니다. 그 행복은 우리가 맞이할 죽음의 두려움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선물이 됩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수에는 양수와 음수가 있다고 배웠습니다. 양수도 끝을 알 수 없으며, 음수도 끝을 알 수가 없습니다. 또 수에는 유리수와 무리수가 있다고 배웠습니다. 유리수도 무리수도 끝을 알 수가 없습니다. 또 수에는 소수와 정수가 있다고 배웠습니다. 소수와 정수도 끝을 알 수가 없습니다. 수는 인류의 역사와 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현대의 문명에도 수는 깊이 관여하고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은 수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신앙인은 살아 있는 세상을 이야기합니다. 살아 있는 세상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언제 끝날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신앙인은 죽은 이들의 세상도 이야기합니다. 죽은 이들은 또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믿습니다. 수에는 양수와 음수가 있어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듯이, 산 이와 죽은 이들의 세상이 있다는 믿음은 우리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교회는 11월을 위령 성월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이 하느님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도록 기도합니다. 우리들 또한 이 세상의 삶을 마치면 하느님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오늘은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위령의 날’입니다. 오늘 지는 태양은 내일 다시 떠오름을 아는 것처럼, 세상을 떠난 이들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질량보존의 법칙이 존재하듯이, 우주에 있는 모든 존재는 우주 밖으로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형체와 내용은 변하지만 기억과 사랑은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이 우주라는 배에서 내릴 수 없습니다.’
위령성월의 감사송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이렇게 우리가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면 우리는 희망을 마음에 품고 하느님 품으로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크게 다섯 가지의 반응을 보인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부정입니다. 아직도 할 일이 많고, 젊다고 생각하면서 자기를 찾아오는 죽음을 강하게 부정한다고 합니다. 의사가 잘못 진단 한 것이라고 여기며, 자기는 아직 죽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원망과 분노입니다. 내가 이렇게 아프고, 죽어야 하는 것은 모두 남의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족을 원망하고, 친구를 미워하고, 세상을 향해서 분노 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결과가 바뀌는 것은 없습니다.
세 번째는 타협입니다. 이제 내가 건강을 회복하기만 하면 좀 더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신다면 신앙생활도 잘 하고, 이웃들에게 많은 것을 나누겠다고 말을 합니다.
네 번째는 체념입니다. 이제 점점 죽음의 그림자가 짖게 드리워지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을 때 체념 합니다. 아무런 희망 없이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입니다. 체념은 사람을 약하게 하고, 삶을 정리할 시간이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다섯 번째는 순응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지난날의 삶을 정리하고, 지금까지의 삶을 감사하면서 죽음을 받아들입니다. 성인이 되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도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라는 말씀을 남겨 주셨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도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라는 말씀을 남겨 주셨습니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공평하게 죽음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는 조금씩 다를 것입니다. 시인 천상병은 ‘귀천’이라는 시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를 아름답게 표현하였습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 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고생을 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조재형(가브리엘)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