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대 바실리오 기념일]“당신은 누구요?” (요한 1,19-28)
요한 사도는, 여러분은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라고 한다. (1요한 2,22-28)
사랑하는 여러분, 22 누가 거짓말쟁이입니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아버지와 아드님을 부인하는 자가 곧 ‘그리스도의 적’입니다.
23 아드님을 부인하는 자는 아무도 아버지를 모시고 있지 않습니다. 아드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이라야 아버지도 모십니다.
24 여러분은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면, 여러분도 아드님과 아버지 안에 머무르게 될 것입니다.
25 이것이 그분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26 나는 여러분을 속이는 자들과 관련하여 이 글을 씁니다.
27 그러나 여러분은 그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고 지금도 그 상태를 보존하고 있으므로, 누가 여러분을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께서 기름부으심으로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십니다. 기름부음은 진실하고 거짓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 가르침대로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28 그러니 이제 자녀 여러분,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래야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가 확신을 가질 수 있고, 그분의 재림 때에 그분 앞에서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하며, 자신은 뒤에 오시는 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한다. (요한 1,19-28)
19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20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
21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묻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2 그래서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23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24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25 이들이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26 그러자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27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28 이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성 대 바실리오 기념일 제1독서(1요한2,22~28
"여러분은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면, 여러분도 아드님과 아버지안에 머무르게 될 것입니다.(24) 이것이 그분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25) 나는 여러분을 속이는 자들과 관련하여 이 글을 씁니다.(26) 그러나 여러분은 그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고 지금도 그 상태를 보존하고 있으므로, 누가 여러분을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27)
요한은 요한 1서 2장 18절에서 '그리스도의 적'(적 그리스도)가 출현하였음을 지적했고, 요한 1서 2장 19~23절에서는 참된 성도들과의 대조를 통해 '그리스도의 적'의
정체와 오류를 지적하였다.
이어서 이제 요한 1서 2장 24~29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적'에게 속지 않으려면, 정통 신앙을 유지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머물러야 함을 권면한다.
이러한 내용을 시작하는 요한 1서 2장 24절에서는 그리스도에 관하여 처음부터 들은
복음을 간직해야 하느님 안에 지속적으로 머무를 수 있음을 밝힌다.
여기서 '처음부터 들은 것'은 요한의 서간을 받은 초대 교회 공동체가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가지게 된 '사도의 복음'을 가리킨다.
이것은 후에 듣게 된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과 구분되는 진리의 말씀인 복음이다.
혹자는 이것을 요한 1서 2장 7절의 '처음부터 지녀 온 옛 계명'으로서 서로 사랑하는 계명으로 보기도 하지만, 본절은 '그리스도의 적'의 가르침과 대조되는 복음의 진리를 말하는 맥락이기 때문에 요한1서 2장 24절을 요한1서 2장 7절과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이다.
따라서 요한이 말하는 '처음부터 들은 것'은 요한 사도에 의해서 직접 전달된 정통 복음을 뜻한다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한 해석이다.
이것이 성도들 안에 머무르게 되면, 성도들은 성부 하느님과 성자 예수님 안에 머무르게 된다.
'간직하십시오. ~간직하면 ~머무르게 될 것입니다'
'간직하십시오. ~간직하면 ~머무르게 될 것입니다'라고 번역된 '메네토 에안 ~메이네 ~메네이테'(meneto ean ~meine ~meneite)에 나오는 세 개의 동사들은 모두 '메노'(meno)를 원형으로 갖는다.
이 동사는 어느 일정한 기간을 한 곳에서 머물거나 거주할 때 사용하는 단어로서 '머물다','기거하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처음부터 들은 것을 성도안에 간직하게(머무르게) 하는 것'은 성도의 삶 속에 복음의 말씀이 내주하고, 성도들이 그 말씀의 원칙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한편 본절에서 세 번이나 쓰인 이 동사는 명령법 현재형, 가정법, 직설법 미래로 차례대로 쓰였다.
먼저 명령법 현재형은 영지주의를 경계하여 정통 신앙을 마음속에 지속적으로 머물게 할 것을 강하게 촉구하고 있고, 다음으로 가정법은 복음이 성도안에 머무르게 될 때의 놀라운 결과를 보여주고 있으며, 마지막 미래 직설법은 복음안에 머무르는 성도의 축복된 삶에 대한 확신있는 미래를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요한은 동일한 동사를 사용하되 법과 시제를 달리하여 정통 신앙안에 머물러야 할 당위성과 이로 인해서 주어질 축복을 설득력있게 전달하고 있다.
'아드님과 아버지 안에'
사도 요한은 본서에서 뿐만 아니라 요한 복음에서는 '~안에 머무르다'라는 표현을 많이 썼다.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을 빌어 '내가 이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요한14,10.11),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요한15,5),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요한15,7)이란 표현을 사용하였다.
'안에 머무르면'라는 표현은 전혀 거리낌없는 완전한 친교를 나타낸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대로 완벽하게 순종함으로써 하느님 아버지와 완전한 친교를 지속하였고, 성도들 역시 그의 말씀을 순종함으로써 당신과 친교하기를 원하셨다.
이처럼 '~안에 머무르다'는 표현을 통하여 요한은 사도들이 전한 진리의 복음 안에 머무르는 자가, 곧 아들이신 그리스도와 아버지이신 하느님과 완전하게 친교하고 하나가 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그분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나는 여러분을 속이는 자들과 관련하여 이 글을 씁니다.' (25~26)
'영원한 생명'으로 번역된 '텐 조엔 텐 아이오니온'(ten zoen ten aionion)에서 '영원한'으로 번역된 '아이오니온'(aionion)의 원형 '아이오니오스'(aionios)는 시간이 끊임없이 지속되는 것을 가리킨다.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에 펼쳐질 영원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러한 영원한 생명은 미래적 약속일 뿐 아니라 현재적 약속이기도 하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즉각적으로 영생이 주어지게 되고, 또한 그들은 하느님 안에서 풍성한 생명의 삶을 영위하게 된다.
그리고 종국에 가서 영원히 하느님과 함께 머무르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 약속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드님과의 일치이다(1요한2,23). 아드님없이는 생명이 없고, 아드님을 모시고 있는 자에게만 영생이 있다(요한3,36; 1요한5,12).
한편, '생명'으로 번역된 '조엔'(zoen)의 원형 '조에'(zoe)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들이 가지게 될 생명을 뜻한다. 이 생명을 소유한 자에게는 부활의 약속과 천국의 소망이 주어지게 된다.
'속이는 자들'로 번역된 '톤 플라논톤'(ton planonton)에서 '플라논톤' (planonton)의 원형 '플라나오'(planao)는 '길을 잃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 명사 '플라노스'(planos)에서 유래하며, 바른 진리의 궤도를 걷고 있는 자를 이탈시켜 탈선시키는 것을 나타낸다.
말하자면 '유혹하다', '탈선시키다'라는 뜻이다.
특히 여기서는 정관사를 동반하여 현재분사형으로 쓰였는데, 당시 초대 교회 공동체 안에 활동하고 있었던 특정한 '적 그리스도'적 인물과 집단으로서 사도 요한 당시에 대표적인 이단이었던 영지주의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그리스도인을 속이는 무리들로서 성도들에게 자신들의 거짓된 교리를 주입시킴으로써, 성도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되심을 믿지 못하게 하며 바른 신앙에서 이탈하도록 계속 시도하고 있었다.
이들의 특이한 점은 불신자들보다는 성도들을 속이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고 지금도 그 상태를 보존하고 있으므로, 누가 여러분을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27)
요한1서 2장 27절에서 요한이 말하는 '기름부음'(토 크리스마; to chrisma)는 20절에도 나오지만, 성도에게 임하는 성령을 지칭한다. 그 성령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본절에서 '주님께'에 해당하는 '아프 아우투'(ap autu)는 '그분에게서'(from Him)라는 의미로서 성령의 출처가 어디인지를 나타낸다.
그런데 요한 복음 14장 16절, 26절에 따르면, 성령을 보내주는 분은 '성부 하느님'이신 반면에, 요한 복음 16장 7절에 따르면 성령을 보내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요한 복음 15장 26절에 따르면,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받아서 사도들에게 보내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사도행전 2장 33절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느님으로부터 받아서 성령을 부어주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본문의 '아프 아우투'(ap autu)는 일차적으로는 '성부 하느님으로부터' 라는 의미이며, 이차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라는 의미가 된다.
초대 교회 교부들이며 신앙의 옹호자들인 성 아타나시우스, 성 바실리오와 성 니사의 그레고리오는 성령께서 성부 하느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성자에게서도 왔다는 사실을 반대하지 않았고, 일반적으로 서방 신학자들은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출하였다는 데에 동의하였다.
그렇게 해서 성도에게 임하신 성령께서는 성도의 영(심령) 안에(엔; en) 지속적으로 머무른다(메네이; menei).
사도 바오로는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자들에게만 성령이 내주하고 있다고 말하였다(1코린12,3). 그러한 성령은 성도의 영안에서 슬퍼하기도 하시며(에페4,30), 탄식하기도 하시며(로마8,26), 육의 욕망을 채우지 않도록 거룩한 열망을 일으키기도 하신다
(갈라5,16.22.23).
'누가 여러분을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께서 기름부으심으로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십니다' (27)
성도안에 머무르시는 성령께서 몸소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을 가르쳐 주시기 때문에(요한14,26), '그리스도의 적'(적 그리스도)가 그들을 가르치도록 허용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가르칠'로 번역된 '디다스케'(didaske)는 '디다스코'(didasko)의 현재 가정법이고, '가르치십니다'로 번역된 '디다스케이'(didaskei)는 '디다스코'의 현재 직설법이다.
여기서 사용된 '디다스코'는 모르는 내용을 가르쳐 알게 하는 것도 아니고, 어느 특정한 시간과 기간 동안 다 가르쳐서 알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그때 그때 가르쳐주는 것을 가리킨다.
당시 초대 교회 공동체에 있었던 영지주의 이단들은 성령의 가르침보다는 사람의 가르침을 중요시 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가르침을 지적인 기름부음으로 보았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영지(靈知)라는 지적 기름부음을 소유하고 있음을 자랑스러워하면서 연약한 성도들을 속이고 유혹하였다.
요한은 이러한 이단을 염두에 두고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통한 가르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가르치십니다'의 '디다스케이'(didaskei)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통해서 성령이 가르치는 것을 뜻한다.
요한은 요한 복음 14장 26절의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는 말씀을 염두에 두고 이와같이 진술하였을 것이다.
성 대 바실리오기념일 복음(요한1,19~28)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27)
여기서 '뒤에'로 번역된 '오피소'(opiso; after)는 장소에 관한 부사가 아니고 시간 부사로 쓰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자 요한보다 시간적으로 뒤에 오셨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출생에 있어서도 예수님께서는 6개월이 늦으셨고, 활동을 시작하신 것도 그렇다.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도록 파견된 일꾼이므로, 언제나 그분보다 시간적으로 앞서가야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단어는 '오시는 분'으로 번역된 '호 에르코메노스' (ho erchomenos; one who comes; He who comes)이다.
그리스도교는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시작되었으므로, '오시는 분'의 사상은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중요한 개념이다.
요한의 문헌들에서는 예수님의 오심에 관한 언급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요한 복음 7장 28절의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요한 복음 8장 42절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요한 복음 5장 43절의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 요한 복음 10장 10절의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요한 복음 12장 47절의 '나는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라는 구절들이 있다.
또한 그분의 오심은 과거의 역사적 사건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그분은 지금도 각 사람들을 찾아오셔서 문을 두드리시며 앞으로도 그러하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심판하시는 주님으로 재림하실 때까지는 끊임없이 각 사람을 찾아오셔서 구원의 초청에 응하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두드리신다.
여기서 '오시는 분이신데'로 번역된 '에르코메노스'(erchomenos)가 현재 분사인 것은 예수님께서 계속 우리에게도 '오시는 분'임을 알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오시는 분'의 개념은 주님의 재림과도 관련된다.
요한 복음 14장 3절의 '내가 ~다시 와서'라는 표현에 이러한 사실이 잘 드러난다. 그분께서는 약속대로 다시 오신다.
어느 누구도 그날과 그 시간을 알 수 없지만(마태24,36), 오로지 하느님께서 정하신 그때에 다시 오실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도둑같이 오실 주님의 재림에 준비하지 않는다면, 영원한 그분의 생명과 복락의 나라에 결코 참여할 수가 없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라는 것은 일상의 삶 속에서 죄와 불의를 멀리하고, 거룩하고 흠없으며 경건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세례자 요한은 계속해서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자신을 종으로 비유하는데, 자신은 유대인 가정에 있는 종 가운데서도 가장 비천한 종이 하는 일인, 외출에서 돌아온 주인의 신을 벗기고 발을 씻어 주는 자격조차 없음을 '나는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는 표현을 통해 보여 주고 있다.
세례자 요한이 자신을 종보다 더 못한 존재로 극진히 낮추는 것은 바로 이어 등장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이기 위함이다(마태3,11; 마르1,7; 루카3,16참조).
가장 불행한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자동차는 자동차로 쓰이고 비행기는 비행기로 쓰여야 합니다.
자동차가 하늘을 날려 하고 비행기가 도로를 달리려 하면 불행해집니다.
누구나 자신이 생겨난 이유를 알아 그 목적대로 사용되어야 기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세례자 요한의 정체성을 알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당신은 누구요?”라고 묻습니다.
정체성을 묻는 것입니다.
요한은 명확하게 “나는 ……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라고 대답합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자신의 소명’으로 대답한 것입니다.
소명이 곧 정체성입니다.
만약 요한이 “나는 유다 산악 지방 출신이고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아들이다.”라고 대답하였다면, 여전히 그가 왜 세례를 주고 있는지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나는 이러한 일을 하려고 하느님에게서 파견받았다.”라는 식으로 대답하여, 자신이 하는 행위에 흔들림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누구이다.”라는 각자의 대답 안에 주님께 받은 소명이 들어 있지 않으면, 그 사람은 실제로 하느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이 살아갈 가능성이 큽니다.
“나는 의사이다.”와 “주님께서 내가 의사로 살기를 원하신다.”는 천지 차이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다면, 각자에 대한 어떠한 창조 목적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목적 없이 무언가를 만드는 일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례자 요한만이 아니라 우리 각자를 만드실 때 저마다 소명을 부여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왜 만드셨는지 알아야 삶이 의미 있어집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