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주간 금요일]중풍 병자치유 (마르 2,1-12)
히브리서의 저자는, 믿음을 가진 우리는 안식처로 들어간다며, 불순종의 본을 따르다가 떨어져 나가는 일이 없도록 힘쓰자고 한다. (히브 4,1-5.11)
형제 여러분, 1 하느님의 안식처에 들어갈 수 있다는 약속이 계속 유효한데도, 여러분 가운데 누가 이미 탈락하였다고 여겨지는 일이 없도록, 우리 모두 주의를 기울입시다.
2 사실 그들이나 우리나 마찬가지로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들은 그 말씀은 그들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 말씀을 귀여겨들은 이들과 믿음으로 결합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3 믿음을 가진 우리는 안식처로 들어갑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리하여 나는 분노하며 맹세하였다. ‘그들은 내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고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안식처는 물론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들은 세상 창조 때부터 이미 다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4 사실 일곱째 날에 관하여 어디에선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5 또 여기에서는, “그들은 내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였습니다.
11 그러니 그와 같은 불순종의 본을 따르다가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없게, 우리 모두 저 안식처에 들어가도록 힘씁시다.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에게, 죄를 용서받았다며 일어나 걸어가라고 하신다. (마르 2,1-12)
1 며칠 뒤에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2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
3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4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보냈다.
5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6 율법 학자 몇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7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8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그들이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신 영으로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9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10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11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12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연중 제1주간 금요일 제1독서(히브4,1~5.11)
믿음을 가진 우리는 안식처로 들어갑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리하여 나는 분노하며 맹세하였다. '그들은 내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고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안식처는 물론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들은 세상 창조때부터 이미 다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사실 일곱째 날에 관하여 어디에선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3~4)
히브리서 4장 3~10절까지에서 저자는 하느님의 백성에게 여전히 남아 있는 영원한 안식의 약속에 대해 진술한다.
본문은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얻을 수 있었던 안식을 놓치고 말았지만, 신약 시대의 믿음을 지닌 성도들은 안식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제시한다.
본문에서 '들어갑니다'로 번역된 '에이세르코메타'(eiserchometha)는 직설법 현재시제로서 변할 수 없는 사실을 나타낸다.
즉 믿음을 지니고 있는 자들이 하느님의 '안식처로'에 해당하는 '에이스 텐 카타파우신'(eis ten katapausin; into the rest)에 들어간다는 사실은 변할 수 없는 진리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직설법 현재 시제가 사용된 것이다.
따라서 광야 시대의 이스라엘은 믿음이 없어서 실패했지만, 믿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그리고 얼마든지 이 약속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믿음을 가진 우리'를 본문은 '호이 피스튜산테스'(hoi pisteusantes)로 표현한다. 이것은 '믿다', '신뢰하다', '확신하다', '맡기다' 등을 뜻하는 '피스튜오'(pisteuo)에 관사를 가진 과거 분사이다.
이것은 이미 믿는다고 고백하고 세례를 받은 자들로서 그 믿음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자들을 가리킨다. 본서 저자는 그들이 하느님의 안식처에 들어간다고 단정짓고 있다.
믿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영적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전제 조건이다. 믿음은 인간이 하느님의 약속들에 참여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반응이며,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은총의 수단이기도 하다.
'하고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하고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라고 번역된 '카토스 에이레켄'(kathos eireken)은 직역하면 '그분이 미리 말씀하신 것처럼'이 된다.
'말씀하신'으로 번역된 '에이레켄'(eireken)은 '이야기하다','예고하다' 등을 뜻하는 '에이폰'(eipon)의 3인칭 단수 완료 시제로서, 하느님께서 이미 전에 말씀하신 사건을 가리킨다.
여기서 저자는 하느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사실에 독자들의 주의를 집중시킨다. 기록될 말씀은 시대를 초월한 진리이므로, 우리는 그 말씀만으로도 현재 우리 자신의 상태를 진단하는데 어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시편 95장 11절을 인용한 히브리서 3장 11절의 말씀을 본절에서 재인용한다. 무엇이든지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면, 이미 그 자체로서 절대적인 중요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확인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귀를 기울여 경청하고, 그 내용을 하나 하나에 주의를 집중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귀하고 절대적인 중요성을 지닌 것이,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다.
'이미 다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세상 창조 때부터 이미 다 이루어져 있었습니다'라고 번역된 '카이토이 톤 에르곤 아포 카타볼레스 코스무 게네텐톤'(kaitoi ton ergon apo kataboles kosmu genethenton)을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면,'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들이 이루어졌다'가 된다.
새 성경은 번역하지 않았지만, 접속사 '카이토이'(kaitoi)는 '그럼에도 불구하고'(although)라는 의미이다.
이 양보의 접속사가 나타내는 것은 비록 과거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가진 자가 그 안식처에 들어간다는 그 약속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이미 있었다는 것이다.
'안식처는 물론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들은'으로 번역된 '톤 에르곤'(ton ergon; the works; 그 일들)은 하느님의 안식의 원리 혹은 그 안식처에 들어갈 약속을 가리킨다.
저자는 '세상 창조 때부터' 즉 '아포 카타볼레스 코스무'(apo kataboles kosmu)라는 표현을 통해 오늘날 믿음을 가진 자들이 안식처에 들어갈 수 있는 근거가 이미 창조 때부터 있었음을 밝힌다.
또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로 번역된 '게네텐톤'(genethenton; were finished)는 '되다','만들어지다','이루어지다'등을 뜻하는 '기노마이'(ginomai)의 수동태 과거 분사이다. 여기서 수동태는 하느님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하느님께서는 6일동안 세상의 창조사업을 완성하신 후, 제 칠일째에 만족한 상태로 안식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그 안식은 사람들이 믿음과 순종으로써 동참할 수 있도록 모든 세상에 열려 있는 안식이다.
이 영원한 안식은 이스라엘이 존재하기 전부터 이미 준비되어 있었으나, 광야 시대의 이스라엘은 불신앙과 불순종 때문에 못 들어간 것이다.
이것은 이미 열려 있고 준비되어 있다고 해서 거기에 다 동참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사실 일곱째 날에 관하여 어디에선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사실'로 번역된 '가르'(gar)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로서, 3절에서 '세상 창조 때부터 이미 다 이루어져 있었습니다'라고 단언할 수 있었던 이유가 본절에 나온다는 사실을 말한다.
정확히 번역하면, '왜냐하면 그분께서 어디에선가 이와 같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가 된다. '이렇게 말하였습니다'로 번역된 '에이레켄'(eireken)은 이미 3절에서 설명했다. 저자는 본절에서 창세기 2장 2절을 인용하고 있다.
그런데 마치 인용한 구절의 출처를 모르듯이 '어디에선가', '어느 곳엔가'(somewhere)를 뜻하는 '푸'(pu)라는 부사를 사용한다.
그러나 히브리서 4장 4절이 '호 테오스 엔'(ho theos en)이 첨가된 것 외에는 70인역(LXX) 창세기 2장 2절과 똑같다는 점을 고려할 때, 결코 성경 구절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히브리서가 기록된 A.D.1세기 당시에는 저자는 물론 독자까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사항에 대해서는 굳이 출처를 밝히지 않고 인용하는 방법이 유행하였다.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쉬셨다'로 번역된 '카테파우센'(katepausen)은 '카타파우오'(katepauo)의 과거시제로 쓰여 '멈추셨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뒤에 이어지는 전치사 '아포'(apo)는 분리를 나타내는 전치사로서, 하던 모든 일을 끝마치자 그 일들로부터 손을 떼고 편히 쉬셨다는 의미를 전달해 준다.
그리고 안식일의 휴식, 즉 '카타파우오'(katapauo)는 그 의미가 굉장히 광범위하게 적용된다.
이 휴식의 특징은 그 대상이 종교적 예배 공동체와 특정 계급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고, 남종이나 여종은 물론 이방인과 심지어는 가축까지도 편히 쉬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는 것이다(신명5,14).
히브리서에서는 신약에서의 안식에 관한 개념이 풍요하게 취급되고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하느님의 백성을 그들의 안식처인 약속의 땅으로 데려가도록 여호수아에게 맡겨진 임무가 단지 제한적으로 성취된 것으로만 보며(히브4,8), 그것을 창조의 일곱째 날인 하느님의 참 안식과 연결시킨다.
천지 창조라는 대역사를 이루신 하느님께서는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는데, 처음 엿새 동안은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었다고 기록한 반면에, 그분이 안식하신 일곱째 날에는 저녁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당시 랍비들은 처음 엿새에는 종말이라는 것이 있었으나, 하느님의 안식에는 종말이 없으며, 그 안식만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라고 말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의미에서 이 날은 우리가 상식으로알고 있는 개념인 24시간의 하루와는 다르다. 하느님의 안식에는 저녁이나 종말이 없다.
그것은 영원하기 때문에 비록 이스라엘 광야 세대가 이 안식처에 들어가는데 실패하기는 했어도, 오늘날 여전히 유효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안식의 효력은 아직도 존재하고 있으며, 오늘날 믿음으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맺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활짝 열려 있는 것이다.
연중 제1주간 금요일 복음(마르2,1~12)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보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4~5)
'중풍 병자'에 해당하는 '파랄뤼티코스'(paralytikos; the sick of the palsy)에서 영어 단어 'paralysis'가 나왔다. 이 병은 뇌출혈(cerebral hemorrhage)등으로 몸의 일부분이나 전신을 움직일 수 없게 되는 증상을 갖는다.
마르코 복음 2장 3절에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침상)에 실어서 예수님께로 옮겨졌다. 학자들에 의하면, 이 중풍 병자를 옮긴 사람들은 그의 종들이라고 간주하는 경우도 있고, 가족이나 친구들로 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마르코 복음 2장 5절에서 중풍 병자와 그를 메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를 치유하셨다는 구절을 볼 때, 주인의 명령에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종들은 아니라고 본다.
한편 '지붕을 벗기고'에 해당하는 '아페스테가산'(apestegasan; they uncovered; they made an opening in the roof)의 원형 '아포스테가조'(apostegazo)는 '지붕의 덮개를 벗기다'(unroof)는 정도의 뜻이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의 가옥 구조는 지붕이 평평하고 외부의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계단을 통해 지붕 위로 올라갈 수 있었으며, 팔레스타인에 있던 서민들의 집의 지붕은 들보를 중심으로 나무들을 걸치고 짚으로 덮고 진흙을 발라 놓은 것이었기 때문에 쉽게 벗겨 낼 수가 있었다.
중풍 병자가 누운 들것을 멘 자들은 군중들이 너무 많아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로 데려 가기 힘들자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집의 지붕으로 올라간 것이다.
그러나 집의 지붕을 갑자기 벗겨 내고 구멍을 내어 들것을 내림으로써, 방 안에 모여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흙 먼지가 쏟아져 내리게 하고, 느닷없이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계시는 그 가운데로 달아내리기 위해서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여기 치유 기사의 주인공이 된 사람도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데에는 '군중들'이라는 장벽이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유에 대한 확신과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로 나아갔고, 그 결과 중풍 병자는 질병으로부터 자유를 얻었다.
'그들의 믿음'에 해당하는 '텐 피스틴 아우톤'(ten pistin auton; their faith)에서 '아우톤'(auton; their)은 3인칭 복수 인칭 대명사가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병을 가진 당사자만의 믿음이나 반대로 그를 예수님께로 이끌고 나간 동료들의 믿음만이 아닌, 그들 모두의 믿음의 결과였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여기서 '보시고'에 해당하는 '이돈'(idon; saw)의 원형 '호라오'(horao)는 어떤 대상을 시각적으로 관찰하다는 뜻만이 아니라 인지적으로 상대를 파악한다는 뜻도 갖는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와 그를 메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셨다는 것은 단순히 나타난 행동 뿐만 아니라 그 마음 속에 있는 믿음도 꿰뚫어 보셨다는 뜻이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얘야'에 해당하는 '테크논'(teknon; son)은 '자녀'(마태2,18)를 가리킨다. 히브리적으로는 신적인 존재에 대한 추종자(1베드1,14), 영적인 상하 복종 관계에서의 따르는 자(에페5,8)라는 의미를 갖는다.
여기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서 그렇게 부르시는 것은 예수님 당신의 치유 능력을 믿고서 자신의 몸을 맡기는 믿음을 보시고 당신을 따르는 자라는 의미로 불렀다고 본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에 해당하는 '테크논, 아피엔타이 수 하이 하마르티아이'(Teknon, aphientai sou hamartiai; Son, your sins are forgiven)에서 드러난데로,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신 행위는 중풍 병자의 죄를 먼저 제거함으로써 병을 치유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모든 병이 직접적으로 죄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의 중풍 병자는 죄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병에 걸렸으므로, 예수님께서 죄사함을 선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죄의 용서의 선포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 자신에게 죄를 사하는 권한이 있다는 사실을 선포하기 위해서였다(마르2,10).
원래 죄의 용서는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고유 권한이기에(시편50,1.2; 130,4; 느헤9,17; 이사1,18), 예수님께서 죄의 용서를 선포하셨다는 것은 당신 자신이 성자 하느님이시며(로마9,5), 당신에게 죄사함의 권한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중풍병자
故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오늘 복음을 보면 다섯 부류의 사람을 볼 수 있다.
첫째는 사람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고 계신 예수님,
둘째는 예수님 주위에 모여든 많은 사람들,
셋째는 네 사람에 의해 예수님께 온 중풍병자,
넷째는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 온 네 사람이다.
다섯째는 예수님을 말씀을 듣기보다는 듣고 판단하고 있는 율법학자의 모습이다.
나는 이 다섯 부류의 모습에서 어느 부류에 속하는가?
내가 이 다섯 부류 중에 어느 한 부류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은 그런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중풍병자면 중풍병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고,
복음을 전하고 있으면 복음을 전하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고,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가는 네 사람과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늘 남을 위해 봉사하는 인생을 사는 사람일 것이고,
율법학자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트집이나 잡고 판단하고 있으면 늘 남을 판단하고 있는 삶을 살아가는 인생을 사는 사람일 것이다.
과연 나는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가? 어떤 사명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인가? 그런 일을 하라고 불리움을 받은 사람인가? 그런 사명을 갖고 있는 사람인가?
그렇다면 복음을 듣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당신 주위에 모여드는가?
만일 하느님으로부터 그런 사명을 갖고 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하고 있지 않다면 당신은 중풍병자일지도 모른다.
또 당신은 예수님 주위에 모여든 사람 중에 한 사람인가?
예수님 주위에서 복음을 전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면 당신은 많은 은혜를 받고 중풍병자가 중풍병에서 치유되었듯이 당신이 앓고 있는 병에서 치유받고 당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다고 예수님 주위에 모여 있었고 매 주일 복음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기쁨이 없고 받은 은혜도 없다면 당신의 신앙 생활에는 반드시 문제가 있다.
즉 복음을 듣고 복음에 의한 복음을 위한 신앙생활이 아니라 병이나 치유받으려는 기복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또 다른 중풍병자의 모습일 것이다.
신앙 생활을 하고 성당에 다니고 복음을 읽고 강론을 하더라도 본인 자신이 아무런 느낌도 없고 기쁨도 없고 받은 은혜도 없이 무감각하게 말하고 행동하고 듣고 있다면 그것이 중풍병자 아니고 무엇인가?
중풍병자의 특징은 감각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움직임이 없다는 것이다. 누워있으면 있는 대로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이다.
누군가에 의해 움직이지 않으면 혼자서는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는 죽은 이의 모습이다. 살아있지만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죽은 이의 모습이요, 죽으면 어떤 모습인가를 보여주는 시체의 모습이다.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네 사람의 모습이 당신의 모습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살아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람이요, 정말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고 봉사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고쳐주신 것은 중풍병자를 보시고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중풍병자를 당신께 데리고 온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 주셨다.
그렇다. 우리가 예수님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고 해야 하는 일은 중풍병자들을 예수님께 데려가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복음을 전하는 일이요, 사람을 살리는 봉사이다.
나의 믿음은 나만을 위한 믿음이어서는 안 된다. 나도 구원받고 다른 사람들도 살리는 믿음이어야 한다.
믿음이란 사람들을 예수님께 데려가기만 하면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다 살려줄 수 있고 고쳐줄 수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어야 한다.
나를 살리고 다른 이를 살리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님께 데려가기만 하면 살릴 수 있다는 믿음뿐만 아니라 중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가기 위해서는 많은 장애물을 극복해야하고 희생을 치뤄야 하고 중단하지 말아야 한다.
보라.
오늘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온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가를.
그들이 중풍병자를 설득해서 들것에 들고 예수님께 데려오는 것도 힘든 일이고 또 예수님께 데려왔지만 많은 사람들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을 뚫는 일도 힘든 일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계신 곳의 지붕을 벗기고 구명을 내어 "중풍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 보냈다."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오기까지 이 네 사람이 겪어야했던 어려움들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어려움이었으며 힘든 작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네 사람들은 절망하지 않고 중단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갖고 노력하였고 인내하였으며 희생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드디어 중풍병자가 치유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이들이 사도이다.
하느님의 사람이요, 신앙인의 삶이고 자세이다.
네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 오기까지는 하였지만 그 다음은 중풍병자에게 달렸다.
항상 결정적인 치유는 본인 자신에게 달려있다. 다른 이들은 도와줄 수는 있어도 대신할 수는 없다.
목마른 이를 우물가에 데려갈 수는 있어도 물을 대신 마셔 줄 수가 없듯이 네 사람의 역할과 중풍병자의 몫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온 것까지는 네 사람이 할 수 있었지만 중풍병자가 치유받고 못받는 것은 전적으로 중풍병자에게 달려 있다.
만일 중풍병자가 네 사람이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가려고 하더라도 그가 원치 않았으면 강제로 데려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라." 라고 하셨을 때 중풍병자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들것에서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풍병자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오랫동안 중풍병을 앓고 있던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일어난다는 것은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그 동안 중풍병자가 치유받기 위해 안 해 본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고치지 못했는데 낮선 예수님의 말씀만을 듣고 일어나려고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겠는가?
어떤 특별한 진찰도 하지 않고 다만 보시고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라." 는 한 마디 말씀만을 듣고 일어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믿음이다. 또 그것이 말씀의 능력이다.
결국 중풍병자가 치유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가면 치유될 수 있을 것이라는 네 사람의 믿음과 예수님의 말씀만을 듣고 일어나 들것을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간 중풍병자의 믿음과 치유의 능력을 갖고 계신 예수님의 말씀의 합작품이다.
그곳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결국 은혜를 받은 사람은 믿음을 복음을 전하고 계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은 사람만이 은혜를 받았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쉽게 어떤 기적만을 기대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과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고 하기보다는 자기들의 고정관념과 얕은 지식으로 판단만 하는 율법학자들은 아무 은혜를 받지 못했다.
그럼 중풍병자가 중풍병을 앓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그의 죄였다.
죄란 무엇인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요,
예수님의 복음을 듣지만 복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생각이나 고정관념으로 판단해버리는 것이다.
오늘도 우리 주위에는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죄로 말미암아 중풍병을 앓고 들것에 누워지내는 병자들이 많이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복음을 전해야 하고 중풍병자들을 예수님께 데려오는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이 복음 선포의 사명을 실천하는 신앙인이다.
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나의 의무를 실행하지 않는 것이며 그것은 복음적인 삶을 산다고 할 수 없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사도라고 한다. 사도는 자기 영혼 안에 지니고 있는 하느님을 자기 주위에 발산하는 사람이다.
사도는 보화를 축적하고, 그 축적한 보화를 인류에게 전해주는 성인이다.
사도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인간에게 대한 사랑으로 불붙는 마음을 가지고 있고, 스스로 느끼고 생각하는 바를 절제할 수도 차단시킬 수도 없는 사람이다.
사도는 갈증을 해소시키고 싶어하는 이들에게로 달려가 넘치도록 채워주는 선택된 그릇이다.
사도는 자신 안에서 최고도로 활동하시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성전이다.
한 저술가의 말을 빌리자면, 사도는 자신의 몸 전체에서-공사를 막론하고 자기의 말, 일, 기도, 몸짓, 태도를 통해서, 그의 전 존재로부터 하느님을 발산시키는 사람이다.
하느님에 의거해서 살라! 그리고 하느님을 주라!
(알베리오네 신부님의 말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