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주간 화요일]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마르 3,31-35)
히브리서의 저자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러 오셨다고 한다. (히브 10,1-10)
형제 여러분, 1 율법은 장차 일어날 좋은 것들의 그림자만 지니고 있을 뿐 바로 그 실체의 모습은 지니고 있지 않으므로, 해마다 계속해서 바치는 같은 제물로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이들을 완전하게 할 수 없습니다.
2 만일 완전하게 할 수 있었다면, 예배하는 이들이 한 번 깨끗해진 다음에는 더 이상 죄의식을 가지지 않아 제물을 바치는 일도 중단되지 않았겠습니까?
3 그러한 제물로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될 뿐입니다.
4 황소와 염소의 피가 죄를 없애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5 그러한 까닭에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6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기꺼워하지 않으셨습니다.
7 그리하여 제가 아뢰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8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제물과 예물을”, 또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원하지도 기꺼워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고 말씀하시는데, 이것들은 율법에 따라 바치는 것입니다.
9 그다음에는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것을 세우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것을 치우신 것입니다.
10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라고 하신다. (마르 3,31-35)
31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
32 그분 둘레에는 군중이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3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34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35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연중 제3주간 화요일 제1독서(히브10,1~10)
"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기꺼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아뢰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5~7)
히브리서 10장 5~7절까지는 시편 40장 7~9절을 인용한 것이다.
'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로 번역된 '튀시안 카이 프로스포란
우크 에텔레사스'(thysian kai prosphoran uk ethellesas; sacrifice and offering
you did not desire)에서 서술어 '에텔레사스'(ethellesas; you desired)라는
2인칭 단수 부정(不定) 과거에 '우크'(uk; not)가 붙었다.
구약 성경에는 본문과 유사한 표현들이 있다.
호세아 예언자의 입을 빌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호세6,6)라고 말씀하셨다.
사무엘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임의로 제사를 드린 사울 왕에게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을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1사무15,20) 라고 지적하였다.
제사 제도를 제정하고 허락하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진정 원하시는 것은 제물이 아니었다.
그 제사 행위를 통해 당신 백성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범죄하지 않는
의로운 삶을 사는 것이었다.
무수한 제사를 드리면서도 죄에서 떠나지 않았던 이스라엘에게 하느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입을 통해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굳기름에는 물렸다.
황소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나는 싫다. 너희가 나의 얼굴을 보러 올 때
내 뜰을 짓밟으라고 누가 너희에게 시키더냐?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
초하룻날과 안식일과 축제 소집 불의에 찬 축제 모임을 나는 견딜 수가 없다'
(이사1,11~13)라는 충격적인 책망을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은 제사 자체를 목적으로 착각하고
죄에서 떠나지 않으면서 계속해서 제사드리는 데에만 전념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히브리서 서간의 수신자들 역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의
믿음을 버리고, 구약의 제사 제도로 회귀하려는 유혹에 직면해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라고 번역된 '소마 데 카테르티소 모이'
(soma de katertiso moi; but a body you prepared for me)는
히브리어 맛소라 본문과 차이가 있는 부분이다.
히브리어 맛소라 본문은 '오즈나임 카리타 리'(oznaim karitha li)로 표기되어 있고,
새 성경 시편 40장 7절에는 '오히려 저의 귀를 열어 주셨습니다'로 번역되어 있다.
그런데 히브리어 맛소라 본문의 '귀를 열어 주셨습니다'라는 표현은
본래 '순종하도록 했다'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의미는 히브리인들의 관습에서 나왔다.
즉 유대인들은 종을 부릴 때 6년 동안만 일하게 하고,
일곱째 해에는 자유로이 놓아주어야 했다(신명15,12).
그러나 종이 주인을 평생토록 떠나지 않겠다는 자유의지를 밝히게 되면,
주인은 송곳을 가져다가 그의 귀를 문에 대고 뚫어 평생 종이 되게
할 수 있었다(신명15,16.17).
따라서 종이 자발적으로 자기 귀를 뚫도록 주인에게 맡기는 것은
그가 평생 기쁨으로 주인의 뜻을 받들어 섬기겠다는 표시였다.
이런 측면에서 히브리어 맛소라 본문은 '귀를 열어 주셨습니다'
(뚫으셨습니다)는 표현을 쓴 것이다.
그 다음으로 히브리서 저자가 인용한 70인역(lxx)의 경우를 살펴보면,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라는 표현이 '주님의 뜻을 기꺼이
복종하겠다'라는 의미를 나타내며, 이런 측면에서 이 말이
'귀를 열어 주셨다'라는 표현과 같다는 견해를 가진다.
이러한 뉘앙스를 살려 본문을 설명하면, '내가 주님의 뜻을 기꺼이 따르고
순종하도록 주님께서 그 수단으로써 한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가 될 것이다.
한편, '마련해 주셨습니다'에 해당하는 '카테르티소'(katertiso)는
2인칭 단수 동사로서 그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하느님'이시다.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뜻을 순종하여 속죄의 제물을 드리도록
새 계약의 제물, 곧 '몸'을 준비하신 분은 구속 사업의 경륜을
주관하시는 성부 하느님이신 것이다.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기꺼워하지 않으셨습니다'
'번제물'에 해당하는 '홀로카우토마타'(hollokautomata)는 '전부'를 뜻하는
'홀로스'(holls)와 '불사름'을 뜻하는 '카우토스'(kautos)의 합성어인
'홀로카우토마'(hollokautoma)의 복수형으로서 '모두 태워 드리는 번제물'을 의미한다.
이 제사에 대한 규정은 레위기 1장 8절, 9절, 12절, 13절 등에 잘 나와 있다.
또한 '기꺼워하지 않으셨습니다'로 번역된 '우크 유도케사스'(uk eudokesas;
you were not pleased)는 '만족하지 아니하신다' 또는 '동의하지 아니하신다'
로 번역할 수도 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구약의 제사 제도에 대해 나타내시는 반응이다.
구약의 제사는 모두 동물을 제물삼아 드린 제사였다.
이 제사들로는 인간의 죄를 제거할 수 없었다.
종교 혹은 예배의 본질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께 나아가게 하는 것인데,
구약의 제사들은 한 사람도 하느님께 인도하지 못했던 것이다(히브10,1).
사실 구약의 제사 제도를 제정하신 분은 하느님이신데, 바로 그 하느님께서
제사 제도를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제사를 미워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구약 제사로서는 하느님을 온전히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제사의 한계성을 밝히는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하느님을 완전하게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구약 제사와 다른 그 무엇이
요구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그 구속 성혈의 공로를
믿는 믿음이다.
이것만이 완전한 구원을 가능하게 한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백성들에게 엄중한 죄의 결과를 경계하며 죄를 짓지 않도록
하려는 측면에서, 그리고 장차 올 새 계약(신약)에 대한 일시적인 예표를 삼고자
하는 측면에서 제사 제도를 명한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구약의 제사 자체보다는 그 이면에 담긴 순종을 원하셨고
(1사무15,22.23; 시편51,18.19), 백성들이 그 제사 제도를 통해 죄에서 떠나는 것
(이사1,11~17; 호세6,6)과 장차 올 온전한 제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두루마리에'
'두루마리'로 번역된 '엔 케팔리디 비블리우'(en kephallidi bibliu;
in the volume of the book; in the scroll; the roll of book)는
'두루마리 책'을 가리킨다.
본절에 언급된 두루마리 책은 임금이 지켜야 할 규정을 기록한 신명기 17장 14~20절,
또는 순종에 대해 기록한 신명기 28~30장을 지칭한다는 견해들이 있다.
이 견해를 포함하여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이 모든 성경의 중심이라고
말씀하신 점에 비추어 볼때(요한5,39), 이것은 구약 성경 전체를 가리킨다고
보아도 틀리지 않는다.
사실 몇몇 성경 구절들만이 아니라 구약 성경 전체는 그리스도께로 집중되어 있다.
성경의 어떤 책, 어떤 장이든지 그것을 해석할 때에 그리스도를 배제하고서는
구원사를 전개해 가시는 하느님의 뜻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가 없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하게 나타내는 내용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죽기까지 복종하셨다(필리2,8).
따라서 '이루러'로 번역된 '포이에사이'(poiesai; to do)는
'포이에오'(poieo)의 부정사이다.
'이루다','행하다', '만들다'를 뜻하는 '포이에오'(poieo) 동사는
모든 활동을 포괄하여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용어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측면에서 하느님의 '뜻'에 해당하는 '텔레마'
(thellema; will)을 이루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그분께서 아버지와 갖는 관계의 일면을 본다.
그분께서는 아버지의 뜻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그리고 언제든지 기꺼이 순종하고자 하셨다.
특히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니 동산에서 번민에 싸여 기도하신 내용
가운데도 그분의 이러한 마음이 잘 드러난다(마태26,39).
연중 제3주간 화요일 복음(마르3,31~35)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35)
예수님의 말씀의 초점이 당신 자신의 혈연적인 가족 관계를 부정하려는 데에 있지 않고, 영적 의미의 가족 관계를 강조하려는 데에 있었음을 잘 드러내주는 표현이다.
만일 예수님의 가르침의 초점이 혈연적 가족 관계의 부정에 있었다면, 가르침의 대상은 당신을 미쳤다고 생각하여 강제로라도 데리러 온(마르3,21) 가족들이 되었을 것이고, 가르침의 내용도 그들의 어리석음을 책망하는 데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르코 복음 3장 31~35절의 결론은 영적 의미의 가족이 누군가에 대한 정의에만 머물고 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혈연적 가족의 중요성을 부인하신 것이 아니고, 오히려 영적 의미의 가족에 대한 정의를 통해 당신 공동체의 내적 결속을 강화하신다.
당시 열 두 제자를 제외하고는 특별한 공동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자들은 보잘것 없었다(마르3,32). 이러한 보잘 것 없는 공동체에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학자들의 베엘제불 논쟁은 치명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당시 예수님께서 마귀 들렸다는 그릇된 풍문과 더불어 이제 막 시작된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선포에 막대한 타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예수님의 친척들이 가세하여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예수님의 공동체는 크나큰 위기에 직면하였다.
바로 이런 위기에 들려주신 예수님의 말씀이 누구든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가족이 된다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 도래하는 시대는 사회적 신분이나 가문, 지식에 상관없이 오직 하느님의 뜻을 실행함으로써 들어갈 자격이 주어진다.
또한 세상적으로 낙오된 자들도 영적으로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함으로써 예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는 자부심을 갖도록 하기에, 이런 위기의 순간에 펼쳐진 예수님의 가르침은 모든 상황을 반전시키는 힘있는 메시지가 되었던 것이다.
한편, 예수님께서 집에서 어떤 가르침을 주시고 계실 때 육신의 가족이 찾아왔다고 해서 가르침을 중단하고 가족들을 만나셨다면, 당신을 추종하던 제자들에게도 교육상 좋지 않은 예를 남기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 3장 32~33절의 정황에 비추어 볼 때, 예수님께서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인 제자들을 둘러보시며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고 말씀하셨을 때의 표정과 어투의 단호함과 엄격함은, 공사를 명백히 구분하고, 혈연과 육정을 초월해서 하느님 나라의 선포를 위해서만 자신들을 온전히 헌신해야 할 제자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고 본다.
<육적 인연을 영적 인연으로>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예수님께서 말도 되지 않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율법학자들을 준엄하고 신랄하게 꾸짖고 계실 때 때마침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목적은 명백했습니다. 공생활을 시작한 예수님의 언행이 거침없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군중들을 향해 던지는 한 말씀 한 말씀이 꿀처럼 달콤했고 새로웠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비록 꺼져가는 권력이지만 유다 교회 고위층들의 심기를 긁어놓는 ‘심한’ 말을 서슴지 않고 내던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까지 돌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그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가족으로서 당연히 걱정이 컸겠습니다. 밥이나 먹고 지내는지, 몸이 상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 태산 같았을 것입니다. 예수님 신변은 안전한지, 건강은 잘 챙기고 있는지 살펴보려고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형제’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그렇다면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 또 다른 자식들이 있었다는 말일까요? 성서학자들은 여기에 대해서 다양한 추측들을 내어놓았는데, 가장 신빙성 있는 답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같은 배에서 태어난 친형제가 아니라 사촌 형제로 추정됩니다. 구약성경에서도 사촌에 해당되는 단어 대신 형제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히브리어나 아람어에서는 사촌을 지칭하는 적절한 표현이 없기에 종종 ‘형제’라는 단어로 대체하곤 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9장 26절 이하를 살펴보면 이러한 논리를 보다 설득력 있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직전에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다른 누구도 아닌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십니다. 만일에 예수님의 친형제가 있었다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요?
또 한 가지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걱정 때문에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다가 찾아온 어머니와 사촌형제들을 대하는 예수님의 태도입니다. 그들이 멀리서 예수님을 찾아와 만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특별합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육적 인연들이 찾아오신 것을 기회로 당신에게는 혈육으로 맺어진 인연보다 더 중요한 영적 가족들이 있음을 강조하십니다. 영으로 맺어진 인연이란 지금 예수님과 동고동락하고 있는 제자들, 예수님을 사랑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 예수님의 가르침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고 있는 사람들임을 강하게 선언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지극히 자비하시면서도 엄격하십니다. 지극히 부드러우면서도 직설적이십니다. 지극히 관대하시면서도 철저하십니다. 지극히 공손하시면서도 예리하십니다.
때로 단호하게 선을 그으면서도 따뜻한 치유자의 손길을 펼치십니다. 때로 확실하게 분리하면서도 성장시키십니다. 때로 확실하게 거절하시면서도 긍정의 여지를 남기십니다. 때로 인간 현실에 깊숙이 개입하시면서도 인간 세상을 초월하십니다. 때로 철저하게 인간이시면서도 하느님이십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예수님께서 혈육으로 맺어진 인연을 하찮게 여기시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래서 전체 문맥 안에서 이 사건을 잘 숙고해야 할 것입니다. 혈육으로 맺어진 인연도 참으로 중요합니다. 가족들은 내 사랑이 가장 먼저 실천되어야 할 첫 번째 대상들입니다.
그러나 더 큰 사명, 더 큰 사랑, 더 큰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더 큰 뜻을 찾는 사람들이 걷는 길이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 길인지를 예수님께서는 명백히 강조하고 계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강조점에 힘입어 오늘도 수많은 청춘남녀들이 보다 예수님을 가까이 따르기 위해, 그분의 뜻에 동참하기 위해 세상을 등지고 사제생활, 수도생활, 다양한 봉헌생활을 선택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