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주간 월요일]성령 모독죄 (마르 3,22-30)

2019. 1. 28. 오전 7:5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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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주간 월요일]성령 모독죄 (마르 3,22-30)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다고 한다. (히브 9,15.24-28)
형제 여러분, 15 그리스도께서는 새 계약의 중개자이십니다. 첫째 계약 아래에서 저지른 범죄로부터 사람들을 속량하시려고  그분께서 돌아가시어,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약속된 영원한 상속 재산을 받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24 그리스도께서는, 참성소의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 곳에, 곧 사람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 앞에 나타나시려고  바로 하늘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25 대사제가 해마다 다른 생물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듯이, 당신 자신을 여러 번 바치시려고 들어가신 것이 아닙니다.
26 만일 그렇다면 세상 창조 때부터 여러 번 고난을 받으셔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분께서는 마지막 시대에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쳐 죄를 없애시려고 단 한 번 나타나셨습니다.
27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 심판이 이어지듯이,
28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고대하는 이들을 구원하시려고  죄와는 상관없이 두 번째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비난하는 이들에게,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고 하신다. (마르 3,22-30)
그때에 22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도 하였다.
23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셔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24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
25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
26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
27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29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30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사람들이 “예수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연중제3주간 월요일 제1독서(히브9,15. 24-28)


"그리스도께서는, 참성소의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 곳에, 곧 사람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 앞에 나타나시려고

 바로 하늘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24)

 

 히브리서 9장 23절에서 더 나은 제물이 요구되는 하늘 성소의 제사에 대해 언급한 저자는

이어지는 9장 24절-26절에서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기 위해 하늘 성소에 들어가신

대사제 그리스도의 첫번째 등장에 대해 언급한다.

 

 '참성소의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 곳에'

 

본문은 지상에 있는 성막을 가리키는 말이다.

신약에서는 하느님의 작품과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을 여러 차례 대조시키는데,

손으로 짓지 아니한 성전과 손으로 지은 성전(마르14,49 ;사도7,48), 하늘의 참성소와

그 모조품인 지상의 성막(히브9,11.24), 손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그리스도의 할례와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할례(에페2,11 ;콜로2,11)등이 그 예이다.

 

성소의 설계도를 하느님께서 주셨다 할지라도 인간이 만든 성소는 실체가 아니라

완전한 하늘 성소의 모조품일 뿐이다.

 

'모조품'으로 번역된 '안티티파'(antitypa)는 앞의 23절에 나오는 '모상'으로 번역된

'휘포데이그마'(hypodeigma)와 비슷한 단어로서, 어떤 소리를 반향하는

또는 어떤 빛을 반사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베드로 전서 3장 21절에는 '본형'으로 번역하였다.

이것은 어떤 실체에 대한 반영일 뿐 그 원형은 결코 될 수 없음을 말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모조품(그림자)의 실체를 참된 것으로 표현한다.

 

여기서 '참'으로 번역된 '알레티논'(allethinon)원형 '알레티노스'(alletinos)

가짜와 불완전한 것에 대한 대립되는 개념이다.

'진짜', '순수한 것' 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렇다고 히브리서 저자가 지상의 성막이 가짜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모조품(그림자)을 만드는 목적이것을 통해 실체를 탐구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모조품(그림자)은 실체를 희미하게 나타내주기 때문에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은 실체를 향하여 나아갈 수 있다.

 

히브리서 8장 5절에는 <모세가 성막을 세우려고 할 때에 지시를 받은 대로,

그들은 하늘에 있는 성소의 모상이며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성소에서 봉직합니다.

하느님께서 "자, 내가 이 산에서 너에게 보여 준 모형에 따라 모든 것을 만들어라."

(탈출25,40)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라고 되어 있다.

 

모세가 만든 성막은 하느님께 제사드리는 처소로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지은 것이다.

그런데 그 성막은 하늘에 있는 성소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이 하늘에 있는 성소로서 이 땅에 내려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히브리서 8장 5절의 '성막'에 해당하는 '스케넨'(skenen)의 원형 '스케네'(skene)

'덮다'(cover)라는 의미를 지닌 '스카'(ska)라는 어근에서 유래한 명사이며, 그 동사형

'성막을 치다', '성막속에 거주하다' 라는 의미를 지닌 '스케노오'(skenoo)이다.

 

이 동사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었고(요한1,14),

천국에 들어간 성도들 위에 영원한 천막을 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었다(묵시7,15).

 

이러한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느님께서 만드신 진정한 성막임을 나타내며

모세 시대의 성막은 바로 그 참 성막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하고 반영하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은 것임을 보여준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와 같은 신학적 진리를 깨닫고 구약의 모든 제사 제도

및 그 일을 수행하는 장소인 성막이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히브리서 곳곳에서 거듭 강조하고 있다.

 

히브리서 저자가 이런 사실을 그토록 반복적으로 진술하는 것은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버리고

모조품 및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구약의 제사 제도로 다시 회귀하려는 유혹에 직면한

본 서간의 일차 독자인 히브리 성도들(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을 영적으로 깨우치기 위한 것이다.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 앞에 나타나시려고 바로 하늘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들어가신 곳은 그림자인 지상 성소가 아니라 실체인 하늘의 성소, 곧 하느님 대전이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믿는 성도들에게 열어 주시는 것도 하느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다.

 

구약의 제사 제도 아래에서는 일반 백성들의 경우 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으며, 

사제들의 경우도 지성소의 출입이 일체 금지되었고,

대사제만이 지성소에 일년에 한 번씩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죽음을 통해 당신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직접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구약의 이스라엘이 꿈도 꿀 수 없었던

엄청난 특권을 누리고 있는 셈이다.

 

히브리서 9장 24절은 그리스도께서 참 하늘에 들어가신 사실에 대해 언급한다.

여기서 '나타나시려고'로 번역된 '엠파니스테나이'(emphanisthenai)'나타내다',

'보여주다', '알게하다' 등을 뜻하는 '엠파니조'(emphanizo)의 부정사 수동태이다.

여기서 수동태는 자동사의 의미를 지니며,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께 자신을 보이신 것을 말한다.

 

그분이 하느님의 대전에, 하느님의 면전에 나타나신 목적은 바로 우리를 위함이었다.

여기서 '우리를 위하여'로 번역된 '휘페르 헤몬'(hyper hemom; for you)에서

'우리'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예수그리스도를 믿어

하느님 앞에 의화된 모든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

 

또한 '우리를 위하여'라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을 열어주신 사실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상 죽음을 당하심으로써

이제는 누구든지 그를 믿기만 하면 하느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법적,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이 열린 것이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 성혈의 공로와 은혜를 믿고 회개하는 자들만을 위해 열린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시는 것을 보고 율법 학자들이,

그것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힘으로 사탄을 쫓아낼 수는 없는 일이라고 하시며,

당신을 모독하면 용서받을 수 있으나

‘성령을 모독하면’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성령의 일을 사탄의 일이라 말하였기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령의 일까지 사탄의 일로 보이는 이유는,

그것을 보는 사람이 사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하고 물으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안식일 법을 어기는지만 살피고 있던 유다인들은,

말문이 막혀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마르 3,4 참조).

더 이상 옳고 그름도,

성령인지 악령인지도 판단할 수 없게 악하게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내가 순수한 사람이 되어야 모든 것을 순수하게 보게 됩니다.

산은 산으로 물은 물로 보게 됩니다.

돈에 집착하는 수전노는 산도 돈으로 물도 돈으로 봅니다.

그래서 누가 선의를 베풀어도 악의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빛은 빛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시편 36〔35〕,10 참조).


만약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기 직전에 손을 내미는 사람의 호의를 믿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영원한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 손을 잡으려면 나도 그 손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도 그런 선행을 할 수 있다고 믿고 그 손을 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내미시는 도움의 손길이십니다.

그 내민 손도 믿지 못한다면 이미 사탄에게 사로잡힌 것이고,

그런 사람에게는 구원의 희망이 없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하느님의 전사戰士" -성령의 사람-
연중 제3주간 월요일 - 2사무5,1-7.10 마르3,22-30       

분별력은 모든 덕의 어머니입니다.
성령에 따라 살 때 올바른 분별의 지혜입니다.
영적전쟁에서 분별력의 덕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주님의 전사에게 가장 중요한 영적무기는 바로 분별력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나 제1독서 사무엘 하권의 다윗이야 말로
주님의 전사의 모범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영적전쟁의 대상은 예루살렘에 내려 온 율법학자들입니다.
이들의 분별력이 얼마나 형편 없는지 그들의 예수님의 평가에서 들어납니다.
정상적인 신앙감각의 상실을 뜻합니다.
누구나에게 자명한 사실을 이들은 보지 못합니다.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 또는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말합니다.

참 어처구니 없는 분별입니다.
편견으로 굳어진 완고한 마음을 바꾸기는 얼마나 힘든지요.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완전히 곡해하여 사탄의 일로 치부합니다.
분별력의 대가 예수님은 이들의 모순을 곧바로 지적해 내십니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지 못한다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지 못할 것이다.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

결론하여 사탄은 분열하여 스스로 망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다는 것입니다.
정말 무서운 것은 외부의 침략이 아니라 내부의 분열입니다.
대부분 내부의 분열로 망하며 내부의 분열을 부추기는 것이
바로 사탄이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결코 사탄끼리는 싸우지 않습니다.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는 것은 사탄보다 더 힘센 분 바로 예수님만이 가능하십니다.
사탄이 사탄을 쫓아낸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께서 성령의 힘으로 쫓아냈음을 암시하는 다음 말씀입니다.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

바로 성령에 의한 영적전쟁의 승리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악령을 압도할 수 있는 힘은 성령으로부터 옵니다.
하느님의 전사인 예수님의 승리는 바로 성령의 승리를 뜻합니다.
마침내 주님은 율법학자들의 죄를 밝히시며 분열책동을 분쇄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이며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한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율법학자들처럼 너무 명백한 예수님을 통한
성령의 역사를 사탄의 역사로 왜곡하는 자들입니다. 고의적이자 악의적입니다.
성령은 모든 선의 원천입니다. 하느님은 성령을 통해 세상 어디서나 현존하십니다.

하여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율법학자들처럼 예수님을 통해 이뤄지는
너무나도 자명한 선善과 사랑의 현실을, 보통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자명한 사실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닫아버리면 하느님도 어쩌지 못합니다.
회개를 통해 자신을 열어야 화해도 치유도 가능한데 이렇게 자신을 닫아버리면
하느님도 어쩌지 못합니다.

하느님도 이런 면에선 무능합니다.
결코 하느님께서도 인간의 사랑을 강요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자유입니다. 자유롭지 못하다면 그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이런 자유의 귀결은 반대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합니다.
하느님이 아닌 악을, 성령이 아닌 악령을 선태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자유의 행사가 얼마나 큰 모험이며 책임을 동반하는지 깨닫습니다.
바로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누구 탓도 아닌 바로 자기 탓이라는 것입니다.
완고하게 자신을 닫아 걸고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
바로 이것이 바로 성령을 모독하는 용서받지 못할 죄입니다.

이를 통해 참 영성의 특징을 깨닫게 됩니다.
성령의 인도하에 성령에 따라 사는 성령의 사람이 진정 영성가이며
하느님의 전사입니다. 이런 이들의 영성은 개방성, 신축성, 유연성, 단순성,
일치성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제1독서의 다윗이 승승장구하여 마침내 전 이스라엘의 임금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하느님의 성령에 충실했기 때문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전사는 성령의 사람입다. 마지막 말마디가 다윗의 삶을 요약합니다.
“다윗은 세력이 점점 커졌다. 주 만군의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

어제 강론 때 강조했던 ‘영원한 반려자 하느님’께서 늘 다윗과 함께 하셨기에
다윗의 성공적 삶임을 깨닫게 됩니다. 어제 반려동물, 반려식물에 대해
오늘날 휴대폰이야 말로 필수불가결의 ‘영원한 반려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진짜 영원한 반려자는 성령을 통하여 늘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 한 분 뿐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래야 성령에 따른 올바른 분별의 삶입니다.
하여 영원한 반려자이신 주님과 끊임없는 대화의 기도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 모두 영원한 반려자이신 주님을 모시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은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내 진실 내 자애가 항상 그와 함께 있으리라.”(시편89,25ㄱ).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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