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6주간 수요일]소경치유사건 (마르 8,22-26)

2019. 2. 20. 오전 6:0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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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 제6주간 수요일]소경치유사건 (마르 8,22-26)


주님께서는 노아가 번제물을 바치자,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하신다. (창세 8,6-13.20-22)
6 사십 일이 지난 뒤에 노아는 자기가 만든 방주의 창을 열고 7 까마귀를 내보냈다. 까마귀는 밖으로 나가 땅에 물이 마를 때까지 왔다 갔다 하였다.
8 그는 또 물이 땅에서 빠졌는지 보려고 비둘기를 내보냈다.
9 그러나 비둘기는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노아에게 돌아왔다. 온 땅에 아직도 물이 있었던 것이다. 노아는 손을 내밀어 그것을 잡아 방주 안으로 들여놓았다.
10 그는 이레를 더 기다리다가 다시 그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보냈다.
11 저녁때가 되어 비둘기가 그에게 돌아왔는데, 싱싱한 올리브 잎을 부리에 물고 있었다. 그래서 노아는 땅에서 물이 빠진 것을 알게 되었다.
12 노아는 이레를 더 기다려 그 비둘기를 내보냈다. 그러자 비둘기는 그에게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13 노아가 육백한 살이 되던 해, 첫째 달 초하룻날에 땅의 물이 말랐다. 노아가 방주 뚜껑을 열고 내다보니 과연 땅바닥이 말라 있었다.
20 노아는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들 가운데에서  번제물을 골라 그 제단 위에서 바쳤다.
21 주님께서 그 향내를 맡으시고 마음속으로 생각하셨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이번에 한 것처럼 다시는 어떤 생물도 파멸시키지 않으리라.
22 땅이 있는 한, 씨뿌리기와 거두기,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않으리라.’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를 고쳐 주시고 집으로 보내시면서,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고 하신다. (마르 8,22-26)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22 벳사이다로 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23 그분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셨다.
24 그는 앞을 쳐다보며,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5 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
26 예수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 말씀하셨다.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무엇이 보이느냐?

반영억라파엘신부


눈 먼 사람이 보게 된다면 얼마나 큰 기쁨이겠습니까? 그러나 보고 싶은 것도 많고, 볼 것도 많지만 정작 보아야 할 것을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보다라는 동사는 단순한 시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해와 깨달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생명의 빵이신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빵이 없다고 걱정하였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르8,18.21)는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참으로 보아야 할 것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눈 먼 이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침은 생명의 힘인 성령을 상징하고 성령은 마음을 흔들어 일깨우는 역할을 합니다. 손을 얹은 행위는 치유의 능력, 성령의 힘이 전달되었음을 알려줍니다.

무엇이 보이느냐?는 말은 단순히 육안으로 보이느냐? 의 질문이 아닙니다. 새로운 세상이 보이느냐? 능력을 지닌 구세주가 보이느냐? 는 물음입니다. 그렇다면 내면의 치우가 먼저입니다.

 

우리는 흔히 눈을 육안, 심안, 영안으로 구별합니다.

육안은 그야말로 밖으로 드러나 있는 것을 보는 눈입니다. 현상을 보는 눈도 중요합니다. 검은 것은 검게 보고, 흰 것은 희게 봐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 보는 눈도 필요합니다.

 

심안은 마음의 눈입니다. 품은 생각을 드러내는 눈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서 보이는 것이 다릅니다. 똑같은 것을 보아도 어느 사람은 긍정적으로 좋게 보고, 어떤 사람은 굽은 눈으로 봄으로써 자기 마음을 표출하게 됩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맑을 때에는 온몸도 환하고, 성하지 못할 때에는 몸도 어둡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아라(루카11,34-35).


우리는 각자의 직분에 맞는 마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부모는 부모로서의 마음을 품어야 하고 자녀는 자녀로서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스승은 스승으로서의 마음을, 제자는 제자로서의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성직자는 성직자로서의 마음을, 수도자는 수도자로서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래야 맑은 눈으로 볼 수 있게 됩니다.

 

영안은 신앙의 눈입니다. 영안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을 보는 눈도 아니고, 내 마음의 잣대로 판단하는 눈도 아닙니다. 영적인 눈은 하느님의 말씀에 비추어진 눈이요, 내 눈으로, 내 마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눈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는 눈입니다.

그야말로 당신의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이옵니다.(시편119,105) 영안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으로부터 빛을 받아야 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니 말씀을 통하여 능력과 지혜를 받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눈 먼 이는 주님의 손길을 통해 사람들을 보았는데 처음에는 사람들을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았습니다. 이것은 평상시에 익숙해져 있는 대로 본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다시 손을 얹으시자 똑똑히 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겉으로만 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을 보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능력은 아버지 하느님 안에서 행하여지고 마침내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이루신다는 깨달음을 얻기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을 고쳐주신 다음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마르8,26)고 하셨습니다. 저 마을이 무슨 마을일가요? 바리사이와 헤로데의 누룩이 만연하는 마을입니다. 어둠과 죽음의 그늘진 곳입니다. 그 마을로 들어가면 또다시 예전처럼 죄에 물들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니 그 마을로 가지 말라 하셨습니다.

또한 당신이 하신 일이 마음이 굽은 사람들의 눈에 구경거리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주님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늘의 뜻에 따라 하였지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육안의 눈을 넘어 마음의 눈을 뜨고, 영적인 눈을 뜨기까지 사랑과 정성으로 기도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주님께서 무엇이 보이느냐? 하시면 예, 주님, 뚜렷하게 보입니다. 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미루지 않는,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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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벳사이다의 눈먼 이를 고치시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 덕분에 눈을 뜬 다음에

인생이 영적으로 완전히 새롭게 변화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리코의 바르티매오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구걸을 하면서 살던 그는 예수님을 만나서 눈을 뜬 다음에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마르 10,52).


잘 먹고 잘 사는 인생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향해서 가시는 예수님의 길에 동참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눈먼 거지’도 비슷합니다.

그는 바리사이들의 온갖 박해와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그분이 제 눈을 뜨게 해 주셨는데

여러분은 그분이 어디에서 오셨는지 모르신다니, 그것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을 들어 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누가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면,

그 사람의 말은 들어 주십니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의 눈을 누가 뜨게 해 주었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으셨으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요한 9,30-33).”

바리사이들은 그를 회당에서 내쫓아 버렸는데(요한 9,34),

그래도 그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요한 9,38).

참으로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교 신앙인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총을 받아서 눈을 뜨게 되었다면, 자신의 인생을 새롭게 변화시키고,

제대로 보고, 제대로 믿는 것은 그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세례성사는 예수님을 만나서 눈을 뜨게 되는 성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둠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요한 1,4).>

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되었다면, 그것으로 멈추면 안 되고,

자신의 인생을 새롭게 변화시키려고 노력해야 하고,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끝까지 따라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 노력은 날마다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들은 벳사이다로 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그분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는 앞을 쳐다보며,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하고 말씀하셨다(마르 8,22-26).”


여기서 예수님께서 눈먼 사람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신 일과

그를 고쳐 주신 다음에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라고 말씀하신 것은

‘새 인생’을 향해서 나아가라는 당부로 해석됩니다.

즉 ‘마을’은 버려야 할 ‘옛 삶’을 상징하고,

마을을 멀리하는 것은 ‘새로운 삶’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을 뜻한다고 해석됩니다.

(그 마을에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당시에 눈먼 이들이 흔히 그랬던 것처럼

이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도 구걸을 하면서 살았을 가능성이 큰데,

예수님께서는 그가 먹고사는 것만 생각하는 인생에서 벗어나서

바르티매오처럼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새 인생을 살기를

바라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떻든 그 사람의 이야기는 미완성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마을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갔는지,

즉 낡은 삶을 버리고 새 인생을 살기 시작했는지,

아니면 그냥 자신의 옛 삶으로 되돌아갔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눈을 떴어도 인생이 바뀌지 않았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주신 은총을 헛되게 낭비한 것과 같습니다.

그런 경우라도 예수님께서는 한 번 주신 은총을 취소하시지는 않지만,

받은 쪽에서 그 은총을 허무하게 버리는 셈이 됩니다.

반대로, 바르티매오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이 되었다면,

그것은 받은 은총에 더 큰 은총을 더한 일이고, 은총의 열매를 맺은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대로,

그분에 관하여 듣고 또 가르침을 받았을 줄 압니다.

곧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에페 4,21-24).”

신앙인으로서 산다는 것은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새 인간’을 입는 새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그렇게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인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면서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버리고 떠난 ‘옛 삶’에 대한 미련, 아쉬움, 집착 등은

신앙생활의 큰 걸림돌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이 세상의 더러움에서 벗어난 그 사람들이

그것에 다시 말려들어 굴복을 당하게 되면, 그들의 끝은 처음보다 더 나빠집니다.

의로움의 길을 알고서도 자기들이 받은 거룩한 계명을 저버린다면,

차라리 그 길을 알지 못하였던 편이 나을 것입니다.

‘개는 자기가 게운 데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돼지는 몸을 씻고 나서 다시 진창에 뒹군다.’는 속담이

그들에게 그대로 들어맞았습니다(2베드 2,20-22).”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받았지만 그것을 저버린 사람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몰랐던 사람들은 짓지 않는 죄를 지은 사람들입니다.

(받은 은총을 저버리는 것은 큰 죄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벳사이다에서 눈먼 이를 볼 수 있게 해 주신 이야기를 듣습니다.

일반적으로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치유해 주실 때에는 명령 한마디로 충분한 경우가 많지만, 때로 병자에게 직접 손을 대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기적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손을 두 번이나 얹어 주십니다.

침을 바르고 손을 얹어 주는 것은 예수님께서 사시던 당시에 통속적인 치유 수단으로 여겨집니다.


또한 병자의 치유도 단계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병자에게 사람들이 처음에는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이다가, 예수님께서 다시 손을 얹어 주시자 모든 것을 똑똑히 보게 됩니다.

이러한 단계적인 치유는 예수님의 능력이 약함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쳐 주시려고 애를 쓰시는 모습을 보여 주면서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이 사건 안에 몰입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결국 명령으로 이루어지는 치유와 근본적으로 같은 내용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두 번이나 치유 동작을 보여 주시는 것은 그 사람이 모든 것을 똑똑히 볼 수 있도록 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 동작을 하시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우리는 무엇을 보고 살아갑니까?

혹시 내가 보고 싶은 것이나 아름다운 것만을 보면서, 다른 것은 외면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 병자에게 하셨듯이 우리도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그리고 어느 곳에서 사람들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지도 제대로 보아야 합니다.
제대로 볼 줄 모르는 우리의 눈도 치유해 주십사 청해야 하겠습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2월 20일 파티마의 복녀 히야친타|오늘의 성인/축일

 이혜경히야친따 축일

 

축일:2월 20일

파티마의 복녀 히야친타

blessed jacinta marto

bl. jacinta marta

beata giacinta marto di fatima

aljustrel, portogallo, 11 marzo 1910 - 20 febbraio 1920

beatified:13 may 2000 by pope john paul ii

canonized:pending

 

 

파티마의 복되신 동정 성모 마리아

our lady of fatima

 

포르투갈의 파티마에서 1917년 5월 13일부터 10월 13일까지 매 13일 6회에 걸쳐 발현(發顯) 한 성모를 말한다.

뒤에 가르멜회 수녀가 되어 이 발현에 대해 저술한 루시아(lucia dos santos,1907∼2005) 와

그녀의 사촌남매 자신타(jacinta marto, 1910∼1920)와 프란치스코(francisco marto, 1908∼1919) 등

세 목동들만이 성모를 직접 보고 그 말씀을 들었다.(단, 프란치스코는 듣지 못했다).

 

 

사람들의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발현 횟수가 거듭됨에 따라 군중의 수는 획기적으로 늘어났으며,

성모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겠다고 약속한 10월에는

태양이 지상에 수직으로 떨어지며 회전하고 갖가지 빛을 발하는 `태양의 기적’을 7만명의 군중이 목격하였다.

 

파티마의 성모는 세 어린이들을 통해 속죄, 로사리오 기도를 자주 바칠 것,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와 고행을 바칠 것, 성직자를 위해 기도할 것,

세계 모든 사람이 성모의 티없는 성심께 봉헌할 것, 그리고 매달 첫 토요일에 속죄의 영성체를 할 것 등을 당부하였으며

이 대가로 많은 영혼이 구원되고 더 끔찍한 세계 전쟁을 피할 수 있으며 러시아의 회개와 세계평화를 가져다 줄 것임을 약속하엿다.

 

1930년에 포르투갈의 주교들은 파티마의 성모발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으며, 1942년 교황 비오 12세는 성모의 요청대로 러시아에 대해 특히 언급하면서

세상을 성모의 티없는 성심께 봉헌하였다.

1967년 바오로 6세 교황은 발현 50주년 기념에 개인적으로 파티마를 찾아 순례하였다.

(가톨릭대사전에서)

 

 


 

 

파티마 fatima

중부 포르투갈의 산악지대인 레이리아(leiria)교구에 있는 본당.

1917년 성모 마리아가 파티마본당 구역 내의 목장지대인 코바 다이리아(cova da iria)에 발현한 이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마리아 성당 중의 한 곳이 되었으며 수많은 순례자가 참배하였다.

기적이 일어났던 나무 부근에는 현재 발현 경당과 함께 발현을 목격한 루시아 수녀의 진술에 의거하여 조각된 성모상이 서 있으며

그 밖에도 병원, 호스피스, 수도단체 등이 파티마에 세워졌다.

(가톨릭대사전에서)

 

 

파티마의 성모(포르투칼)

 

파티마의 어린이들에게 동정 마리아께서 발현하신 것은 세계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7년 여름이었다.

레이리아 교구의 작은 마을 주민들은 대개가 가난한 사람들이고, 또 소농이었기 때문에 매일같이 들과 가축들을 돌보아야만 했다.

성모님의 발현을 목격한 어린이들도 양치는 일을 맡고 있었다.

 

 

루치아 도스 산토스는 10세였고, 그녀의 나이어린 사촌 동생 프란치스꼬와 히야친타가 곧 그들이다.

 

그들은 루치아의 책임 아래 양을 쳤는데, 자주는 아니지만 들판에서 무릎을 꿇고 로사리오 기도를 즐겨 바쳤다고 한다.

1916년 여름에는 한 천사가 몇 차례 발현하여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드리는 기도를 가르쳤다는 것이다.

 

1917년 5월 13일은 토요일이었다.

그날 정오경, 한줄기 밝은 빛이 아이들을 비추었는데, 그들은 코바 다 이리아의 나무 위에서 찬란한 모습의 어떤 부인이 나타난 것을 보았다.

이 첫 발현 때, 그 부인은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그리고 전쟁의 종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이르시면서, 매달 13일에 다시 오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후, 발현은 6월 13일과 7월 13일에도 일어났다.

네 번째 발현일인 8월 13일에는 어린이들이 지방 당국으로부터 방해를 받고 코바 다이리아로 가지 못했으나 19일에 그 부인을 만났다.

9월 13일, 부인은 전쟁이 끝나도록 로사리오를 바치라고 이르셨다.

끝으로 10월 13일, 그 "부인"은 당신을 "로사리오의 모후"라고 알려 주시고, 기도하고 보속하라고 다시금 이르셨다.

그날, 놀라운 천상적인 현상이 일어났다.

태양이 빙빙 돌면서 하늘에서 떨어져 땅에 쳐박히는 듯한 놀라운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어린이들은 첫 발현날인 5월 13일처럼 일찍이 그 곳을 향하였다.

약 3만 명의 대군중들이 어린이 주변에 몰려 있다가 신비로운 이 현장을 목격한 것이다.

 

 

어린이들이 코바 다 이리아에서 본 환시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은 1930년 10월 13일이다.

레이리아의 주교는 오랜동안 조사 검토한 뒤에 코바 다 이리아에서 로사리오의 성모 공경을 허가했던 것이다.

발현 얼마 뒤에 두 어린이는 선종하였다.

 

발현은 보았으나 말씀은 듣지 못했던 프란치스코는 1919년 4월 4일에 선종했고,

동생 히야친타는 1920년 2월 20일에 하느님 품에 안겼으며, 유일한 생존자인 루치아는 수녀가 되었다.

 

 

1. 파티마의 메시지

 

파티마의 공적인 메시지는 루르드의 메시지와 거의 같다.

어린 아이들을 통하여 마리아는 죄인들을 위한 기도와 로사리오 기도 그리고 보속 행위를 하라고 요구하셨기 때문이다.

10월 13일의 말씀은 이렇다:

"나는 생활을 개선하고 죄로 인하여 우리 주님을 슬프게 하지 말며, 로사리오 기도를 바치도록 신자들을 권고하기 위하여 왔다.

나는 이곳에 나를 위한 성당을 원한다. 사람들이 그들의 태도를 개선한다면, 전쟁은 곧 끝날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어린이들에게 어떤 "비밀"도 일러주셨는데, 루치아가 이중의 몇 가지를 전달하였다.

아마도 추측하건데, 머지 않은 장래에 또 다른 전쟁이 있으리라는 예언과 함께, 티없이 깨끗하신 마리아 성심에 관한 공경이 주 내용인 듯하다.

그러나 루치아가 받은 마지막 비밀은 요한 23세 교황님께 맡겼다.

 

루르드에서처럼, 파티마의 "발현"은 수많은 순례자가 몰려들게 하였다.

1917년 여름부터 시작된 순례는 놀라운 숫자에 달하였는데, 그들중에는 포르투갈인들도 있었지만 다른 나라에서 온 순례자들도 많았다.

1931년 5월 13일, 발현에 대한 교회의 공식 인정이 있은 다음부터는 순례자들이 수백만에 이른 것이다.

 

교황님들도 파티마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비오 12세, 바오로 6세 그리고 요한 바오로 2세가 파티마를 순례하고 기도하였다.

교황님들의 이런 관심이 순례자의 수를 더욱 많게 하였고, 발현 장소에 성전을 짓게 된 계기가 되었다.

순례자들은, 이 한적한 곳에서, 마리아께서 어린이들에게 말씀하신 내용을 다시금 묵상하며 마리아 어머니의 말씀을 실행하기로 다짐하는 것이다.

 

 

2. 파티마와 교황

 

비오 12세: 세상을 마리아 성심에 봉헌하심.

 

1942년 10월 31일, 비오 12세는 파티마의 성모 발현 25주년을 기하여 모여든 순례자들에게 라디오-메시지를 보냈다.

성모님께 감사와 충성을 드리고 기도하라고 권하신 뒤, 교황은 세상을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에 봉헌하신 것이다.

 

파티마 사건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1946년 5월 13일, 비오 12세 교황은 파티마 성모상 대관을 위하여 라디오-메시지를 보냈다.

여기서 교황은 "파티마의 장관(壯觀)"은 "티없이 깨끗하신 여왕이시며,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모성적인 자애로운 성심의 활동"이라고 하시고,

마리아의 끊임없는 보호가 포르투갈에 내릴 것이라고 하셨다.

또 교황은 마리아가 천상적이며 우주적인 여왕이심을 찬양하시며, 파티마 발현의 중요성을 역설하셨다.

 

 

바오로 6세: 인간 가족을 성모님께 봉헌하심.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제3회기 폐막식에서(1964년 11월 21일), 바오로 6세는 마리아께서 만국 공의회와 교회를 축복해 주시며,

이세상의 끝없는 수평선에서 눈을 돌리지 않도록 복되신 동정녀께 열렬히 기도하자고 말씀하시고, 이 천상 어머니께 전 인간 가족을 봉헌하셨다.

 

마리아께 대한 봉헌의 쇄신을 당부하셨다:

1967년 5월 13일, 코바 다이리아의 성모 발현 50주년을 기하여, 바오로 6세는 파티마로 가서 기도와 평화의 순례를 하셨다.

그때 교황은 복되신 동정녀 공경과 본받음에 대한 권고를 전 교회에서 보내셨는데, 이 권고의 제목은 "교회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이다.

여기서 교황은 교회의 어머니의 티없이 깨끗하신 성심에 대한 봉헌을 새롭게 하라고 모든 신자들에게 촉구하셨다.

 

 

요한 바오로 2세: 파티마의 메시지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부합된다.

 

1982년 5월 12일, 요한 바오로 2세는 파티마를 순례하시고, 성모 발현 65주년을 기념하였다.

이때 교황은 동정 마리아의 중재하심에 감사드리고, 세상의 만백성을 마리아의 티없이 깨끗하신 성심께 새롭게 봉헌하셨다.

 

1982년 5월 13일, 파티마의 성모 첫 발현일을 즈음하여 교황은 발현장소에서 미사를 거행하신 후,

75세의 가르멜 수녀이며, 발현을 증언했던 세 어린이 중의 유일한 생존자인 루치아에게 성체를 영하여 주셨다.

이때, 교황은 파티마의 메시지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부합된다고 역설하였다.

『마리아 사전』 가운데 (성바오로선교네트에서)

 

 

파티마(루치아수녀회고록)

역 자:대전가르멜여자수도원. 출판사:가톨릭

 

이 책은 성모성년의 해를 준비하며 파티마의 성모 발현 70주년을 맞아 번역한 티 없으신 성심의 마리아 루치아 수녀의 회고록이다.

그녀는 1907년 3월 22일 포르투갈 파티마 본당에 속한 작은 촌락인 알주스트렐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사촌 히야친따와 프란치스꼬와 함께 성모님의 발현을 본 후 그로 말미암아 생활에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그의 사촌들은 일찍 세상을 떠나고 그녀만이 성모님이 발현하신 목적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성녀 도로테아 수녀원을 거쳐

지금은 80세로 맨발 가르멜 수녀회 수녀로서 기도와 속죄의 생활을 하고 있다.

 

각각 다른 시기에 쓰여진 네 개의 회고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1935년 레이리아 주교 명령으로 쓰여진 첫째 회고에서는

파티마의 빛, 티없이 깨끗하신 마리아의 성심의 빛으로 완전히 비추어진 히야친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둘째 회고 역시 1937년 주교 명령으로 쓰여졌으며 발현 사건이후 자체들이 좀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있다.

셋째 회고에서는 ’하느님의 영광과 영혼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 틀림없다는 완전한 순명의 표시로 발현의 세 가지 비밀 중 두 가지를 밝히고 있으며,

회고록 중 가장 긴 넷째 회고에서는 프란치스꼬에 관한 추억들과 그의 영성, 성모님과 천사의 발현에 대한 사실들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교황 바오로 6세가 그토록 한탄한, 힘겹고 추운 겨울을 지내고 있는 오늘날 하느님의 교회에 위안을 주며, 신선하고 새로운 풍토를 조성해 주고 있다.

또한 책 전체를 통하여 울려나오는 순결하고 참으로 단순한 영혼의 소리는

방황하는 신앙인들에게 회개와 보속하는 마음을 불러 일으켜 주고 깊은 평화를 맛보게 해 줄 것이다.

 

 

 

파티마의 비밀.

apparitions atfatima. 바오로딸 (video)

 

이 이야기는 1917년 포르투칼 파티마에서 양을 치던 세 어린 목등들에게 동정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모습을 극영화로 제작한 것이다.

성모님께서는 신앙심이 깊은 세 어린이에게 세상의 죄와 전쟁을 없애고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묵주기도와 희생을 바치도록 말씀하셨다.

성모님의 발현을 목격한 어린이들은 이 사실을 믿지 못하는 동네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상황에 이른다.

 

세 어린이 중 가장 나이가 많았던 루치아는 지금도 생존해 있는 데

가르멜회 수녀님으로 지금도 세상의 평화와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며 살고 있다.

2000년 5월 세 목동 중 프란치스코와 히야친타가 교회에 의해 시복되었다.

포르투칼 파티마의 소박한 시골정경과 순진한 어린이들의 성모님 발현 목격장면은 보는 이에게 잔잔한 감동을 안겨주는 이 영화는

매 순간 하느님을 찾고 그분께 의지하는 신앙인들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어 줄 것이다.

특히 레지오 단원들에게, 각 성모신심 단체들에게 권하고 싶은 영화이다.

 

 

파티마와 교회

저자:요셉 베게너. 역자:남현욱. 출판사:가톨릭

 

이미 발간된 책 ’루치아 수녀의 증언’, ’파티마’, ’골고타 파티마’ 등을 참고하여 편역한 이책은

1917년의 파티마에서의 성모발현 사건과 그 의미를 고찰한 책이다.

 

포르투갈의 작은 마을인 파티마에서 루치아, 프란치스코, 히야친타 세 어린이에게 발현한 성모님의 이야기와 기적들,

그리고 지상의 자녀들에게 주신 메시지의 의미와 그리스도인들?소명 및 발현 후의 교회활동이 상세히 수록되었다.

 

1919년 파티마 성모 발현 당시, 세계는 서방의 물질주의와 동방의 무신론적 공산주의 대두로 인류는 큰 위험을 직면하고 있었다.

죄인들의 회개와 특히 공산주의 종주국이었던 러시아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고 보속할 것을 당부한 파티마 성모발현은

인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특별한 지혜라 아니할 수 없고, 1991년 8월 소련공산당의 붕괴는 이 발현의 의미를 더해준다고 하겠다.

 

현대인들이 인류의 어머니이신 티없으신 마리아께 대한 올바른 신심을 새롭게 하고,

마리아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와 유일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회심토록 인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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