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7주간 수요일] 포용 (마르 9,38-40)

2019. 2. 27. 오전 6:5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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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7주간 수요일] 포용 (마르 9,38-40)


집회서의 저자는, 주님께서는 지혜를 사랑하는 이들을 사랑하신다고 한다. (집회 4,11-19)
11 지혜는 자신의 아들들을 키워 주고 자신을 찾는 이들을 보살펴 준다.
12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생명을 사랑하고  이른 새벽부터 지혜를 찾는 이들은 기쁨에 넘치리라.
13 지혜를 붙드는 이는 영광을 상속받으리니  가는 곳마다 주님께서 복을 주시리라.
14 지혜를 받드는 이들은 거룩하신 분을 섬기고  주님께서는 지혜를 사랑하는 이들을 사랑하신다.
15 지혜에 순종하는 이는 민족들을 다스리고  지혜에 귀 기울이는 이는 안전하게 살리라.
16 그가 지혜를 신뢰하면 지혜를 상속받고 그의 후손들도 지혜를 얻으리라.
17 지혜는 처음에 그와 더불어 가시밭길을 걷고  그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몰고 오리라. 지혜는 그를 신뢰할 때까지 자신의 규율로 그를 단련시키고  자신의 바른 규범으로 그를 시험하리라.
18 그러고 나서 지혜는 곧 돌아와 그를 즐겁게 하고 자신의 비밀을 보여 주리라.
19 그가 탈선하면 지혜는 그를 버리고 그를 파멸의 손아귀에 넘기리라.


예수님께서는, 당신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는 이를 막지 말라며,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라고 하신다. (마르 9,38-40)
그때에 38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연중 제7주간 수요일 제1독서(집회4,11~19)


집회서 1장에서 23장 머리글 지혜 찬미 집회서의 전반부에 해당된다. 집회서 1장 1절에서 21절은 집회서 전체의 서문뿐 아니라 바로 이어지는 전반부의 서문 역할을 한다.

집회서 2장에서 23장은 지혜에 관한 첫 번째 모음집으로 지혜로운 인간의 덕목들(2장1절~4장10절), 인생의 가치(4장20절~6장17절), 사회적 삶에서의 지혜 추구(7장1절~14장19절), 종교와 교리(15장11절~23장28절)가 세 편의 작은 '지혜 찬미'(4장 11~19절; 6장 18~37절; 14장 20절~15장 10절)와 서로 교차되면서 배열되고 있다.


오늘 독서는 집회서 4장 11~19절로서 '지혜 찬미'의 내용이다.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지혜'라는 단어 대신에 '예수(그리스도)'를 넣어 묵상해도 좋다. 구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지혜' 혹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계시된다. 


인간인 내가 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생각했을 때 내 자신에 대한 깨달음(생각 혹은 인식, 지혜)가 생긴다. 그러나 이 깨달음(생각 혹은 인식, 지혜)는 불완전한 인간의 것이기에 바람처럼 휙 지나가는 지성(지능)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무한히 완전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 자신에 대해 생각을 하셨다고 가정하자. 그럴 때 이 생각(깨달음 혹은 인식, 지혜)은 너무나도 완전하여 성부 하느님과 똑같은 위격(persona)을 갖게 된다.


완전하고 충실한 표현일수록 그 본형(원형)에 가깝듯이 또 하나의 위격을 갖게 된다. 위격(persona; personality)이란 지성과 (자유)의지가 있는 실존으로서 자기 행위에 도덕적 책임을 질 수 있는 행위의 주체(subject)말한다. 그러니까 위격은 사람(인격)이상 마귀, 천사, 하느님께만 해당되는 것이다.  


여기서 생각(깨달음 혹은 인식, 지혜)는 내적인 언어이다. 생각한 것이 말로써 밖으로 표현된다.

 하느님의 생각(깨달음 혹은 인식, 지혜)하느님의 말씀이 된다. 그래서 구약에서 천주 성자는 하느님의 '지혜' 혹은 '말씀'으로 표현되고 계시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혜 찬미'의 장인 집회서 4장 11~19절에서 '지혜' 대신 '예수(그리스도)'를 넣어 묵상해도 좋은 것이다.


오늘은 집회서 4장 12절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생명을 사랑하고, 이른 새벽부터 지혜를 찾는 이들은 기쁨에 넘치리라" 는 구절을 묵상해 보자.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꾸어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은 생명을 사랑하고'가 된다.


이렇게 될 경우,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근원이시기에 모든 생명이 그로부터 발출되며 모든 생명안에 그리스도의 모습이 각인되어 있기에, 생명은 존엄하고 거룩하고 소중하며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된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런 차원에서 오늘날의 낙태와 같은 살인 문제, 어린이와 노인들의 존엄 문제, 경제적 약자와 피고용인, 여러 장애자들의 인권 문제등과 같은 생명 경시 풍조와 사상은 비판받아 마땅하고 반드시 제도적으로나 구조적으로도 시정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리고 '이른 새벽부터 지혜를 찾는 이들은 기쁨에 넘치리라'는 구절은 마치 지혜서 6장 13~16절을 연상시킨다. 

"지혜는 자기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미리 다가가 자기를 알아보게 해 준다. 

 지혜를 찾으러 일찍 일어나는 이는 수고할 필요도 없이  자기 집 문간에 앉아 있는 지혜를 발견하게 된다.

 지혜를 깊이 생각하는 것 자체가 완전한 예지이다.  지혜를 앋으려고 깨어 있는 이는 곧바로 근심이 없어진다. 

 지혜는 자기에게 맞갖은 이들을 스스로 찾아 돌아 다니고  그들이 다니는 길에서 상냥하게 모습을 드러내며  그들의 모든 생각 속에서 그들을 만나 준다."


말하자면, 우리 인생의 여정에서 홍해와 요르단 강 같은 바다가 앞에 가로막혀 있고, 예리고성과 같은 난공불락의 성벽이 앞에 버티고 있어도 시간의 주재자이신 주님, 인간 생명의 절대권을 가지신 주님께 새벽에 일찍 일어나 간절히 기도를 하고 봉헌을 하면서 맡기면, 문제가 해결되는 기도의 응답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지혜는 그렇게 고대하던 기쁨의 기도의 응답이요, 문제 해결의 마스터 키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이다.


끼리끼리의 이기주의를 넘어라

 반영억라파엘신부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9,35).라고 하시며 제자들에게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 것을 당부하시고는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공동체는 모든 것에 열려 있어야 합니다. 자신들만을 위해 똘똘 뭉친 폐쇄적인 공동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피아 집단이나 조직 폭력단도 자기들끼리는 피를 나눈 형제처럼 서로 극진히 위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우애는 자기 집단의 경계를 넘지 못합니다. 제자들의 삶은 이들과는 달리 이웃에 대한 사랑에 열려 있어야 합니다.

 

요한이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하고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막지마라.”고 이르셨습니다. 그 이유는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다고 말할 사람은 없다.”는 것이고,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비록 당신 제자의 무리에 속하지 않더라도 인간구원이라는 당신의 사명에 협조하는 사람이라면 그를 긍정적으로 여기신 것입니다. 나와 조금 다르다고 해서 그것을 막아서서는 안 됩니다.

세상은 정말 막아야 할 것은 막지 않고 도리어 막지 말아야 할 것에는 많은 제한을 두는 현실입니다. 예수님께로 향한 시선을 자신에게로 돌리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입니다.

 

인간은 편 가르기를 좋아해서, 어떤 사람이 자기편에 속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좋은 일을 해도 달갑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강합니다. ‘나는 해도 되지만 너는 하면 안 된다.’는 특권의식이나, ‘우리는 되지만 너희는 안 된다.’는 편 가르기를 합니다.

 그러나 저희를 따르는 사람인가 아닌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을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면 예수님의 일을 하는 것이고, 그것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협조하는 사람이라면, 내편 네 편 가르지 않고 존중하는 개방된 자세를 갖춰야 예수님의 참된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희”라는 것은 집단 이기주위를 낳을 수도 있고, 사실 교회는 “나”나“저희”를 따르는 공동체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을 따라야지 성직자나 수도자, 영적지도자에 매이면 불행해 질 수 있습니다.

 

각 본당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단체가 있는데 독선과 편 가르기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 본당, 저희 단체, 저희 공동체....’,성경을 공부하면서도 공부하는 방식이 다르다고 서로 편 가르기를 하는데, 이는 성경공부를 하면서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성가대는 성가대끼리, 꾸르실료는 꾸르실리스타끼리, 성령기도회는 성령기도회끼리, 빈첸시오회는 빈첸시오회끼리, 레지오 마리애는 레지오 마리애 단원끼리..등등 편을 가르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스스로 적을 만들고 울타리 안에 갇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특권을 움켜쥐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폐쇄적인 집단이어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 개방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막지 마라.”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선한 이에게나 악한 이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시는 하느님같이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 있는 사람이고 모든 이를 포용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적을 만들 것이 아니라 그를 받아들이고 그가 하는 좋은 일을 칭찬해 주는 넉넉함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을 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해야 할 형제로 보셨습니다. 우리와 생각이 다른 사람은 그야말로 미래의 고객입니다.


‘가톨릭’은 보편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있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것을 포용한다는 뜻입니다. 열린 마음으로 주님을 증거 하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큰 형님, 가톨릭교회>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세상을 향한 개방성, 세상 사람들을 향한 관대한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당시 돌아가는 상황을 예수님께 보고합니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을 팔아먹고 있습니다. 스승님의 이름으로 치유활동을 하면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는데, 그냥 둘 일이 아닌 듯합니다."


예수님의 응답은 너무도 의외의 것이었습니다. 그 응대가 너무도 관대한 것이어서 제자들이 깜짝 놀랄 지경이었습니다. 



"그냥 두어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1960년대에 있었던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이런 예수님의 세상을 향한 자기개방성을 다시 한 번 재천명했습니다. 교회는 기존의 사고방식을 말끔히 청산하자고 초대했습니다. 교회가 세상 한 가운데로 내려갈 수 있도록, 민중의 고통 속으로 더욱 깊이 침투할 수 있도록 자신을 더욱 낮추고 교회의 문을 활짝 열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했습니다.그 가장 구체적인 표시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갈라진 여러 교회 형제들-정교회, 개신교회 등-은 물론이고 타종교 지도자들까지 초대했습니다. 그리고 열린 마음으로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하였습니다. 그들과 함께 새로운 하느님 나라 건설에 협력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2차 바티칸공의회는 2000여년의 교회 역사 안에서 가장 은혜로운 대사건이었습니다. 교회의 물줄기를 완전히 새롭게 잡는 제2의 성령운동이었습니다. 진지한 자기반성을 토대로 한 제2의 교회설립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복음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쇄신운동이었습니다.

아쉽게도 그 소중하기 그지없는 역사적인 사건, 가장 은혜로운 선물인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사람들 사이에서 잊혀져가고 있습니다. 그때의 그 소중했던 자기성찰, 자기 쇄신을 위한 다짐들이 별로 읽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 소중한 결의문들이 실제 삶 안에서 적극적으로 반영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나아갈 길, 우리 교회가 살길은 다시 한 번 제2차 바티칸공의회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그 자기개방을 위한 열정, 이웃에 대한 관대한 마음에로 돌아가야 합니다.

부임하시는 곳마다 종교 간의 일치를 위한 소중한 장으로 본당을 잘 활용하시는 신부님 한 분을 알고 있습니다. 일단 새로운 임지에 부임하신 신부님께서 가장 먼저 하시는 일은 본당 구역 내 개신교 교회나 사찰 등 타종교의 지도자를 방문하는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목사님을 본당 특강에 초대하십니다. 초파일이라도 되면 아담한 난이라도 꼭 챙겨서 주지스님에게 축하의 인사를 보냅니다.



신부님의 그런 자기개방성, 타종교와의 일치를 위한 자기낮춤은 즉시 본당구역 내 타종교 지도자들에게 긍정적인 측면의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그들 역시 타종교에 대한 관대한 마음을 지니게 만들고, 모든 종교인들이 지역발전을 위해 합심하게 하는 너무나도 바람직한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교회의 큰형 격인 가톨릭교회의 신자로서 이웃 개신교도들에게 보다 큰마음을 보여주면 좋겠습니다. 타종교 신자들에게도 거부감을 지니지 말며 먼저 다가서는 우리, 먼저 손길을 내미는 관대한 마음의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어떤 낯모르는 악령 추방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었는데, 그 사람이 제자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기에 제자들이 그 사람을 막으려 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악령을 쫓아낸 그 사람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적을 행할 수 있었을 것인데, 제자들에게는 그 사실보다는 그 사람이 자기들 가운데 하나인가 아닌가가 더 중요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 사람을 막지 말라고 하시며,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이, 그리고 당신을 고백하는 모든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열린 마음을 지녀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예수님을 반대하여 원하지 않는 사람 말고는 모든 사람에게 문을 열어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열린 마음은 단순히 교회 밖의 사람들과 맺는 관계에서만 요구되는 것은 아닙니다.

공동체 안에서도 서로 열린 마음으로 받아 주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전혀 뜻하지 않은 사람을 통해서, 때로는 내가 원하지 않는 사람을 통해서도 당신의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라는 좋은 표현도 치우쳐서 잘못 적용하면, ‘너희’와 맞서는 표현이 되고, 편이 갈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고백하는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 하나 됨은 모든 사람이 똑같아야 한다는 획일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양함 가운데에서 하나를 지향하고, 그 지향점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사랑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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