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 요한 20,19-31

2009. 4. 23. 오후 3: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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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9일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 요한 20,19-31 

         

 “평화가 너희와 함께”


<3초에 한번 씩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다른 아이들에 비해 체중이 현저하게 미달되는 아이, 늘 이런저런 잔병에 시달리는 병약한 아이가 한 소아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다정다감하고, 친절한 소아과 전문의는 다른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아이의 입원기록부에 크고 뚜렷한 글씨로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이 아이는 세 시간마다 한 번씩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한번은 ‘비행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부모님들과의 관계에서 겪게 되는 어려움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적어보라고 했습니다.


   폭언, 무시, 구타, 음주, 무능력, 무관심, 애정결핍...


   많은 가슴 아픈 내용들이 적혀있었습니다.


   결국 요약해서 결론을 내려 보니 ‘성실성의 부족’이었습니다. ‘지속성의 결핍’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부모가 자기가 낳은 자식을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문제는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이란 것이 한 두 번 하고 끝내는 것이 절대 아니지 않습니까?


   진정한 사랑은 머나먼 여행길을 걷는 것입니다. 오래 오래 두고두고 쌓아나가는 것입니다. ‘문제 부모님’들이 지닌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사랑의 연속성 부족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 주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우리 인간과는 철저하게도 다르십니다. 우리 각자를 향한 그분의 사랑과 자비는 한결같으십니다.


   우리가 당신을 떠났다고 해서 우리를 향한 당신의 자비심을 거두어들이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몹쓸 죄를 지었다고 해서 우리를 향한 당신 자비의 손길을 끊어버리지 않으십니다.


   그저 늘 한결같으십니다. 미우나 고우나,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끊임없이 당신 자비의 마음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신께 지은 죄가 아무리 크다 해도 하느님 당신의 자비 앞에서는 ‘쨉’도 안 됩니다.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이 짓는 죄가 태산같이 높다 해도 하느님 당신 자비의 뜨거운 불 앞에 눈처럼 녹아버립니다.


   세 시간마다가 아니라 3초에 한 번씩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일 년에 한번 우리의 축일이나 생일에만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라 매순간 지속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이 우리에게 크나큰 자비를 지속적으로 보내신다는 가장 뚜렷한 표시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MARIA FAUSTYNA KOWALSKA (1905-1938)
vergine, delle Suore della Beata Vergine Maria della Misericordia

성녀 마리아 파우스티나 코발스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2000년 4월 하느님 자비의 사도로 잘 알려진 마리아 파우스티나 수녀를 성인품에 올리면서 특별히 하느님 자비를 기릴 것을 당부한 데 이어 그해 5월 교령을 통해 2001년부터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지내도록 선포했다. 교황이 파우스티나 수녀를 새천년기 첫 성인으로 선포한 것은 파우스티나 수녀가 대변하는 자비야말로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덕목이라는 판단에서다.

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 이 말씀에서 우리는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에서와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에서의

믿음의 의미는 전혀 다른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앞 문장에서 사용한 믿음의 의미는 사실 믿음이라기보다는

단지 ‘사실을 인정하는 행위’라고 하는 편이 훨씬 나을 것입니다.

토마스 사도처럼 실제로 못 자국이 있는

예수님의 손바닥과 상처 난 옆구리를 눈으로 직접 보고서

부활하신 주님을 확인한 경우에는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확인’하였거나 ‘ 알아차린’것이라고 할 수 있을 따름이지,

결코 믿게 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인식의 결과일 뿐이지

믿음의 결과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에서의

믿음이란 진정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믿음의 의미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때의 믿음은 감각과 지각의 영역을 넘어선

순수한 믿음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시면서

이때의 부활은 순수한 믿음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어쩌면 오늘날 주님께서 오감을 통해 우리를 찾아오지 않으시는 까닭은

우리가 진정한 믿음으로써 당신을 알아보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곧, 우리 눈앞에 당신이 나타나시거나

실제로 당신의 목소리를 우리가 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나타나신다면

우리는 이미 믿음의 대상으로서가 아닌

인식의 대상으로밖에 주님을 대하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진정한 믿음을 통하여 당신을 알아볼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이러한 이유로, 보지 않고도 주님을 알아보는 사람이 행복한 것입니다.

................... † ....................

믿는다는 것은 아는 것과 다릅니다.

1+1=2라는 사실은 믿는다고 말하지 않고 안다고 말합니다

 이미 증명이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사실로 증명이 되지 않았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렇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말이 진실인지 또는 처음 보는 장사꾼이 정직한지는

그냥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때 믿는다는 표현을 씁니다.

믿음은 확률을 가지고 계산하는 것도 아닙니다.

경마에서 그 말의 성적이 평소에 좋았기 때문에

우승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니고 계산을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이런 계산과 같은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언가를 믿기 위해서 증거를 요구합니다.

자기에게는 특별히 잘 해 주시기를 원하고

때로는 기적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토마 사도의 모습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도 예수께 꾸중을 듣습니다.

 예수께서 직접 눈앞에 나타나셨을 때

그는 부끄러워 고개도 들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떤 모습일까요?

주님을 믿기로 결심했으니 내 계산과 다르더라도 항구하게 따라갑시다.

................... † ....................

기 도

주님,
저희의 인생여정에는
힘들고 따분하고 어려운 일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지치고 좌절할 때마다 저희는
쉽게 주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주님께 탓을 돌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죄송스러운 것은
주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가톨릭성가 131번 / 찬미 노래 드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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