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4주간토요일] 가엾은 마음 (마르6,30~34)
(홍)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바오로 미키 성인은 1564년 무렵 일본 오사카 인근의 도쿠시마에서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예수회 소속의 대학을 졸업한 뒤 수사가 된 그는 열정적으로 복음을 선포하여 대단한 결실을 거두었다. 그러나 바오로 미키 수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박해 때 25명의 동료들과 함께 붙잡혀 1597년 나가사키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였다. 1862년 그를 비롯한 동료 순교자들이 시성되었다.
임금이 된 솔로몬은 기브온의 산당에서 꿈에 하느님을 뵙는데, 하느님께서 그에게 무엇을 바라느냐고 물으시자, 그는 하느님의 백성을 통치하기 위한 “듣는 마음”을 청한다. 그의 선택은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다. 하느님께서는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그에게 주시고 부와 명예도 주신다.(열왕상 3,4-13)
그 무렵 솔로몬이 4 제사를 드리러 기브온에 갔다. 그곳이 큰 산당이었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그 제단 위에서 번제물을 천 마리씩 바치곤 하였다. 5 이 기브온에서 주님께서는 한밤중 꿈에 솔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느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셨다.
6 솔로몬이 대답하였다. “주님께서는 당신 종인 제 아버지 다윗에게 큰 자애를 베푸셨습니다. 그것은 그가 당신 앞에서 진실하고 의롭고 올곧은 마음으로 걸었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는 그에게 그토록 큰 자애를 내리시어, 오늘 이렇게 그의 왕좌에 앉을 아들까지 주셨습니다. 7 그런데 주 저의 하느님, 당신께서는 당신 종을 제 아버지 다윗을 이어 임금으로 세우셨습니다만, 저는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아서 백성을 이끄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 8 당신 종은 당신께서 뽑으신 백성, 그 수가 너무 많아 셀 수도 헤아릴 수도 없는 당신 백성 가운데에 있습니다. 9 그러니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어느 누가 이렇게 큰 당신 백성을 통치할 수 있겠습니까?”
10 솔로몬이 이렇게 청한 것이 주님 보시기에 좋았다. 11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것을 청하였으니, 곧 자신을 위해 장수를 청하지도 않고, 자신을 위해 부를 청하지도 않고, 네 원수들의 목숨을 청하지도 않고, 그 대신 이처럼 옳은 것을 가려내는 분별력을 청하였으니, 12 자, 내가 네 말대로 해 주겠다. 이제 너에게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준다. 너 같은 사람은 네 앞에도 없었고, 너 같은 사람은 네 뒤에도 다시 나오지 않을 것이다. 13 또한 나는 네가 청하지 않은 것, 곧 부와 명예도 너에게 준다. 네 일생 동안 임금들 가운데 너 같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시편 119(118),9.10.11.12.13.14(◎ 12ㄴ)
◎ 주님, 저에게 당신 규범 가르치소서.
○ 젊은이가 어떻게 제 길을 깨끗이 가리이까? 오로지 당신 말씀 지키는 것이옵니다. ◎
○ 제 마음 다하여 당신을 찾나이다. 당신 계명 떠나 헤매지 않게 하소서. ◎
○ 행여 당신께 죄를 지을세라, 마음 깊이 당신 말씀 간직하나이다. ◎
○ 주님, 당신은 찬미받으소서. 저에게 당신 규범 가르치소서. ◎
○ 당신 입에서 나온 모든 법규, 제 입술로 이야기하나이다. ◎
○ 온갖 재산 다 얻은 듯, 당신 법의 길 걸으며 기뻐하나이다. ◎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고 병자들을 고쳐 준 다음 예수님께 돌아오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외딴곳에서 쉬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앞서 달려가 그분을 찾는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엾게 여기신다.(마르코 6,30-34)
그때에 30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3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32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33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3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토요일 제1독서 (1열왕3,4-13)
2월 6일 토요일 복음(마르6,30~3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34)
여기서 '목자'로 번역된 '포이메나'(poimena; a shepherd)는 '포이멘'(poimen; 1베드2,25)의 목적격 단수이다. 신약에서 '포이멘'(poimen)이 여기처럼 단수형으로 사용되는 경우는 거의 다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마태26,31; 히브13,20).
하지만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목자'는 예수님처럼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진정한 지도자를 뜻한다. 당시 군중들을 인도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 즉 당시에 존경받던 랍비들이나 말씀을 가르친 율법학자들은 참된 의미의 목자가 아니었다.
마르코 복음 6장 34절(ㄴ)에서 동사 두 개가 하나는 직설법으로 쓰였고, 다른 하나는 분사로 쓰였다.
'목자 없는'의 '없는'에 분사로 쓰인 '에콘타'(echonta; having)의 시제는 현재이며, '같았기 때문이다'의 '같았기'에 직설법으로 쓰인 동사 '에산'(esan; they were)의 시제는 미완료 과거이다.
이것은 벳사이다 들판에 몰려든 큰 군중들이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지속적으로'목자 없는 양들 같은 삶', 즉 참된 영적 지도자를 만나지 못한 채 목적없이 방황하는 삶을 살아 왔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그들에게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은 더더욱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군중들에 대한 예수님의 애끓는 감정을 묘사한 단어가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이다.
여기서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에 해당하는 '에스플랑크니스테'(esplangchnisthe; was moved with compassion)의 원형 '스프랑크니조마이'(splagchnizomai)는 '창자' 혹은 '내장'을 의미하는 '스플렌'(splen)에서 유래했다.
당시 사람들은 인간의 마음이 내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으며, 그래서 이 용어는 인간의 감정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
특히 사랑이 전제되어 상대에 대해 주체할 수 없는 애끓는 '측은지심'(연민의 정; 동정심)의 마음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마태9,36).
이것은 이 용어가 루카 복음 15장 20절에서 집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돌아오는 아들이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아들임을 알아채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는 아버지가 가졌던 마음을 묘사하는 데도 사용되었다는 점에서도 잘 나타난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도 바로 이같은 도무지 주체할 수 없는 애끓는 사랑의 마음이 불타올랐기 때문이다.
복음 선교와 선행과 치유의 밑바닥에는 이같은 측은지심이 깔려 있어야 하고, 전제되고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목자 없는 양들 같은, 군중에 대한 측은지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신다.
여기서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의 '가르쳐 주기'에 해당하는 '디다스케인'(didaskein; to teach; teaching)은 현재형으로서, 그 가르침이 쉬지 않고 계속 베풀어지고 있었음을 나타낸다(마르6,35).
그리고 본문과 병행 구절인 루카 복음 9장 11절에서 이 가르침이 '하느님 나라'에 관한 것임을 말해 주고 있으며, 여기 마르코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목자로서의 첫번째 행위가 '가르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병행 구절인 마태오 복음 14장 14절에서는 병자들을 고쳐 주신 것으로 되어 있고, 루카 복음 9장 11절에서는 말씀과 치유가 둘 다 언급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목자로서 자신을 찾아온 가엾은 양들에게 영적 양식과 육적 회복을 다 베푸셨던 것이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송영진 모세 신부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마르 6,30-32)."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떠났던 사도들이 돌아와서 자기들의 활동 성과를 보고합니다.
그들의 활동은 대체로 성공적이었던 것 같습니다(마르 6,12-13). 그러나 고생도 많이 했을 것이고, 박해도 받았을 것입니다.
또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들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쳐 주면서 '영적 힘'을 모두 소진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돌아왔을 때에는 모두 지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도들과 함께 계실 때에나 혼자 계실 때에나 항상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이' 바쁘게 일하셨습니다(마르 3,20; 6,31).
그래서 사도들은 돌아와서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사도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쉬다.' 라는 말은, 단순히 아무 일도 안 하면서 가만히 있는 것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느님 안에서 새 힘을 얻는 것을 뜻합니다.
('주일'은 '노는' 날이 아닙니다. '몸만 쉬는' 날도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적 힘'을 얻는 날입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서 저절로 그 힘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기도와 묵상과 사랑 실천을 통해서 그 힘을 얻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주일에 '영적 힘'을 얻기는커녕 세속적으로 놀기만 하다가
다른 날보다 더 힘을 잃고 있습니다.)
'외딴곳'은 단순히 사람들이 없는 곳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는 일에 집중할 수 있는 곳'을 뜻합니다.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니까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지만, 우리 인간은 여러 가지로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느님을 만나는 일에 집중할 수 있는 곳이 필요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데리고 외딴곳으로 가신 일은(마르 6,32) 사람들을 버리신 일이 아니라 사도들을 새 힘으로 충전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상 사람들에게 더 많은 것을 주기 위한 일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예수님과 사도들을 따라옵니다(마르 6,33).
그래서 사도들은 겉으로는 제대로 쉬지 못하고 일을 하게 되는데,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군중을 가르치실 때(마르 6,34) 제자들도 그 가르침을 듣고 있었을 것이고, 그 시간이 그들에게는 '쉬는 시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즉 군중과 함께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으면서 '새 힘'(영적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마르 6,33-34)."
사람들 가운데에는 병을 고치기를 원해서 온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가르침을 듣기를 원해서 온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단순히 호기심 때문에 온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그들은 모두 '목자 없는 양들'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목자 없는 양들'은 목자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굶주림과 병의 위험, 그리고 다른 짐승들의 위협 속에 놓여 있는 양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처지가 목자 없는 양들 같다는 것을 모르고 계셨다가 몰려든 사람들을 보시고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신 것은(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들이 모두 목자 없는 양들처럼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사람들의 상태를 알고 계셨습니다.
또 몰려든 사람들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고 되어 있는데, 전에는 가엾은 마음이 없었다가 그때 처음으로 가엾은 마음이 드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사람들을 가엾게 여기셨기 때문에 세상에 오셨습니다.
즉, 세상에 오시기 전부터 사람들을 가엾게 여기셨습니다. 지금 말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은 '인류 전체'를 뜻합니다.
여기서 "목자 없는 양들 같다." 라는 말은 목자가 있는데도 목자 없는 양들처럼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목자이신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을 떠나신 적이 없습니다.
인간들 쪽에서 하느님을 떠나서 살거나, 하느님을 모르거나, 하느님을 잊어버리면서 스스로 목자 없는 양들처럼 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라는 말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셨고,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을 가르쳐 주셨고, 목자가 '길 잃은 양들'을 찾고 있음을 깨우쳐 주셨다는 뜻입니다.
이 가르침을 듣고, 믿고,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면 '목자와 함께 사는 양'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여전히 '목자를 떠나 있는 양'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이 이야기 뒤에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 이상의 군중을 먹이는 기적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빵의 기적'도 '목자이신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도 가르치셨고, '기적'으로도 가르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임금을 하느님과 자기들 사이의 중재자로 생각하여, 하느님께서는 임금을 통하여 당신 백성을 다스리시고, 임금은 하느님의 도구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또한 적어도 오늘 독서의 말씀에 따르면, 솔로몬은 자신이 계승한 왕직을 개인적인 특권이 아니라, 주님의 백성을 위한 봉사직으로 이해하여 참된 권위는 하느님께 속한 백성을 섬기는 데 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정치 지도자들이 눈여겨 살펴보아야 할 부분입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여러 가지 일에 분주한 사람들이, 일에 매몰되어 하느님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경계하라는 뜻으로 자주 인용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자기들이 한 일에 대하여 한참 늘어놓고 싶어 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그런 이야기는 덮어 두게 하시지요. 그런데 복음을 끝까지 잘 읽어 보면 결말은 예상과 다르게 납니다. 제자들도 예수님도 결국은 쉬지 못하십니다. 외딴곳으로 갔는데 거기에도 군중이 있었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도 그들을 가르치십니다.
제자들과 함께 쉬려고 하신 예수님을 다시 움직이게 한 것은, 어쩌면 군중의 그 간절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배를 타고 떠나간 길을 육로로 호숫가를 돌아 달려서 앞서 가려면, 얼마나 급히 서둘렀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떠나가시는 것을 잠시도 견디지 못하고 “앞서” 그분께서 오실 곳에 달려가 있는 그러한 간절한 마음이라면, 조용히 쉬려고 하신 예수님의 발목을 붙잡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군중의 간절한 마음을 바라보며 감탄하는 우리에게도, 생명의 말씀을 지니신(요한 6,68 참조)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자 세상 끝까지라도 먼저 달려가려는 그러한 목마름이 과연 있는 것일까 자문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