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제5주간월.설날 ]깨어있는 삶 (루카 12,35-40)
오늘은 음력으로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설입니다. 우리 고유의 명절인 오늘 우리는 조상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면서, 올 한 해를 위하여 하느님의 은혜를 간구합니다. 시작이며 마침이신 하느님께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을 맡겨 드리며, 순간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에 의탁합시다.
민수기에서는 사제가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는지를 알려 준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복을 내리시며 당신 얼굴을 비추어 주시고 평화를 주시기를 기원한다.(민수기 6,22-27)
22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23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일러라. ‘너희는 이렇게 말하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축복하여라.
24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25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26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27 그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시편 90(89),2와 4.5-6.12-13.14와 16(◎ 17ㄱ)
◎ 주 하느님의 어지심을 저희 위에 내리소서.
○ 산들이 솟기 전에, 땅이며 누리가 생기기 전에, 영원에서 영원까지 당신은 하느님이시옵니다.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한 토막 밤과도 같사옵니다. ◎
○ 당신이 그들을 쓸어 내시니, 그들은 아침에 든 선잠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 같사옵니다. 아침에 돋아나 푸르렀다가,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리나이다. ◎
○ 저희 날수를 헤아리도록 가르치소서. 저희 마음이 슬기를 얻으리이다. 돌아오소서, 주님, 언제까지리이까? 당신 종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
○ 아침에 당신 자애로 저희를 채워 주소서. 저희는 날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 당신 하신 일을 당신 종들에게, 당신 영광을 그 자손들 위에 드러내소서. ◎
야고보 사도는 앞일을 계획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내일 일을 미리 알지 못하며 모든 일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점을 일깨워 준다. 우리는 우리 삶의 모든 계획을 주님께 맡겨 드려야 한다.(야고보 4,13-15)
사랑하는 여러분, 13 자 이제, “오늘이나 내일 어느 어느 고을에 가서 일 년 동안 그곳에서 지내며 장사를 하여 돈을 벌겠다.” 하고 말하는 여러분! 14 그렇지만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15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오실 날이 언제인지 알 수 없으니 언제라도 잘 준비된 모습으로 그분의 오심을 맞이할 수 있도록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신다.(루카 12,35-4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5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36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37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38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39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40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2월 8일 월요일 설 제1독서 (민수6,22-27)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24)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로 번역한 '예바레크카'(yebarekka)는 기본 어근 '빠라크'(barak)의 강조 능동형 미완료 '예바레크'(yebarek)에 남성 3인칭 단수 접미어 '카'(ka)가 결합된 형태이다.
그런데 '카'(ka)를 직역하면 '그대(너)를' 이며, 따라서 미완료형이 사용된 본문은 '그대를 계속해서 복주옵소서' 라는 뜻이다. 이처럼 본문에서는 주님께서 계속해서 그대(너)에게 복을 내리시기를 바란다는 강한 희구형 어법이 사용되었다.
한편, 구약 성경에서 말하는 복(blessing)도 신약 성경처럼 영적인 측면을 전제하고 있지만, '소유'(신명28,4), '소유와 성공'(욥기42,12), '번성과 번영'(창세24,1), '소유와 생산'(신명33,24), '생산과 건강, 장수'(레위26,4) 등과 같은 현실적 행복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로 번역한 '웨이쉬메레카'(yeishmereka)에서 기본 어근 '샤마르'(shamar)의 일차적 의미는 '지키다'(창세18,19),'살피다'(시편37,37)이다. 이 의미가 발전하여 '조심스럽게 주의를 기울이다','주의하여 돌보다'는 의미의 '살피다', '감찰하다'(시편130,3), '지키다','보살피다'(잠언2,8)란 뜻이 되었다.
본문의 '지킨다'의 표현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들을 항상 살펴보시며 악의 세력으로부터 지켜 주실 뿐만 아니라(시편37,28) 여러 가지 질병이나 재해로부터 보호해 주실 것을(시편76,4) 의미한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지키심과 보호하심은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그들은 출애굽 이후 광야 생활을 하면서 각종 전쟁의 위험과 질병들 그리고 여러 가지 재해의 위험에 항상 노출되어 있었기에 하느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단 하루도 온전하게 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25)
'비추시고'에 해당하는 '야에르'(yaer)의 원형 '오르'(or)는 '비추다'(시편77,19; 97,4),'밝아지다'(창세44,3) 란 뜻이다.
그런데 이 '오르'(or)가 본문처럼 사역형으로 사용될 때는 단순히 어둠을 빛으로 밝힌다는 의미 뿐만 아니라 무지했던 삶에서 새로운 삶으로 일깨우고, 절망과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 자를 새로운 희망의 길로 인도한다는 의미도 지닌다.
한편 순수한 영이시기에 형체가 없으신 하느님께서는 '얼굴'(phanim; 파님)이 없으시다. 따라서 본문은 인간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하느님을 인간의 모습에 비유하여 묘사한 표현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얼굴'은 가시적인 형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신실하신 성품이 당신 백성을 향한다는 것을 상징한다.
즉 이것은 당신 백성을 보호하기 위한 하느님의 특별하신 관심과 남다른 애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로 번역된 '위훈네카'(yihunneka)에서 기본 어근 '하난'(hanan)은 아카드어 '총애를 베풀다'라는 뜻의 '에네누'(enenu)나 '동정심을 느끼다'라는 뜻의 아라비아어 '한나'(hanna)등과 동일한 어원을 갖는 단어이다.
따라서 '하난'(hanan)은 '자비를 베풀다','불쌍히 여기다'(2사무12,22; 신명7,2)라는 뜻으로 은혜를 받을 만한 권리가 전혀없는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는 행위를 의미한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26)
'들어 보이시고'에 해당하는 '잇사'(issa)의 원형 '나사'(nasa)는 '들어올리다'(에제3,14),'높이다'(시편93,3)란 뜻이다. '나사'(nasa)가 '얼굴'을 뜻하는 '파님'(phanim)과 함께 쓰일 때에는 관용적으로 '스스로 자기의 얼굴을 들다','기쁨과 확신에 찬 모습으로 주목하다' 란 뜻이 있다.
본문은 당신 백성의 죄를 사해 주신 하느님께서 기쁜 마음으로 당신 백성들을 주목하실 것임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한편 동일한 의미의 민수기 6장 25절의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와 비교해 보면, 동사만 다르게 쓰인 것을 알 수 있다.
민수기 6장 25절의 동사 '야예르'(yaer)의 원형 '오르'(or)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느님 애정의 감정적 표현인 반면에, 민수기 6장 26절의 '들어 보이시고'에 해당하는 '잇사'(issa)의 원형 '나사'(nasa)는 하느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의 적극적인 행위가 반영된 표현임을 알 수 있다.
한편 히브리어 구약 성경에 약 236회 나타나는 '샬롬'(shallom)은 약 50회가 전쟁없는'평화'(레위26,6)를 의미한다. 그리고 약 25회 정도가 단순히 인사말로 사용되었고(판관19,20;1사무25,6), 나머지 약 2/3가 평화의 계약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민수25,12; 이사54,10; 에제34,25).
'평화의 계약'(berit shallom; 베릿트 샬롬)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창세15,15)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맺어졌다(1열왕5,12). 그런데 하느님과 맺어진 평화의 계약은 하느님의 현존과 임재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는 완전한 충족의 상태를 의미한다(말라2,5).
민수기 6장 26절은 사제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기쁨과 평화와 형통을 누리기를 기원하는 것이므로 '평화의 계약'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27)
'그들이 이렇게 ~ 복을 내리겠다'라고 번역된 '웨사무'(yesamu)의 원형 '숨'(sum)은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특정한 곳에 '배치하다', '놓다'(2열왕4,29)란 뜻이다. 원문을 직역하면,'그리고 그들은 내 이름을 둘것이다'(And they shall put my name)이다.
그러나 새 성경은 하느님의 이름을 가지게 되는 자가 하느님의 복을 얻는 자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여 '내 이름을 두다'를 '내 이름을 축복하다','내 이름을 부르면 축복하겠다'라고 의역했다.
한편 누구의 이름을 둔다는 것은 곧 그의 소유(2사무12,28)가 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사제로부터 '나의 이름'(삐세미; bishemi) 즉 '주님의 이름'(뻬셈 예흐와; beshem yehwa)으로 복을 받는 사람은 사제의 소유가 아닌,이름의 주인인 주님의 소유가 되는 것이다(이사63,19).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로 번역된 '알 뻬네 이스라엘'(al bene israel)을 직역하면 '이스라엘 자손들의 위에'(upon the children of Israel)이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민족 위에 복을 내리시는 것은 그들의 민족성이 우수하거나 혹은 그들이 남달리 하느님을 향한 신앙심이 두터웠기 때문이 아니었다(신명7,7). 다만 이스라엘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 때문이었다.
그 사랑으로 하느님께서는 그들 위에 은혜를 베푸셔서 일찍이 이스라엘 민족의 족장들과 계약을 맺으시고(창세12,1-3; 15,13-16) 그 계약을 지키셨던 것이다(신명7,8-11).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로 번역된 '아바라켐'(abarakem)에 '나'라는 뜻의 1인칭 단수 접미어가 포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가리키는 독립된 대명사 '나'(ani ;아니)를 또 기록하였다.
이것은 주님께서 친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을 주실 것임을 강조하여 표현하는 것으로 축복은 사제에 의해 선포되지만,복을 집행하는 주체는 주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강하게 표출하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아바라켐'이 미완료형으로 사용된 것은 하느님께서 앞으로 계속해서 복을 베푸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설 복음 (루카12,35-40)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35~36)
루카 복음 12장 35절에서부터 38절까지는 깨어 주인을 기다리는 종들의 비유인데, 루카 복음 12장 35절에는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자세와 관련해서 두 가지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로, 허리에 띠를 매고 있는 모습이다.
'페리에조스메나이'(periezosmenai; girded about)는 '띠를 매다'는 뜻의 동사 '페리존뉘미'(perizonnymi)의 완료 수동태로서 '이미 허리에 띠가 매여져 있는 상태'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허리띠를 지금 당장 매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맬 것도 아니며, 이미 허리띠를 맨 상태에서 현재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이 입었던 겉옷은 길고, 그 통이 넓은 것이었다. 따라서 일을 할 때나 여행을 하거나 전쟁을 수행할 때에는 겉옷을 허리띠로 졸라 매야만 했다.
여기서 종들이 허리에 띠를 맨 이유는 문맥상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맞을 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즉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하느님의 백성들도 혹시라도 나태해져 방심하지 말고, 하느님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하며 깨어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항상 준비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등불을 켜 놓은 상태로 있어야 함을 보여준다.
'켜 놓고'로 번역된 '카이오메노이'(kaiomenoi; burnning)는 '불을 켜다'는 뜻의 동사 '카이오'(kaio)의 현재 분사 수동태로서 '계속적으로 불이 켜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여기서 등불을 켜 놓고 있는 목적은 어두워진 이후에도 계속 일을 하며 기다리던 주인을 맞아들이기 위한 것이다(마태25,1~13). 따라서 본문은 주님이 언제 오실지라도,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성실히 감당하고, 항상 깨어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사람이 될 것을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있어라'에 해당하는 '에스토산'(estosan; let be)은 '에이미'(eimi; be) 동사의 현재 명령형 3인칭 단수로서 '계속적으로 있어라'는 뜻이다.
여기서 '에이미'(eimi)동사는 '있다' 또는 '존재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어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는 상태를 계속 유지하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 동사가 여기서 현재형으로 사용된 것은 이러한 상태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께서 언제 다시 오실 지는 아무도 모르므로, 하느님의 백성은 늘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혼인 잔치'로 번역된 '가몬'(gamon; wedding banquet)의 기본형 '가모스'(gamos)는 혼인 잔치 자체를 가리킨다.
당시 유대인들의 혼인 잔치는 주로 밤중에 이루어졌기에, 그 주인이 혼인 잔치로부터 돌아올 때는 모든 사람이 잠든 시간이 되므로, 그 종들은 잠들지 말고 깨어 있어라는 교훈을 주기에 적절한 배경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이러한 배경 설정의 이유만이 아니라, '혼인 잔치'는 천상에서의 기쁨과 영광의 혼인 잔치를(묵시19,9), '그 주인'은 재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혼인 잔치의 집'은 하늘 옥좌를 암시함으로써, 종말론적인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한 목적도 있다고 본다.
그리고 '돌아오는'으로 번역된 '아날뤼세'(analyse; he will return)의 기본형 '아날뤼오'(analyo)는 '풀다'는 뜻에서 발전하여 '떠나기 위해 천막을 걷거나 배의 닻줄을 푼다'는 점에서 '떠나다','출발하다'는 뜻도 갖는다.
여기서는 혼인 잔치 집을 떠난 것을 가리키며, 이것은 앞으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주님으로 오셔서, 온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하늘 옥좌를 떠나 내려오실 것을 상징하고 있다.
<신앙인의 복, 행복>송영진 모세 신부
어린 시절에는 나이를 한 살
더 먹게 되면 기뻐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나이를 먹는 것이 두려워지고 서글퍼지는 시기가 옵니다.
그런 나이가 되면,
나이를 먹은
것에 대해서 축하보다는 위로를 받고 싶어 할 사람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갈 때가 가까워진다는 뜻이고,
그렇다면 두려워할 일도 아니고 서글프게 생각할 일도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입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를 늘 두렵게 합니다.
(하느님께 "아직 준비가 덜 되었으니 좀 더 뒤로 미루어
주십시오."
라고 누가 감히 말씀드릴 수 있을까?)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루카
12,35-36)."
이 말씀은 '주님의 재림'이
언제 이루어질지 알 수 없으니
잘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허리에 띠를 매고 있는 것과 등불을 켜 놓고 있는
것은
오시는 주님을 잘 맞이하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서는 '혼인 잔치' 라는 말에 특별한 뜻이
없습니다.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음을 강조하기 위한 설정일 뿐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지상의 생애를 마치고 주님 앞으로
가는 상황에 대한 가르침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바꿔서 생각한다면,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는 것은 주님
앞으로 갈 준비를 뜻하는 말이 됩니다.
('죽을 준비'가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 준비'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언제
이루어질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지금의 인생을 마치고 주님 앞으로 갈 날이 언제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우리는 주님께서 부르시면 즉시 응답할 수 있도록
평소에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두려워하면서 억지로 응답할 것인가,
아니면 기뻐하면서 응답할 것인가?)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루카 12,37)."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밤늦게
돌아온 주인이 식탁에 앉으면,
기다리고 있던 종이 그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정반대 상황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인이 종을 식탁에 앉히고 시중을 드는 것은,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종의 모습을 보고 크게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기쁨'에 대한 보답으로 '기쁨'을 주려고 하는 것.
그렇게 하는 것이 주인의 의무는 아닙니다.
또 종에게는 그렇게
하라고 주인에게 요구할 권리가 없습니다.
종은 "저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루카 17,10).
그러나 주인은 그에게 "착하고 성실한
종아!
...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라고 말할 것입니다(마태 25,21).
(준비가 잘 되어 있는
신앙인은 주님과 함께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종처럼 시중을 들어 주시는 것, 그래서 주님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것,
그
'행복'은 신앙인이 받아 누릴 수 있는 '복' 가운데 최고의 '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침을 더욱
생생하게 하시려고 주인과 종의 관계로 표현하셨지만,
하느님과 우리는 아버지와 자녀이고,
예수님과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벗'입니다(요한 15,13-15).
(명령하고 복종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지금 말하고 있는 주인의
기쁨은,
단순히 종이 말을 잘 들어서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정도의 작은 즐거움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아서
행복해지는, 그런 큰 기쁨입니다.
종의 입장에서 생각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인이 무서운 사람이어서
졸린 것을 억지로 참고 기다렸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인을
사랑하고, 주인이 보고 싶어서 기다리고,
주인이 돌아온 것을 정말로 기뻐하는 종입니다.
(지옥에 가는 것이 무서워서 억지로 하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주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 자체가 기뻐서 하는 신앙생활...)
예수님께서는 재물에 관해서
말씀하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세속의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어라.
그러면 재물이 없어질 때에 너희는 영접을
받으며
영원한 집으로 들어 갈 것이다(루카 16,9.공동번역)."
"세속의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어라." 라는 말씀은,
재물에
집착하지 말고 선행과 사랑을 실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렇게 한 사람은 물질적으로는 '빈손'이 되겠지만,
'영접'을 받으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순교자 스테파노는 그
'영접'을 직접 목격하고 증언했습니다.
스테파노는 순교 직전에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사도 7,56)." 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스테파노를 영접하기 위해서
마중 나오신 것을 보고
있다는 증언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충실한
종에 관한 말씀 바로 뒤에,
불충실한 종들에게 경고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루카 12,45-48).
충실한 신앙인은 가족으로서(또는
벗으로서) 주님과 함께 기쁨을 나누게 되지만,
불충실한 신앙인은 엄한 벌을 받게 됩니다.
심판은 주님의
권한입니다.
그러나 사실 심판 때의 운명은 우리 자신이 만드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그때를 대비하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행복만 희망하고 추구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그때를 대비하는
'지혜'입니다.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문화를 지닌 나라들에서는, 언어 표현 안에 신앙이 녹아 있는 경우들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으면서 별 뜻 없이 되풀이하는 말일지는 몰라도, 낯선 외국인에게는 매우 인상적으로 다가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오늘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주님께서 원하시면”이라는 표현입니다. 어떤 언어에서는 이 구절을 습관처럼 문장 중간에 넣곤 합니다. 언젠가 게시판에 다음 날 회의가 있다는 공지가 붙었는데, 약자로 ‘D.M.’(Dios Mediante: 스페인어)이라고 기재한 다음, 이어서 몇 시에 모인다는 안내문이 붙었습니다. 이 약자는 “하느님의 중재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라는 뜻이었습니다.
큰일도 아니고 다음 날 공동체가 모여서 늘 해 오던 회의를 위하여 모이는 것이었지만, 이 한 구절을 덧붙이는 것은 우리 삶의 크고 작은 일들이 우리가 계획하고 노력하는 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음을 기억하려는 의도인 것 같습니다. 갑자기 우리의 계획에 커다란 차질이 빚어질 때, 지금 우리가 계획하고 염원하는 대로 한 해가 풀려 나가지 않고 뜻밖에 다른 방향으로 상황이 전개되어 나아갈 때에도, 우리의 믿음은 그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알아보는 혜안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지난 한 해도 분명 우리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풀려 나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 삶의 모든 순간에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의 길을 인도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올리는 작은 소망과 계획이 주님 안에서 성취되기를 기원합니다. 또한 금년 한 해도 열심히 노력하면서 꿈을 실현해 나가되, 그 결과는 주님께 맡겨 드리도록 합시다
盡人事而待天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