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여전히 귀신들이 판치는 세상....어쩌리~

2015. 4. 12. 오후 4:00:31

글자

 

아직도 여전히 귀신들이 판치는 세상....어쩌리~

마태8:28~34(막5:1~20; 눅8:26~39비교 참조)

대마왕의 지령을 받았는지.... 생명을 한꺼번에 몰사시키는 귀신병 짓거리들이 여기저기서 한겨울에 수도관 터지듯 발생하고 있습니다. 바알세불의 졸개노릇을 하는 패잔병들이 마지막으로 발악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파괴적 귀신에게 사로잡힌 병자들이 판치며 나대는 장면들을 보는 것 같은 형국이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이제 막 피어난 꽃 같은 생명들이 제대로 된 탈출노력이나 방어노력도 하지 못한 채 맥없이 스러져갔다는 소식들을 연이어 들으면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울분만 터트릴 수밖에 없는 ‘인간존재의 허약한 한계’에 맞닥뜨린 채, 이천 년 전에 더러운 귀신들을 박멸하신 복음서의 바로 그 예수께 소망을 두고 ‘마라나타’를 외치면서.... 마태복음 저자의 말씀을 통해 소망을 가져봅니다.

 

문학적으로 작업된 본문 

예수께서 드디어 갈릴리 바다를 건너 맞은편에 있는 가다라 지방에 도착하셨습니다. 이 경로를 지도상에 표시하여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이동한 동선(動線)을 나타내면 가버나움에서(8:5) 맞은편 지역으로 옮긴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럴 경우 옮겨간 지역은 가버나움처럼 갈릴리 호수에 접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가버나움 맞은편 지역에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 가다라 지역은 갈릴리 호수와 접해 있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그만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지도를 보는 순간 가다라 지역은 가버나움처럼 갈릴리 호숫가에 있지 않고 내륙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가다라는 갈릴리 호수의 동남쪽 방향 8km 정도에 있는 지역입니다. 그러므로 갈릴리 호수에서 볼 때 가다라 지방은 가버나움과는 달리 바다(갈릴리 호수)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장소가 됩니다.

이때 우리는 본문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음을 곧 알 수 있게 됩니다. 돼지 떼가 바다에 빠져 몰사했다는 말은 8km나 떨어져 있는 갈릴리 호수까지 내달려가 빠져죽었다는 뜻이 되는데 그럴 경우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했다(32절)’ 묘사에 잘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갈릴리 호수가 바로 옆이라는 그림을 전제한 묘사이기에 그렇습니다.

이에 대해 돼지 떼가 8km를 내리달려 온 후 달리던 속도를 제어하지 못해 그대로 비탈로 내달려 갈릴리 바다(호수)에 빠져 죽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겠느냐고 질문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보기가 어렵습니다. 돼지 떼를 치던 자들이 시내에 들어갔다는 표현과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았다는 묘사는(33절~34절) 갈릴리 호수가 바로 가까이에 있음을 전제합니다. 그러므로 가다라 지방에서의 귀신축출 이적사건은 지리적으로 갈릴리 호수와의 연관성에서는 별로 적절하지 않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더욱 난처한 다른 기록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보면 더욱 난처해집니다. 마가복음에는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이라고 되어 있고(5:1) 누가복음에는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이라고 되어 있습니다(8:26). 갈릴리 호수에서 볼 때 거라사는 가다라 지방보다도 더 내륙 깊숙이 들어가 있습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남동방향으로 가다라 지방보다 5배 정도 더 먼 거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시속 60km의 속도로 달린다고 가정할 경우 거의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해당합니다. 그 지방 주변에는 결코 ‘바다’라고 불릴 만한 거대호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거라사’ 지방이 마치 호숫가에 접해 있는 가버나움처럼 갈릴리 호수 남동방향의 호숫가에 있는 지역이라고 보기에는 대단히 큰 무리가 따릅니다.

 

복음서들의 공통입장-이방지역 깊숙한 곳에서 귀신을 박멸하신 예수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지리적 묘사를 통해 나타나는 신학을 보아야 합니다. 부인할 수 없게도 그 사건은 ‘이방지역’에서 발생한 사건이었음이 강조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방지역 “깊숙한 곳에서” 귀신추방사건이 발생했다는 점이 부각됩니다. 그와 아울러 갈릴리와 데가볼리,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예수에 대한 태도가 비교됨도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갈릴리호수를 건너시기 전, 예수 따름과 관련된 내용이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와는 다르게 이방지역인 가다라, 혹은 거라사에서는 예수께 ‘떠나라’고 했습니다(18절~22절↔34절 →막5:17; 눅8:37참조). 마태복음이 보여주는 장면에 의하면 “예수 따름”의 분위기와 “예수 배척”의 분위기가 뚜렷하게 대조됩니다.

마태복음은 거라사를 갈릴리 호수에 좀 더 가까이 있는 가다라 지방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렇지만 갈릴리호수를 건너기 전, 가버나움 지역에서 나타났던 예수에 대한 반응과는 완전히 다르게 가다라 지방의 사람들은 예수를 싸늘하게 대했습니다. ‘예수 따름’과 ‘예수 배척’이라는 차가운 대조가 명백하게 나타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다 예수를 배척한 것도 아니고 모두가 다 예수를 영접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한 사람들은 예수를 영접했거나 긍정적이었던 반면에 기사와 이적을 보면서도 자신이 직접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것임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를 배척했거나 부정적이었습니다.

 

   
▲ 거라사의 광인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 

예수께서 갈릴릴 바다(호수)를 건너 가다라 지방에 도착하셨을 때 귀신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왔습니다. 죽음의 세계 속에서 살던 무덤 사이의 귀신이 예수를 만났던 겁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께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라고 묻습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당연하게도 ‘그렇다’ 이지요.

마태복음에 의하면 귀신들도 자신의 때를 압니다. 귀신의 세력이 완전히 멸망당할 때를 알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귀신의 세력이 멸망되기 전에, 귀신의 때가 아직 남아 있는 시점인데 이미 예수께서 오셨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마태복음을 대하는 독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께서는 귀신들이 생각하고 있던 때보다 일찍 오셔서 귀신들의 세력을 추방하시기 시작했다는 뜻이 됩니다.

미리 오신 예수, 그것은 예수께서 전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입니다. 죽음의 세력 안에서 인생을 몰락시키는데 여념이 없었던 귀신들이 쫓겨나기 시작했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 나라는 벌써 건설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본문을 읽는 독자들은 알게 됩니다.
 


생명과의 만남 vs 죽음을 향한 떠남 

우리는 여기서 마태복음이 보유하고 있는 문학적 틀을 하나 보게 됩니다. 귀신들은 예수를 만나자 떠나야 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는 그 지역 사람들을 만나자 떠나야 했습니다. “만남과 떠남”의 틀입니다.

하지만 어떤 만남과 어떤 떠남이냐의 차이가 중요합니다. 귀신과 예수의 만남은 ‘죽음 및 질병의 세력’과 ‘치유와 회복을 주는 생명의 세력’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이 만남에서 죽음 및 질병의 세력은 추방되어 생명의 세력이 승리하였음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생명을 원치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와 가다라 지방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예수께서는 떠나셔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세력을 받아들이지 않고 떠나보낸 인간들의 죽음지향성 텃세를 보여줍니다. 생명을 거절하는 인간존재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생명을 위해 오신 예수를 거절하는 사람들, 마태복음 저자에 따르면 생명을 거절할 경우 남은 것은 오직 죽음뿐입니다. 본문은 그에 대해 명백한 뒷 그림을 그려 줍니다. 


문법적으로 맞지 않는 표현: (단수형 주어)돼지 떼가 (복수형 동사)몰사했다? 

생명의 능력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본 귀신들은 난데없이 돼지 떼에게 들여보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들에게로 들어갔습니다(32a). 그 순간 모든 돼지들이 물에 빠져 몰사하는 놀라운 현상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32b).

일반적으로 돼지 떼가 몰사했다는 표현은 떼를 이루고 있던 모든 돼지들이 다 죽은 것을 가리키는 말로 생각하게 합니다. 그런데 헬라어 본문에 의하면 생각을 좀 달리 하게 됩니다. 갑자기 문장의 성분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내내 단수형의 주어가 나타나다가 ‘몰사하다’는 말이 복수형 동사로 바뀌었습니다. 이를 우리말로 표현한다면 ‘온 떼(단수형)가 내리달아 물에서 몰사들 했다(복수형)’고 기술할 수 있습니다. 내용적으로는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문법적으로 적절하지 않습니다. 단수형의 주어에 복수형의 동사가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문법적으로 볼 때 이 문장은 “돼지 떼와 함께 귀신들이 같이 몰사들 했다”는 뜻을 가진 군집명사형 문장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물론 이런 문법은 헬라어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 문장은 단수 형태로 나타나는 ‘돼지 떼’와 함께 그 돼지에게로 들어간 귀신들이 같이 “몰사들 했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문법적인 비논리가 해결되기 때문에 ‘돼지 떼’ 안으로 들어간 귀신들도 같이 죽었다고 보게 하는 문장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귀신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그러면 우리는 즉시 문제를 제기할 수 있지요? 귀신이 죽는다구요? 귀신이 죽어? 귀신도 영인데 영이 죽는단 말씀입니까? 마태복음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예수로 인해 귀신들이 죽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돼지는 부정한 짐승입니다(레11:7). 부정한 짐승들과 함께 죽어야 할 존재들은 부정한 존재로서의 귀신들입니다. 무덤에서 살면서 인생에게 죽음의 위협과 질병과 정상적이지 못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악의 권세, 죽음의 권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단지 추방당하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부정한 짐승들이 갈릴리 호수에 빠져 죽으므로 돼지의 시체들이 바다에 둥둥 떠다니게 된 것처럼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와 질병과 죽음의 권세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당연하게도 마태복음이 전하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이미 부활하신 그리스도라는 고백이 전제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에서 일으킴을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귀신들을 추방하는 것은 곧 죽음의 권세가 그 세력을 잃어가고 있는 중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세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은 다른 표현으로 말하면 죽어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귀신들은 단순히 쫓겨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부정한 짐승과 함께 죽어가기 시작한 겁니다. 악의 권세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죽음의 권세가 그 세력을 잃어가고 있는 중이란 뜻이지요.

이와 관련하여 바울의 표현을 빌려 표현하면 ‘죽음이 생명에게 삼켜지고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죽음이 생명의 삼킨바 되는 것이지요(고전15:54; 고후5:4). 그러다가 사망이 생명에게 완전히 먹히면 사망 자체가 죽어 없어져버리게 되는 겁니다(사25:8참조). “사망이 죽어 없어져 생명만 남는 상황”이 생기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곧 바람과 바다를 꾸짖는 하나님, 그 분이 육신으로 오셔서 귀신을 추방하므로 나타내신 생명의 승리입니다. 따라서 마태복음에 나타나는 “부정한 돼지와 함께 죽어나가는 귀신표상”은 죽음의 세력을 생명으로 삼켜서 없애 버리시는 하나님의 생명행동을 적시하는 표현입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저자가 말하는 신학, 그리스도론입니다!

 

귀신이 죽어나가는 시대를 살면서 귀신의 잔당노릇을 하는 사람들

그렇다면 마태복음이 저술된 때로부터 2000년이 지난 지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귀신들이 쇠퇴하고 있고 질병의 권세가 쪼그라들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죽음의 세력마저도 그 권세가 쇠약해지고 있음이 느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리스도인들답지 못하게 바울이 마태복음 이전에 벌써 지적했던 대로 초등학문으로 되돌아가기를 힘쓰는 한심한 그리스도인들이 넘치도록 존재하고 있습니다(갈4:9~10; 골2:20~23참조). 그러니 이런 허약해빠진 그리스도인들을 무서워하지 않는 패잔병 같은 귀신들이 나대며 판을 쳐는 것 아니겠습니까?

대한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서 여러 다양한 직분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봉사한다고 하면서도 조금만 힘든 일이 있거나 앞날에 대해 불안을 느끼면 귀신의 영을 찾아가 ‘점’을 본답니다. ‘점보러 오는 사람의 40% 정도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고백은 점치는 이들이 말해서 알려진 사실입니다. 더구나 요즘에는 대형교회 앞에도 버젓이 광고깃발이 꽂힌답니다.

 

“예수만으로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즉시 우리에게 오라. 우리가 넉넉히 해결해 주마.”  이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신랑으로 두었으면서 다른 신랑을 찾아다니는 바람난 짓거리를 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자들이 귀신과 함께 동거하는 형국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구약은 혼합된 더러움을 원천적으로 방지하기 위하여 그런 바람난 짓을 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투석형으로 조치하도록 규정했습니다(출22:18; 레20:27; 신18:10~11).

구약이 그렇게 강경한 입장을 보이는 것은 영적 탈선행위로 말미암은 ‘생명파괴’를 막기 위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은 구약의 강경한 입장을 단지 종교적인 배타성의 시각으로만 볼 일이 아닙니다.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고 보호하여 하나님께 받은 생명이 사망에게 패퇴당하지 않도록 처방하여 내린 단호한 신앙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어이없는 집단적 생명파괴 현상이 없는 복스런 세상을 꿈꾸며

귀신박멸 작업을 이미 2,000년 전에 시작하신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바알세불의 패잔병 귀신노릇을 하는 것 같은 분통터지는 사건들 대신..., 눈물이 감도는 흐뭇한 감동의 상황들을 발생시키는 하나님의 나라를 연이어 계속 경험하고 확인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감격을 같이 누리는 복스런 세상을.... ‘마라나타’로 소망해 봅니다. 외마디 비명소리로 끝나는 메아리가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박경은

 

감신대및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신학박사(신약학)학위를 취득했다. 성서신학의 현장화를 추구하며 한책의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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