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기적, 믿으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서에 나타나는 수많은
기적들에 대한 이야기는 예수께서 활동하시던 때에 발생했던 사건들을 시간순서에 따라 기록해 놓은 기적일지가 아닙니다. 성서의 모든 기적사건들은
후세에 전달만 하려고 기록된 내용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서에 기록된 모든 기적사건들은 철저히 해석되어야 합니다.
그에 따라 우리는 성서에서 어떤 기적사건을 만나면 그 기적사건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본문에 나타나는 기적사건을 통해 본문을 기록한 저자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기적사건이 있으므로 인해 무슨
결과가 나타났다는 것인지 등등에 대해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서의 기적사건들은 ‘믿으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여 의미를 찾으라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별로 독특할 것 없는 성서본문의
기적사건들
일반적으로 성서본문을 읽을 때 기적사건들을
만나면 기적을 일으키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경이로움을 느끼면서, 그리고 예수께서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셨다는 권능에 대해 탄복하면서 기적
이야기들을 읽게 됩니다. 하지만 성서에 기적사건들이 기록된 이유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에 탄복하면서 그것을 ‘믿으라’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무엇보다도 먼저 성서에 기록된 기적사건들의 유일성, 독특성, 특별성에 대한 인상을 포기해야 합니다.
성서본문에 기록된 기적사건들은 구약성서의 경우 아버지 하나님께서, 신약성서의 경우 아들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특별히 일으키신 세상의 유일한 이적들이라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면 그 이적들의 독특성, 또는 특별성에 더 한층
감격하게 되고 그에 따라 믿음이 대단히 공고해질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극히 실망스럽게도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기적사건들보다 더
크게 생각되는 내용들, 혹은 비슷한 이야기들이 흔하게 유포되어 있었습니다.
수많은 이적들 중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민감한 치유이적의 예를 들면 수많은 환자들을 치유했다는
치유이적 이야기들은 흔하디흔한 여러 이적들 중의 한 부류에 속할 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가 발흥하던 시기의 로마제국 안에는 이미 크게 유행하던
치유의 신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익히 잘 아는 히포크라테스(기원전 5세기 중반)와도 연관 있는 치유의 신에 대한 이야기인데
아스클레피우스의 치유이적 관련 사건들이 그에 해당합니다.
예수의 치유이적 이야기보다 더 유명한 아스클레피우스의 치유이적 이야기
아스클레피우스와 연관된 치유이적
사건에 관한 이야기들은 현재 세계보건기구의 로고를 볼 때 그 영향력이 어떠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계보건기구의 로고를 보면 뱀이 지팡이를
휘감고 있는 형상이 그려져 있고 이런 마크는 미국 의사협회 로고에도 나타납니다. 따라서 뱀이 지팡이를 휘감고 올라가 있는 로고의 상징은 치유와
연관되므로 병원과 약국을 표시하는 심볼로 사용됩니다.
아스클레피우스는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최고의 신으로 나타나는 제우스의 손자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제우스의 아들인 아폴론으로 이야기되므로 아스클레피우스는 치료하는 신-인 존재였던 셈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와 구약의 창세기로부터 영향을 받아
뱀을 사탄으로 연결시켜 뱀에 대한 인상이 매우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뱀은 치유와 연관된 우호적인 파충류로 이해됩니다. 아스클레피우스의
치유사건과 밀접하게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아스클레피우스가 건강한 뱀이 병든 뱀을 치유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신기하게도 병든 뱀을 위하여 건강한 뱀이 무슨 잎사귀를 물어다가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목격한 아스클레피우스는 그로부터 약초개념을 갖고 치유에 사용되어 상처를 아물게 하고 병을 낫게 하는 약을 개발하게
됩니다.
나아가 뱀이 허물을 벗으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보고 죽음과 부활의 개념을 도입하여 뱀을 통한 치유, 재생, 회복의 관념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뱀을 치유의 심볼로 사용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치유이적을 비롯한
세상사 수많은 이적들은 예수께서 활동하시던 수백 년 이전부터, 그리고 예수께서 활동하시던 무렵 그때 그 당시의 다른 지역에서도 흔하게
발생되었으며 이야기되었던 내용들이므로 성서에 나타나는 기적 이야기들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고 신기할 것도 전혀 없는 흔한 현상들에 속한
이야기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서의 기적이야기들은 저자의 신학적 의도를 파악하라고 있는 것
그런데 왜 성서에는 예수께서
일으키신 이적사건들이 마치 독특한 이적인 것처럼, 세상에서 유일무이하게 발생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성서에 기록된 이적사건이
사건자체로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기록한 성서저자의 믿음, 성저저자가 전하고 싶은 말씀이 들어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혹은 그 이적사건이 성서저자가 전하고 싶은 신학을 담기에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이 되어 저자는 본문에 기록된 이적사건을 선택하였고 선택한 이적사건을 그냥 그대로 기록만 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주어진 문학적
재능을 한껏 발휘하여 문학적 작업이 가해진 현재형태의 종교문학 작품으로 만든 본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에 맨 먼저 일으키신 기적사건이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있었던 ‘물이 포도주가 된 이적사건’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요한복음 저자에 의한 기록이기 때문에 모든 복음서 저자들이
동의하고 있다고 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더구나 요한복음 저자는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치유이적’을 ‘두 번째 표적’이라고
했는데(4:54) 마가복음에는 이 내용이 나타나지 않으며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매우 비슷하지만 결코 똑같지 않게’ 기록하고
있습니다(마8:5~13; 눅7:1~10).
이를 두고 이
기적들은 모두 예수께서 일으키신 각각 서로 다른 이적들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서로 다른 각각의 세 이적이 모두 ‘가버나움’에서
발생한 것이 되는데 과연 그렇게 볼 수 있을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건이 서로 다르게 변형되어 기록되었다고 이해해야
하는데 바로 여기서 ‘모든 이적사건은 해석되어야만 한다’는 필연성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믿으라고 있는 기적
이야기가 해석하라고 있는 기적사건: 해석해야 하는 필연성
다른 복음서들은 요한복음에서처럼 ‘이것은 첫 번째 표적’이라는 식의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마가복음은 예수께서 행하신 수많은 이적들 중에서 가장 먼저 귀신을 추방한 사건을 자세히 언급하고 있습니다(1:21~28). 누가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4:31~37). 그런데 이와는 달리 마태복음 저자는 예수께서 행하신 이적들 중에 가장 먼저 나환자 치유사건을 자세히
기록하였습니다(8:1~4). 이것이 ‘성서본문의 이적사건들은 저마다 목적을 지니고 채택되어 기록되었다’고 보아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성서의 여러 이적 이야기들은 사실을
사실대로 기록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기적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면서 기적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적은
지금도 여전히 삶의 현장 속에서 얼마든지 발생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성서의 기적 이야기들이 아무런
과정도 거치지 않고, 아무런 변함도 없이, 있었던 사실 그대로 기록된 것이라고 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전달되는 이야기의 특성상 기적 이야기들도 전달되는 과정 안에서 변형되었을 것이 분명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야기의 의미가 달라지기도 했을 것이 확실하며 저자가 본문에 기적사건을 기록할 때에는 저자의 입장에서 선별하여 채택한 후에 편집 작업을
하는 등의 문학적 작업을 틀림없이 가했습니다(요20:30~31 참조). 따라서 당연하게도 본문에 나타나는 기적사건들은 모두 “해석”되어야만
합니다. 왜 지금의 형태와 내용으로 기록한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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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렘브란트 - "갈릴리 바다의 풍랑"(1632) | ||
풍랑을 잔잔케 하신 기적사건에
담긴 마태복음 저자의 신학
그에
따라 풍랑을 잔잔케 하신 이적사건도 이적자체를 믿으라고 할 것이 아니라 해석되어야 할 대상으로 삼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럴 때 저자가
전해주려는 ‘말씀’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파악하고 깨달아 알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풍랑을 잔잔케 하신 이적사건은 “삼인칭 전지적 작가시점”에서 기록되었습니다. 그것은 마태복음 저자가
기적이 발생하던 바로 그 자리에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우기 마태복음 저자는 예수께서 활동하시던 당시의 사람이 아니라 적어도 예수께서
공생애를 마치신 이후 50여년 이상의 시간이 흐른 후세대 사람이기에 기적을 직접 목격한 후 자신의 목격담을 기록하는 방식으로 본문을 기록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저자는 예수께서 풍랑을 잔잔케 하신 이적사건을 제 3자의 관점에서 기록했다고 말하는 겁니다.
마태복음 저자가 전하는 내용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말씀하시고 “일어나셔서” 바람과 바다를 향해 뭐라시며 꾸짖으셨습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는
표현은 명확하게 기록했는데 뭐라고 말씀하시면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말이 없습니다. 어쨌든 꾸짖음을 들은 바람과 바다가
갑자기 잔잔해졌습니다. 성질부리면서 팔팔대던 녀석이 아버지가 소리 한 번 지르자 꼬리를 싸~악- 내리고 얌전해진 것 같은 모습이 그려집니다.
이때 예수께서는 ‘이런 기적도 행하셨네’라면서 그대로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마태복음 저자가 독자들에게 주길 원하는 말씀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을 내내
‘제자들’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갑자기 ‘그 사람들’이라고 표현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제자들을 가리키는 말일 것으로 생각하면서 슬쩍 넘어가면 안 됩니다. 만일 ‘그 사람들’이 배 안에 있는 제자들을 가리킨다면 굳이 ‘그
사람들’이라고 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배에 오른 사람들이 ‘제자들’로 되어 있고(23절) 배에 위험이 닥쳤을 때 ‘그 제자들’이 예수를
깨웠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25절) ‘그들’이라고 해야 어색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람과 바다가 아주 잔잔해지자 ‘그들이’ 놀라 말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놀라
말했습니다.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놀라서 말한 주체’가 누구인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표현입니다. 마태복음 저자는 왜 ‘그들이
놀랐다’라고 하지 않고 ‘그 사람들이 놀랐다’라고 했을까요? 아마도 제자들을 포함한 ‘무리(18절)’를 이루고 있던 사람들을 가리켜 말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이 사건은 배에
올랐을 때 위기를 당한 때가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서였다고 생각할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읽어 보아도 배에 오른 후 어느 정도의
시간적 간격이 있었다고 볼 만한 틈새가 없습니다.
이 내용을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사건(14:22~33)과 비교해 보면 ‘배에 위기가 닥친 시간’에 대한 이해의 차이가 금방 나타납니다.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사건의 경우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했다(14:24)’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지리적인 거리가 상당히 떨어지게 되었다는 표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이 배를 탄 후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하게
됩니다(14:23).
거기에
더하여 제자들은 예수께서 타지 않은 채 자기들끼리 배를 타고 ‘ 밤 사경’이라는 시간을 맞고 있는 중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14:25).
그러므로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사건의 경우 제자들이 탄 배에 위기가 닥친 것은 배가 출발하여 무리와 떨어진지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였다고
자연스럽게 생각하도록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의 경우는 매우 다릅니다. 배를 타고 시간이 얼마쯤 지났다는 표현도 없고 바닷가에서 상당한 거리가 떨어졌을 때 당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단서가 될 만한 어휘도 없습니다. 단순히 예수와 제자들이 배에 올랐는데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위기를 맞게 되었다고 기록됐습니다(24절).
그에 따라 본문을 읽는 독자들은 예수와 함께 같은 배에 탄
제자들이 당한 좌초의 위기는 아직도 해변에서 많은 무리들이 다 보고 있는 앞에서 벌어진 고난이었다는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됩니다. 해변가의
무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가물거릴 만큼 되기 전에, 그러나 배에 위기가 닥쳤을 때 배를 빠져나와 수영하여 해변가로 올 수 있을 만한 상황도 아닌
거리에서 벌어졌던 일이었다고 생각하도록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내용을 한 폭의 풍경화로 그린다면 제자들이 갑자기 당하게 된 위기를 해변에 있는
무리들이 매우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낼 수 있을 겁니다. 예수와 제자들이 탄 배가 방금 떠나 아직도 충분히 알아 볼 수 있는
눈앞에 있는 중인데 갑자기 배를 뒤집어 놓을 듯 하는 큰 놀이 일어난 겁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는 해변가의
사람들은 놀라서 손에 땀이 흐르도록 긴장하고 배를 주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지요. 그런 중에 배에 오르신 예수의 모습이 안 보이다가
다시 모습이 보였고 그와 거의 동시에 느닷없이 발생했던 큰 놀과 바람이 아주 잔잔해졌다는 장면이 연상되는 겁니다.
이런 일련의 상황을 해변가에서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 그리고 배
안에서 직접 예수의 모습을 목격한 제자들이 모두 함께 ‘놀랍게 여겼다’고 표현하기 위하여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말하였다’고 기술한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만일 ‘그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배 안의 제자들을 가리키는 것에 한정한다면 위에서 지적한 대로 ‘그들’이라고 해야 적절합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저자는 그렇게 하지 않고 분명히 ‘그 사람들’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람과 바다가 잔잔해진 것을 목격한 사람들의 범위를 말하는 것인데 이런 상황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은 단지 배 안의 제자들만이 아니라 아직도 바닷가에 남아서 출발한지 얼마 안 된 배를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 모두가 다 포함된다는 것을
가리켜 말하는 문학적 표현이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저자는 마치
해변가의 무리들과 배안의 제자들을 동시에 보고 있는 것처럼 기술하고 있으며 어떤 말들을 주고받았는지를 마치 옆에서 들은 것처럼 기록하고 있으므로
이것을 “삼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이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의 정체: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이와 같은 일련의 표현들은
마태복음이 전하는 예수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에 밀접하게 연관됩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단순한 ‘인자(사람의 아들)’가
아닙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단순히 ‘신의 아들’이 아니라 예고된 메시아로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입니다. 이를 위해 마태복음 저자는 ‘일어나셨다’는 표현을 수동태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수동태이므로 ‘일으킴을 받으셨다’입니다.
‘일으킴을 받으셨다?’.... 이것은 부활하신 예수의 모습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배 안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하시는 예수는 부활의 그리스도라는 묘사가 됩니다. 당연하게도 이 사건을 전하는
마태복음 저자는 다시 오마 약속하시고 부활승천하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후세대 사람이기 때문에 이와 같이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바로 이 지점에서 마태복음이 목소리를 높여 주장하는 교훈이 매우
분명해집니다. 부활하신 예수와 함께 있는 예수 따르미들의 믿음은 요나보다 더 큰 이의 두려움 모르는 평안함으로 무장된 믿음이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어떤 위기상황이 삶을 덮친다고 할지라도 아무렇지도 않게,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 평안함으로 둘러싸인 믿음, 그런 믿음을 가질 때
비로소 만난을 해결해 내는 큰 믿음이 된다는 말씀인 겁니다.
‘인자’예수의 정체: 예수는 하나님 자신!
또 마태복음에 의하면 지금 배
안에 계신 ‘사람의 아들’인 예수께서는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습니다. 그렇지만 ‘아들 예수는 아버지 하나님보다 격이 떨어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가리켜 하나님으로 보도록 인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에 의하면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잔잔하게 하시는 분은 오직 야웨 하나님 자신뿐이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만이 그 분의 피조물인 바람과 바다를 향해 명령을 하실 수 있습니다. 명령을 하신다는 것은 통치권을 행사하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지배자라는 의미가 되지요. 구약에 의하면 바다를 지배하시는 진정한 지배자는 바다를 친히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뿐입니다(시65:7;
89:9; 107:29; 74:13; 106:9참조).
그런데
예수께서 바람과 바다를 향해 잘못을 책망하는 것처럼 꾸짖으셨습니다. 보기만 해도 겁이 덜컥 나지 않을 수 없는 거대한 파도를 일으키고 있는
바다마저도 한마디의 꾸짖으심에 지배당하는 장엄한 분의 위엄이 그대로 묻어나는 분위기가 그려집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태복음 저자의 강력한 신학적 의도를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인자(사람의 아들)가 아니라 예수 자신이 곧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저자가 선포하는
말씀
이런 신학이 담긴 이적사건은
마태복음 저자에 의해 기록된 내용이므로 마태복음을 기록한 저자의 시간위치가 어디쯤인지를 알면 본문해석에 더욱 유익합니다. 위에서 잠깐 언급한
대로 마태복음 저자는 예수께서 부활승천 하신 이후 50여년 이상의 시간이 흐른 후세대에 복음서를 기록했습니다.
그때 그는 이미 부활하신 예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쓴 본문 안에 ‘부활하신 예수’의 모습이 전제되어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런 일입니다. 마태복음 저자는 이미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그리스도, 오시리라고 약속되었던 바로 그 메시아’라는 믿음을 고백하는 신앙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풍랑 속의 배 안에서
태연히 ‘주무시는 예수’의 모습을 삼인칭 시점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해줍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말하면 ‘설교자의 시점’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의심할 수 없게도 마태복음 저자는 자기 자신이 봤던 예수 그리스도의 행동 그 자체를 전달하는 입장이 아니라 자신의 신앙고백을 담아
예수를 전하는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마태복음 저자는 풍랑을
잔잔케 하신 이적사건을 통해 예수 따르미들은 세상풍파를 어떻게 이기며 나가야 할지에 대해 숙고하면서 믿음으로 결단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그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 부활하신 임마누엘의 하나님과 함께 하시므로 다음과 같은 은혜가 경험됩니다.
임마누엘이신 주께서 함께 하는 삶은 어떤 일을 당해도 결코 침몰하지 않습니다. 주께서 아무리 주무시고
계시다고 할지라도 주와 함께 하는 공동체는 부서지지 않습니다. 죽음에서 일으키심을 받은 예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을 갖고만 있으면 풍랑같은 인생문제를 해결하는
것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작은 믿음은 있으나마나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문제에 부딪혔을 때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는 믿음이라면 그런 믿음은 없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라면 그 믿음이 아무리 작더라도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있다면 무슨 문제를 만났든지 무엇보다도 아무런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그럴 때 풍랑을 잔잔케 할 수 있는 믿음의 권세가 나타나 닥친 위기를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풍랑을 잔잔케 하신 이적사건을
통해 마태복음 저자가 믿음의 사람들에게 전하는 하나님의 뜻으로서 믿음의 사람들이 “가져야 할 믿음”의 정체입니다. 하지만 인생에 풍파가 닥쳤을
때 두려움부터 앞서고 담대한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면 그런 믿음은 결과적으로 있으나마나한 믿음입니다.
야고보서의 표현을 빌려 말한다면 그런 믿음은
‘죽은 믿음’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한다면 그런 믿음은 백날 가지고 있어봐야 헛것이기
때문입니다.
살아 역사하는 믿음, 삶을 그대로 수장시켜 버릴 것
같은 거대한 풍랑 같은 삶의 문제 앞에서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믿음, 나아가 그런 인생의 풍랑을 잔잔케 할 수 있는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에 대한 설명이 바로 마태복음 저자가 전하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