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을 가로지르는 황금률 [黃金律, Golden Rule]

2015. 3. 29. 오후 7:54:50

글자

 

황금률 (마태7,12 ) 
12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31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루카 6,31)


이해가 좀 난해합니다. 남이 나에게 해주기를 바라는대로 해주는것이  과연 율법서와 예언서의 정신인가?
율법은 모세오경의 가르침의 골자로 이해되며  예언서라 함은 구약의 3대예언서는 이사야, 예레미야, 에제키엘이라고 봅니다. 구약을 통털어 하시는 골자라는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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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란?   이정임(kr3217

참으로 감사한 질문입니다. 그동안 제가 공부하며 이해하고 있는 내용을 통해
나눔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출처는 없습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에 대한 올바를 이해가 없이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소화시키기는 조금 어렵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은 무엇인가?

가장 먼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탈출을 시키시고 광야의
여정 중에 모세를 통해 10계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십계명은 분명 선물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국 행복의 길이기에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을 잘 지키고 살면 나도 남도 모두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기에 선물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행복의 계명을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은
해야하는 규정 248가지와 해서는 안 되는 규정 365가지로 세분화 시켜 그것을
지키면 의인이고 지키지 못하면 죄인이라고 못 박아 버렸습니다.

그럼으로써 결국 백성들은 모두 죄인의 길을 걷는 꼴이 되었고 사랑의 선물로
받은 계명은 올가미가 되어 사람의 삶을 더욱 힘들게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의 계명에 대한 왜곡된 해석이 자아낸 실상인 것입니다.


또한 예언서의 정신이란 무엇인가?
예언자들이 줄곧 외쳐대던 내용이 무엇이었나를 이해하시면 좋을 것입니다.
곧 하느님의 마음을 올바로 알아 듣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자는 것입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하느님의 뜻과 다르게 자신들의 생각이
중심이 되어 살았기에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행복할 수 있다고 회개하라는 메세지가 예언서의 정신인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으로 이해한 내용을 정리하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란
바로 이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자!
하느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사랑도 내 중심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가르쳐 주는 사랑은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곧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몸을 바쳐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의 정신이 바로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보시지 않으시고 우리들을 보시고 사랑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로오가 말씀하시듯이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정신이 바로 남이 바라는 그대로 해 주는 사랑인 것입니다.

 

이정임님(kr3217)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결국 남이 바라는 대로의 사랑이란 예수님의 기도에서 잘 나타납니다.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참 정신은 아닐까 합니다.
결국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을 왜곡되이 해석하고 살아가는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하느님께서 율법을 왜 주셨는지 예언자들이 그토록 목터지게 외친 속 뜻은 무엇인지를 올바로 깨달으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을 이웃을 위해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지켰다고 보여 집니다. 자신이 의인이 되기 위해서 지킨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은 내가 의인이 되고자 해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  곧 사랑을 살아내면 의인으로 인정 받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자기 자신이 율법을 잘 지켜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시고 계시다고 느껴집니다.  
그동안 공부를 해 오면서 느낀 것은 성경의 말씀을 물론 일반 대중을 위해서 하신 말씀이기는 하지만 사실 성경이 쓰여지는 그 시기에는 누구를 상대로 이 말씀들을 했을까를 묵상해 보았습니다. 유다인들은 특히나 종교 지도자들의 역활이 굉장히 컸던 민족이고 그 종교 지도자들을 잘 깨우쳐 가르치면 그 종교 지도자들이 일반 민중들을 교육하였기 때문에 보통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하시는 말씀으로 들으면 이해가 좀 더 쉬웠습니다. 하느님의 마음(뜻)을 자기들 맘대로 왜곡하며 가르치던 종교 지도자들에게 그것이 아니라고 예수님께서 올바로 가르치시는 것으로 이해를 하니 복음서의 말씀들이 좀 더 쉽게 다가왔습니다. 현대야 인쇄술의 발달로 성경을 누구나 가지고 읽고 묵상하지만 옛날에는 그러지 못했다고 배웠습니다. 학교가 그렇듯이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올바로 배웠으면 그 밑에서 배우는 학생들은 올바로 배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김종업님(rlawhddjq)  다시한번 추가로 여쭙습니다. 마태7,12에 "그러므로~"라고 하십니다. 저는 여기에 중점을 두고 질문을 드려봤습니다.  '그러므로'란 그러니까. 다시말해서. 결론적으로~~~뭐 이런뜻이 아닐까 해 봅니다.... 그렇다면 분명 황금률에 관한 '답'내지는 '연결'은 앞에 7장1절부터 쭉 연관된듯하고요.더 나아가서는 5장초입에 산상설교를 풀어 해설하는듯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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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노 형제님께서 정확하게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5장 이하 산상설교로 유다인 종교 지도자들에게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삶인지를 가르쳐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므로"라는 말씀은 그 모든 말씀의 결론이
맞습니다.

당시 바라시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은 어떤 삶을 살았는가하면,
마치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처럼 되려고 했던 그 모습을
살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실 어떤 사람이 의인이고 죄인인지는 하느님만이 판단하실 영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들이 세분화시킨 613가지의 규정을
잘 지키면 의인이고 지키지 못하면 죄인이라고 심판을 해 버리고만 것입니다.
자신들이 하느님처럼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살라고 하느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계명을 잘 지키면 누가 행복합니까?
모두 행복합니다. 그런데 당시 현실은 어땠습니까?
바로 이 모습을 꼬집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말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마태 23,3-5)

하느님께서 율법을 주시고 예언자들을 보내신 이유는 율법과 예언서의
참 정신을 깨달아 모두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종교 지도자들이 하느님의 뜻을 왜곡하는 바람에 율법과 예언자들이
걸림돌이 되고 짐이 되고 그럼으로써 행복해야 할 인생이 그것으로 인해
비참하게 꼬여 버린 것입니다. 그들이 예언자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그러므로"라고 하시며 "너희 종교 지도자들아, 너희들 지금까지
살던 그 방식은 내가 너희에게 바라고 원하는 삶의 방식이 아니란다.
너희들이 원하는 지금까지 살았던 그 방식이 아니라 이웃이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야 한단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사랑을 하며 삽니다. 문제는 내가 원하고 내 방식대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진정한 사랑은
내가 원하고 내 방식대로의 사랑이 아니라 상대가 원하는 방식으로
해야 진정한 사랑이라는 사실입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도 하느님을 무척 사랑했습니다. 오늘날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 흉내도 내지 못할 만큼 아주 열렬히 사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들이 하느님을 사랑했던 것만큼은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방식이 자기 방식이었던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사랑은 내가 원하는 내 방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다음 텍스트에서 그 길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힘든 여정임을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내 방식대로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하는 널찍한 문이고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은 많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좁다고 하십니다. 왜 좁을까요?
그것은 나를 죽여야 하는 길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시면서 종교 지도자들이 자기 자신을 솔직하게 들여다 보길 촉구하십니다.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 든 이리들이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마태 7,15) 라고 하시며

율법과 예언서에 담긴 참 정신을 살아내면 그 열매가 맺히는데
그 열매를 보면 그가 참 사랑을 살았는지 살지 않았는지 알 수 있단다.
그러니 너희들은 어떻게 살래? 이렇게 제자들에게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어떤 한 구절을 똑 떼어 묵상할 수도 있지만 전체의
흐름으로 묵상하는 방법도 아주 훌륭한 묵상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좋은 묵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안에서 행복하세요!
 
 제가 깨달은 율법의 완성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당신의 온 몸으로 살아내신 삶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9,45)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요한 12,24-24)
이 말씀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 총 12절에서 "완성"이(가) 검색되었습니다
1 신약성경 마태오복음서 5: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2 신약성경 로마서 13:8 사랑은 율법의 완성
3 신약성경 로마서 13:8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4 신약성경 로마서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5 신약성경 코린토1서 15:35 부활 때에 완성되는 인간의 구원
6 신약성경 필리피서 1:6 여러분 가운데에서 좋은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7 신약성경 테살로니카2서 1:11 그 때문에 우리는 늘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우리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당신의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여러분의 모든 선의와 믿음의 행위를 당신 힘으로 완성해 주시기를 빕니다.
8 신약성경 히브리서 12:2 그러면서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9 신약성경 요한1서 2:5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그분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10 신약성경 요한1서 4:12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11 신약성경 요한1서 4:17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었다는 것은,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분처럼 살고 있기에 우리가 심판 날에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12 신약성경 요한1서 4:18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 총 4절에서 "숨을"이(가) 검색되었습니다
1 신약성경 요한복음서 19:28 숨을 거두시다
2 신약성경 요한복음서 19:30 예수님께서는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에 말씀하셨다. “다 이루어졌다.”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
3 신약성경 요한복음서 19:33 예수님께 가서는 이미 숨지신 것을 보고 다리를 부러뜨리는 대신,
4 신약성경 요한복음서 20: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로마서 13,8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셨는데 언제 완성 하셨을까?
 요한19,30 십자가 위에서 세상 모든죄를 뒤집어 쓰시고 숨을 거두시며 "다 이루어 졌다" 하십니다. 이게 율법과 예언서의 완성(마태5,17)이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마태7,12절에서 "남이 너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해 줘라"라는 의미는 인간적인 것이 분명 아닙니다.
뭘까요? 전 그게 궁금한 겁니다.



2013.  01.  28 옮긴글들임.
[펌글들]
황금률 [黃金律, Golden Rule]은 기독교에서 처음 사용된 용어로 〈신약성서〉 〈마태오의 복음서〉 7장 12절에 나오는 교훈입니다.
 
예수가 산상 수훈(垂訓) 중에 보인 기독교의 기본적 윤리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가르침을 이릅니다.
 
 이 행위 규범은 그리스도교도가 이웃에게 해야 할 도리를 요약한 것으로, 기본적인 윤리 원칙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황금률이 2세기 문서인 〈디다케 Didachē〉·〈아리스티데스의 변명 Apology of Aristides〉에는 "다른 사람이 너희에게 하지 않기를 원하는 것을 너희도 다른 이에게 행하지 말라"라는 금지 형태로 나오는데, 이것들은 초기 교리문답서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황금률은 〈구약성서〉 〈신명기〉에 나오는 '나그네를 사랑하라'는 교훈을 상기시킵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리스도교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금지 명령의 형식으로 된 이 교훈은 외경 〈토비트〉 4장 15절, 위대한 유대인 학자 힐렐(BC 1세기)과 알렉산드리아의 필론(BC 1세기~AD 1세기)의 저서, 공자(BC 6~5세기)의 〈논어〉에서도 각각 볼 수 있습니다. 그외에도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소크라테스·세네카 등의 저서에서도 이와 비슷한 형식으로 나옵니다.

 [또펌글]

황금률(토0514) 
(마태복음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어제 밤에는 유집사한테 괜히 신경질을 내었고, 나한테 일방적으로 당하여 나한테 억울한 점이 엄청 많을 거라 생각하며, 내 자신을 반성하다가 황금률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왜 황금률로 했느냐 하면 며칠전에 한 교우님께 내가 했던 말이 있어 다시 한번 반복한다는 의미에서 여러분께 간략하게나마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들은 항상 우리의 신앙을 마음속에 품고 실천하고자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구체적인 실천방법이 무엇이라 생각하고 계십니까? 주님의 새 계명인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의 그 구체적인 실천의 말씀이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 구원의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자유의지가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하는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우리가 무엇인가를 선택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라 여겨집니다. 즉 우리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는 능력과 권리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짐승이나 돌이나 나무와 다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유의지를 말하면서도, 이와 모순되는 모든 것이 절대적으로 예정이 되어 있다고 주장을 합니다. 예정 즉 그 목적지가 미리 정해져 있다는 것은 자유의지와는 정반대 되는 내용입니다. 모든 것이 예정이 되어 있다면 우리는 회개를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 회개라는 말이 나올 때는 항상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주어졌다는 것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각자 자기가 생각하고 판단할 능력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우리들은 회개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판단 능력이 없는데 어떻게 죄란 것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 세례요한이 주님을 믿기 전에 먼저 회개하라고 하는 말씀은 우리에게 자발적인 자유의 의지에 의해서 자기를 검토하여 같은 죄를 짓지 말라는 것으로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선택의 권리를 남용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선택의 그 결과는 필연적으로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좌우지간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각자 자기가 생각한대로 많은 말과 생각이 있을 것이지만 일반적으로 먼저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말하자면 상대방의 이익을 존중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부정적인 말로 한다면 남에게 손해를 입히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일상 생활에서 실천할 때, 그 어떤 결정이 정말 상대방을 사랑해서 하는 것인지, 아니면 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지 아닌지를 분별하고 판단한다는 것은 매우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큰 잘못 없이 판단할 수 있는 원칙은 "그 결정이 나에게 이익이 큰가, 아니면 상대에게 이익이 큰가" 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일반적이기는 하지만 나의 이익보다 상대방에게 이익이 크게 된 결정이면 황금률에 크게 빗나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자유의지, 그것은 바로 인간 구원의 기본 요소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사람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황금률의 실천은 바로 이 자유의지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말씀인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의 실천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 즉 주님말씀의 본뜻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하루 하루를 우리는 지혜롭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지혜롭다는 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확실하게 증명하는 데 있지 않고 참인지 아닌지 깨닫는데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요점은 주는 것이 먼저이고 받는 것은 그 다음입니다. 우리 예수인들은 주고 받는 행동을 해야지, 받고 주는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팜글]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황금율

 

많은 사람들이 리더쉽에 관심을 가지고 탐구한다. 현대를 리더쉽의 위기라고도 한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우리 사회에서 어느 훌륭한 지도자가 나온들 순리가 흐르고 공의가 제대로 서겠는가? 나는 리더쉽이란 계몽주의시대의 산물이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기독교적 리더쉽 - 섬김의 리더쉽을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만인의 만인에 의한 투쟁의 시대, 정글의 법칙이 난무하는 현 우리 사회에서 이런 리더가 설 공간은 있는가? 먼저 구성원의 공동체정신부터 확립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공동체정신을 주장한다. 케네디가 말한대로, '국가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지 말고 당신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어보라 Ask no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 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ountry.‘는 것이다. 

 

성경의 황금율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이다.

이는 예수가 말하기 전에 구약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내용이다. 선지자들은 언제나 '과부와 고아를 돌아보고, 나그네를 대접하라.'고 외친다. 언제나 히브리 예언자들은 백성들에게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널리 인간을 사랑으로 끌어안아 공감적 포용을 확장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공동체정신은 바로 이웃(약자)을 돌아보는 것이다. 그 때에만 공동체가 지속성장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공감의식은 요단강에서 인더스강 계곡과 양자강 유역에 이르기까지 예외없이 나타났다.

 

공자는 영적 충만한 생활을 누리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군자가 되는 것이며, 삶의 진정한 목적은 도를 깨우치는 것이라고 믿었다. 도는 개인을 초월하는 것이며, 에고를 버리고 다른 사람과 깊은 동정적 관계를 시작할 때 찾아지는 것이다. 그는 "내가 서고자 하면 남을 세워야 한다(己欲立而立人)“라고 말했다.   그리고 제자 중 하나가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단 한 가지 가르침을 알려달라고 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시키지 말라.(己所不慾 勿施於人)"

이스라엘에서 7,000킬로미터도 더 떨어진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똑같은 황금율을 말한 것이다. 

 

붓다 이전에 인도의 수행법인 요가의 방법은 고행이었다. 고행을 통해서 인간의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붓다는 이런 수행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참선 수행은 네 단계로 진행한다고 말했다.

첫 단계, 모든 인간에게 마음을 열고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
두 번째는 다른 사람의 고통과 괴로움을 자신의 것으로  겪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세 번째는 다른 사람의 행복에서 '동정적 환희'를 경험하는 것이다.
마지막 단계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에 대해 두루 동정을 베풀어  인생의 기쁨과 슬픔을 초월한 후 다른 존재를 향한  평정심을 경험하는, 보편적이고 사심이 없는 동정의 단계이다.

그는 우리의 인간의 정체성은 늘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의 총합이라고 생각했다.
역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황금율은 동서양 고금을 막론하고 진리다.  

   -제러미 리프킨의 '공감의 시대'를 중심으로  여기서 내가 깨달은 '부자로 사는 법'도 일맥상통하고 있다.

 

 부자로 사는 법

이 나이가 되어서야 좀 쉽게 사는 법을 터득했다.

사랑이 아픈 것은 탐하기 때문일거야 삶이 허무한 것은 잡지 못함일거야

喜怒愛樂貪嗔恥가 다 貪에서 오는 것을 탐하는 사랑에서 나누는 사랑으로

탐이란 끈을 놓으면 자유롭다 잡지말고 바라보자 다가가 나누자 

나눔은 넉넉함이요 넉넉함은 부요함이다 

나만의 편견일지 몰라도 나는 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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