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복음 해설 성서 필사보다 성서 공부를
“1 하늘나라는 열 처녀가 저마다 등불을 가지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것에 비길 수 있습니다. 2 그 가운데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로웠습니다. 3 미련한 처녀들은 등잔은 가지고 있었으나 기름은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4 한편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잔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습니다. 5 신랑이 늦도록 오지 않아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6 그런데 한밤중에 ‘저기 신랑이 온다. 어서들 마중 나가라!’ 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습니다. 7 이 소리에 처녀들은 모두 일어나 제각기 등불을 챙겼습니다. 8 미련한 처녀들은 그제야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불이 꺼져 가니 기름을 좀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습니다. 9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우리 것을 나누어 주면 우리에게도, 너희에게도 다 모자랄 터이니 너희 쓸 것은 차라리 가게에 가서 사다 쓰는 것이 좋겠다.’ 고 하였습니다. 10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습니다.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갔고 문은 잠겼습니다. 11 그 뒤에 미련한 처녀들이 와서 ‘주님, 주님, 문 좀 열어 주세요.’ 하고 간청하였으나 12 신랑은 ‘분명히 들으시오. 나는 당신들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하며 외면하였습니다. 13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 항상 깨어 있으시오.”(마태오 25,1-13)
오늘 단락은 고전적인 연극의 3단계 형식을 본뜬 이야기다. 1절은 제목이다. 2-5절은 서곡(protasis), 6-9절은 본론(epitasis), 10-13절은 마무리(katastrophe) 부분에 해당한다. 5절과 6절 사이, 그리고 9절과 10절 사이에 쉬는 곳이 있다.(intermezzo) 주인공인 신랑은 마지막 단계에 나타나고 조연을 맡은 열 처녀들이 주연배우처럼 본론에 나온다. 4복음서중 마태오에서만 보이는 이야기로서 마태오가 처음으로 글로 편집하였다. 초대교회에서 생겼다는 의견도 있지만 예수가 직접 하신 이야기 같다. 역사를 이야기로 나타내어 공동체에 교훈을 주려는 마태오의 생각이다.
사건을 이야기로 풀어쓰는 것이 역사라면 생각을 개념으로 바꾸는 것이 철학이다. 성서는 철학보다는 역사에 가깝다. 4복음서는 역사 다큐라기보다 신학 다큐다. 4복음서는 예수를 둘러싼 사건을 예수에 대한 믿음이 없는 카메라 기자가 생중계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믿는 카메라 기자가 사건이 생긴 오랜 후에 사건을 편집하고 꾸며내어 녹화 중계하는 것이다. 4복음서를 마치 신문 사회면 기사를 읽듯이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성서에서는 사건이 우선이 아니라 메시지가 우선이다. 사건이 메시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지가 사건을 결정한다.
성서라는 책의 문학적 특징을 알지 못하면 성서를 이해하기 어렵다. 성서를 필사하거나 독학하는 것은 마치 논어(論語)나 노자(老子)를 초등학생이 자습하는 격이다. 필사하는 그 정성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필사하면서 성서를 해석하는 과정을 피할 수 없고 그런 해석이 잘못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성서교육보다 성서필사에 치우친 한국 가톨릭교회의 현실이 나는 염려스럽다. 성서를 여러 번 읽는 노력은 존경스럽지만, 필사할 때와 비슷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성서는 전문가 지도 없이 공부하는 것은 장점보다 단점이 훨씬 많다.
1절의 람파데스(lampades)는 우리말로 ‘등’(공동번역), ‘등불’(개역개정성경)로 옮겨졌다. 예수 시대의 사회환경에 친숙하지 않은 한국 독자들은 작은 등불이나 랜턴을 연상하기 쉽다. 많은 주석서에 그렇게 설명되었고 대부분 설교자들도 보통 그렇게 언급한다. 그러나 예수 시대 독자들은 그렇게 생각할리 없다. 10대 중반의 처녀 열 명이 추운 밤중에 그것도 야외에서 옆에 자그만 등불을 켜 놓고 잠들었다는 말인가. 설득력이 모자라는 설명이다. 처녀들은 추위에 떨거나 저체온으로 목숨이 위험했을 것이다. 처녀들의 가족들이 그렇게 놓아둘 리 없다.
람파데스(lampades)는 등이나 등불보다는 ‘횃불’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람파데스(lampades)가 등이나 작은 등불로 표현된 고대 문헌은 보이지 않는다. 등이나 작은 등불을 가리키려면 루크노이(luknoi)라는 그리스어를 썼어야 했다. 등은 실내에서 사용되었다. 횃불은(유디트 10,22; 다니엘 5,5; 사도행전 20,8) 실내에서 쓰기에는 냄새가 심하고 화재 위험이 있어서 실내에서 쓰이지 않았다. 횃불은 최대 2시간 불이 지속되며 땅바닥에 놓을 수도 없고 횃불 곁에서 처녀들이 잠 들 수도 없다. 갈릴래아 지방에서는 야간 결혼 행렬때 올리브기름을 적신 헝겊을 감은 막대기 횃불에 불을 붙여 횃불이 꺼질 때까지 처녀들이 춤을 추었다. 아래 서양의 예술 작품이나 그림에 람파데스(lampades)는 등불로 표현되었고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nas)도 등불이라고 잘못 설명하였다.
오늘 단락은 역사에서 그림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였다. 춤을 통해 여성의 자아의식을 발견하고 강조한 소재중 하나이기도 하다. 믿음과 행동이라는 주제로 자주 언급되기도 하였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믿음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들, 미련한 처녀들은 믿음은 고백하나 행동이 없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설되기도 하였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교회나 그리스도교 신자로, 미련한 처녀들은 유다교 회당이나 유다교 신자들로 잘못 비유되기도 하였다.
자세히 보면 오늘 비유에는 어설픈 구석이 많다. 슬기로운 처녀들이라면 당연히 기름을 조금이라도 미련한 처녀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작은 동네에서 서로 다들 아는 사이 아닌가. 어두운 밤길에 어디서 기름을 사라고 친구들을 무작정 보내는가. 밤중에 현실적으로 기름 파는 가게가 문을 열겠는가. 잔치가 열리는 동네에서 기름을 얻으면 되지 않는가.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이유로 옹졸하게 문을 열어주지도 않는 신랑이라니. 그러나 마태오는 이런 점에 관심이 없다. 하늘나라를 기다리고 준비하는 자세를 마태오는 오직 강조하려는 것이다.
마태오복음 23장에서 예수는 바리사이파 유다교에 대해 하느님의 심판을 경고하였다. 24장에서는 예수를 따르는 공동체에게 하느님의 심판을 경고하고 있다. 하느님의 심판은 유다인들 뿐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도 닥친다는 것이다. 유다인이란 단어로 가리킨 ‘위선자들’ 뿐 아니라 ‘주님의 악한 종들’도 하느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뜻이다. 주님의 종 중에는 선한 종도 있고 악한 종도 있다. 악한 종들에게 속지 말고 그들을 잘 분간해내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과 선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얻을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이 자비로운 분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악의 세력들과 주의 악한 종들은 하느님의 무서운 처벌을 받을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이 정의로운 분임을 알게 될 것이다. 악의 세력들과 주의 악한 종들에게 주어질 하느님의 자비는 없다. 주의 악한 종들은 하느님의 자비를 멋대로 농락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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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이 있으며, 마태오 복음 해설서 <행동하는 예수: 불의한 세상에 보내는
경고>가 출간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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