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로 사도의 전도 여행-바올로사도의 삶 이해-진정한 크리스천
그리고 로마서에 기술된 바( 로마 11,1; 필리 3,5)와 같이 베냐민 지파에 속한 독실한 유다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유다 관습대로 난 지 8 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유다식 이름은 사울이며, 로마시민권을 소유한 사람으로서 그리스·로마식 이름을 갖고 있었다. 바오로는 두 이름을 혼용하여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 후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쿠스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선교 활동을 시작한다.36년 경에는 예루살렘의 두 지도자인 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난 후,시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을 선교하였고,안티오키아에서 유다인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전교하여 유다인과 이방인의 교회를 창립하였다(사도 11, 19-20). 바오로는 이후 세 차례에 걸쳐 지중해 동부 지역으로 광범위한 여행을 하게 되는데,이때 안티오키 아를 거점으로 삼았으며,예수를 섬기는 안티오키아 시민들을 처음으로‘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렀다(사도 11, 26).
2,바오로사도의 전도여행 ------ 하느님의 은총으로 사도가 된 바오로는 안티오키아를 이방인 선교의 발판으로 삼아 자신을 온전히 선교열정에 투신하였다 . 바오로는 아시아 현재 터키의 일부, 시리아와 유럽,그리스를 거쳐 로마에서 순교하기까지 지금의 요르단과 예루살렘으로 가는 모든 길 전체를 여행했다.
<1차 선교여행- AD 45~49년,사도 13-14장> 키프로스에서 그리고 남쪽에서는 안티오키아로 부터 아나톨리의 남쪽 (페르게, 안티오키아 , 이코니온, 리스트라와 데르베) 등을 여행하면서 바오로 사도는 같은 민족인 유다인들에게 선교를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결국 이방인들을 중심으로 선교의 역량을 집중하였다.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는 여러 곳에 공동체를 건립하고,병자들을 고쳐주면서 열정적으로 예수님의 부활과 기쁜 소식을 설교하며 선교하였다.1차 선교 여행을 끝내고 바오로는 바르나바와 함께,교회역사상 첫 공의회인 예루살렘 사도회의에 참석하였다(사도 15, 1 -21).
<2차 선교여행 - AD 50~52년, 사도 15장,36-18,22 > 바오로의 2차 선교 여행의 가장 큰 특징은 바오로가 유럽에 첫 발을 디뎠다는 것이다.실라스와 티모테오와 함께 한 두 번째 여행은 그리스 트로아스에서 다다넬스 해류까지,그리고 필리피, 테살로니카, 베로이아, 아테네와 코린토까지 유럽지역을 광범위 하게 선교하였다.특히 필리피 공동체는 바오로에게 선교와 생계를 적극적으로 돕는 역할을 한다.필리피에서는 감옥에 갇혔다 풀려나기도 하였고, 코린토에서는 고발까지 당하면서 선교의 열정을 불태우고 그의 선교 거점인 안티오키아로 돌아왔다.
<3차 선교여행 - AD 53~58년,사도 18장,23-21>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와 티토와 함께 아나톨리와 그리스에서 만든 교회들을 다시 방문했다 .이 3차 선교여행의 중심은 27개월 동안 머문 에페소 공동체였다. 이곳에서 많은 위험을 경험했고,고통 속에서 감옥에 갇혀 있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련 속에서 에페소 공동체를 중심으로 급속하게 신앙이 확산되었다. 그러나 세 번째 선교 여행은 바오로가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끝나게 된다.
<4차 선교여행 - AD 58~63년,사도 18장,23-21> 세 번째 선교 여행을 마칠 즈음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바오로는 유다인과 로마 총독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고 로마로 호송되었다. 그는 로마에서 가택연금을 당하면서도 집을 찾아방문하는 이들에게 지속적으로 복음을 전하였으며, 복음전파자로서의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네로 황제 치하에서 67년 경 로마 대화재 사건 중 참수하여 순교하였다.
바오로 사도의 선교 여행은 언제나 고난과 위험, 생명의 위협까지 늘 동반되었으나, 바오로 사도는 그때마다 선교의 열정과 지혜로서 벗어났으며, 항상‘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으며, 우리의 주님이시다’라는 기쁜 소식을 힘차게 전하였다. 또한 예루살렘 사도회의를 통해 이방인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신앙을 위한 해결책을 모색하기도 했다. 바오로 사도의 선교 여행으로 그리스도교가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이 준비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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