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 경계선에 서 있는 사람들: 죽으면 천국에 들어가나?

2015. 4. 12. 오후 4: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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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경계선에 서 있는 사람들: 죽으면 천국에 들어가나?


마태5:19~20

하나님의 말씀 중 어떤 것을 버려도 천국사람이 되는 경우가 있군요(19절). 반면에 제자들은 일정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면 천국의 사람이 되는 일 자체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나타납니다(20절).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 일단 들어가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제자들은 그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할 대 천국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허락되지 않는다고 말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로 부름받았을 때 제자되기를 사양하고 그저 천국사람이 될 수 있는 정도로만 믿음을 유지하는 것은 어떨까요? 천국에서 작은 자라고 일컬음을 받으면 어떻습니까? 천국에 들어가기만 하면 됐지.... 주께서 하나님의 일을 좀 하라고 제자로 불렀는데 영 자신이 없어서 부르심을 사양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것이 되므로 그런 사람에게는 천국이 허락될 수 없는 것일까요?


천국에 들어간다?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의 뜻을 ‘죽은 후에 가게 되는 하나님 나라’로 생각하면 이를 표현하는 다른 성구들이 제대로 잘 해석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가까이 왔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의 지배, 혹은 이미 시행되었으나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의 통치를 현재적으로 받는 믿음생활’이라는 측면에서 ‘하나님 나라’가 무엇을 뜻하는지 그 개념을 완전하게 정립한 후 이와 같은 표현들을 이해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죽은 후에 지상에서 특정의 어떤 공간으로 이동하는 장소이동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죽은 후에 몸 없는 영혼이 가는 나라, 천국?
따라서 죽은 후에 그 영혼이 특정의 공간으로 이동하여 육체 없는 영혼들만이 모여 사는 나라가 천국이니 지옥이니 하는 등의 그림 대신에 하나님의 지배영역 안에 놓인 믿음의 사람들이 현재적으로 경험하는 나라, 그러나 완벽하게 성취된 나라가 아닌, 그래서 완성을 향해 가는 나라로 이해할 때 제자들의 삶은 지금 현재적으로 천국을 살고 있는 삶이면서 동시에 천국을 완성시켜 가는 삶이라고 규정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이해할 때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씀은 ‘죽은 후에 그 영혼은 절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 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성취되지 않을 것이다, 혹은 하나님의 뜻이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뜻으로 보게 됩니다.

구원받지 못하고 죽은 사람의 영혼이 귀신? 태어나자 곧 죽은 아기의 영혼이 아기천사?
사람이 죽은 후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면?’이라는 등의 상상력이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 ‘연옥’과 같은 교리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인간적인 애틋한 마음에 죽은 자를 평안히 쉬게 해야 한다느니, 아무 죄도 모르는 어린애들의 영혼은 어찌되는 것이란 말이냐? 라는 등의 질문에 대해 ‘성경에는 없는 질문들에 대한 추상적인 대답’을 기하는 상상력이 발동되면 성서본문과 전혀 상관없는 엉뚱한 귀신론이나 유령론을 말하게 됩니다. 인간의 지성과 논리가 최대한 작동이 되어 대답을 하네 못하네 하면서 ‘성서는 도무지 관심도 없고 말하지도 않는 문제’를 마치 자신이 어떤 계시를 받아 해답을 갖고 있는 양 ‘쓸데없는 변론’으로 아귀다툼을 시도하게 되지요.

천국에 가지 못하고 죽은 자의 영혼이 귀신이 된다는 주장을 펼친다던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영혼이 구천을 떠돌아다니다가 특정인에게 들어가 귀신들린 사람이 된다든가, 혹은 연옥이라는 중간지대에 들어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에 적절해질 때까지 훈련받으면서 기다려야 된다는 등의 전혀 생뚱맞은 교리를 공포영화 만들듯이 제작해서 성서저자들이나 성서본문은 전혀 관심 없는 하나님의 고유영역을 자기가 설명한답시고 아주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일을 반복합니다.

그러므로 20절의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씀은 ‘사람이 죽은 후에 그 영혼이 죽은 육신에서 빠져 나와 어떤 특정의 공간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뜻의 말씀이 아니라 ‘결코 이미 시작된 천국을 완성시키지 못할 것이다’라는 뜻으로 새겨져야 합니다. 부름 받아 이미 구원의 대열에 속해 있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니 ‘결코 구원받지 못하고 너희 영혼은 지옥으로 떨어지게 되리라’의 뜻은 아닐 것 아닙니까?

마태복음 저자가 의도하는 뜻
제자들은 예수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직선적으로 갖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추구하는 ‘하나님의 의’는 예수의 제자들이 아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아야 합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들 나름대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직선 관계’를 위해 노력하던 사람들인데 예수를 통해 하나님과 직선관계를 갖게 된 제자들은 예수 없는 저들보다 더 나아야 하는 것은 자연스럽고도 마땅한 일이지요.

그러므로 제자들은 예수께 부름 받아 각별하게 선택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이 이루어 놓은 “예수 없이 만든 하나님과의 직선적인 관계의 수준선”을 넘어서야만 합니다. 만일 그렇지 못한다면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나라 완성도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이루어 놓은 수준에 머물거나 그 보다 못한 결과가 될 뿐입니다.

따라서 부름 받아 선택된 예수의 제자들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수준을 넘어서서 ‘가까이 다가온 하나님의 나라, 그렇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에 이르도록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서리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이루어 놓은 정도를 훨씬 넘어서서 가까이 다가온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각도에서 본 구절을 이해할 때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의 뜻은 ‘예수로 말미암아 맺은 하나님과의 직선관계가 예수 없이 맺은 저들의 관계성을 능가하지 못한다면’으로 뜻풀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씀은 ‘가까이 왔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는 시행되다가 중단되고 마는 미완성의 나라인 채로 남게 될 것이다’라는 의미로 파악될 수 있습니다.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그림을 그리지 말고....
분명한 것은 마태복음에서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의 뜻은 ‘사후에 가게 될 제 3의 어떤 공간, 혹은 장소로서의 특정한 곳’을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저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들어간다’는 표현만이 아니라 ‘가까이 왔다’고도 말씀하므로 마태복음의 교훈을 매우 현실적 것으로 보도록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마태복음이 가르치는 말씀을 ‘육체와 영혼의 분리’로 본다거나 ‘죽은 후의 공간이동, 혹은 장소이동’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합니다. 마태복음의 말씀 자체가 그런 사후의 세계를 말하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대단히 실제적이며 현실적인 신앙생활과 깊이 관계된 생활교훈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지금 나에게 주시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생활의 말씀으로 해석해야 한다
따라서 20절의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씀을 ‘죽은 다음 사후의 세계’와 연관시켜 해석하는 비성서적, 비신학적 관점은 수정되어야 합니다. 마태복음의 지극히 현실적이고 실제적이며 구체적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이론 차원, 정신적 호기심에 대한 대답 차원이 아니라 실생활에 적용되어야 하는 생활의 말씀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영혼불멸설은 성서본문에 근거가 있는가?
사실 마태복음의 곳곳에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은 죽은 몸에서 빠져 나온다’는 그림이 그려질 수 있는 표현들이 있음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한때 전 세계 여성들의 눈에 촉촉한 눈물을 담게 만들었던 ‘사랑과 영혼’이라는 영화에서처럼 뜻하지 않게 죽음을 맞은 사람들의 영혼은 안식처를 찾을 때까지 구천을 떠도는 귀신이 된다는 등의 무속적 신앙이 확인된 것처럼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다른 한편에서 볼 때 마치 ‘아바타’라는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사람의 영혼이 육신을 들락거린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성서저자들에 따르면 그런 영혼은 없습니다.

이와 같은 “영혼과 육신”이라는 이분법적인 인간론은 신플라톤주의에 영향을 받아 생긴 이원론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저자를 비롯한 다른 성서저자들은 자신들의 신학을 표현하는 ‘문화선교 차원의 활동’을 위해 그런 이원론적인 표현을 차용했을 뿐이지 결코 신플라톤 철학에서 말하는 이분법적인 인간론으로 그리스도인의 인간론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성서저자들과는 달리 초대교회의 교부들이 당시의 헬레니즘 이원론의 빛에서 영혼불멸설을 만들었습니다.

신플라톤주의에 영향을 받은 초대교회사의 교부들이 도무지 성서본문에서 근거를 찾아볼 수 없는 영혼불멸설을 만든 데에는 그 만한 이유와 배경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은 어떻게 되는 것이냐’에 대한 질문에 답변을 하려니 구약을 비롯하여 바울도 속이 시원하도록 해주는 대답의 근거를 명쾌하게 제공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바울은 사람이 ‘죽는 것은 잠자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살전4:13~17; 고전15:51) ‘사람이 죽은 후 그 사람은 부활의 때까지 어떤 상태로 어디에 있게 되느냐’는 질문에 적절한 답을 내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마태복음 저자도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은 부활의 때까지 무덤에서 잠자고 있다가 부활의 때가 되면 그 무덤에서 일어나 나오게 된다는 그림을 그리게 합니다(마27:52).

이런 생각은 고대의 사회에서 매우 보편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대의 무덤들은 마치 작은 집처럼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이집트의 대피라밋이 건조된 배경도 이런 측면에서 설명됩니다. 그래서 부활할 때 그 몸 다시 입고 세상에 나오라고 왕의 시신을 동물 박제하듯이 미라로 만들었던 것이지요.

이와 같은 고대의 사고에 바탕을 두고 그리스도인들이 죽은 사람에 대한 ‘화장(火葬), cremation)’을 반대했던 이유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게 됩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관점을 갖고 죽어 있는 시신을 볼 때 그 육체를 화장하여 재로 만들어 없애면 그 사람은 나중에 육신이 없게 될 터인데 그러면 어떻게 부활 때에 다시 몸을 입을 수 있겠느냐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최근 들어 바울의 설명에 설득되어 급속히 사라져가고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서 화장을 선도하는 시대가 된 것처럼 보입니다. 매장지 부족이라는 사회-문화적 현상이 큰 몫을 차지하는 이유도 있겠으나 부활의 때에는 지금의 몸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몸을 입게 된다(고전15:35~38; 51~53)는 바울신학이 점점 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편적으로 수용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성서에 확실한 근거가 없는 교리들이 만들어진 배경들 중의 한 가지
이러므로 성서가 말하는 ‘죽음과 부활’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서는 ‘사람이 죽은 다음에 그 시신이 썩어져 없어지면 그 사람은 어떻게 부활할 수 있으며 부활의 때까지 그 사람은 어디에 있게 되는 것이냐?’와 같은 질문들에 제대로 된 해결책을 주고 있지 않습니다. 성서본문은 이런 종류의 많은 질문들에 대해 일일이 해답을 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답변을 보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풀지 못해 가슴앓이를 하던 그리스도인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이를 위해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적절한 대답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교부들에 의해 준비된 그 대답들이 모두 성서본문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신앙적 차원에서는 매우 유익하지만 성서본문에는 전혀 근거가 없는 경우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에 대해 ‘교회로부터의 권위’를 부여했습니다. 그러자 그 대답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교리라는 특정의 위상을 차지하게 되어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권위 있는 말씀으로 자리매김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로부터 오는 권위를 갖게 된 교리’들의 처음 배경은 확실하게도 “단순한 지적 유희를 위한 것’에 있지 않았습니다. ‘종교권력을 강화시키는 것’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성서본문에는 없으나 교회를 통해 나온 처음의 설명들은 오직 죽은 사람을 너무나 사랑했던 ‘살아 있는 사람’의 진한 슬픔과 같은 문제를 목회차원에서 해결하기 위해 제공되었던 이론들이었습니다.

바울도 그런 차원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 4:16~18)”고 하였던 겁니다. 바울은 살아 있는 현재의 사람에게 중심점을 두고 목회적 차원에서 죽은 자의 부활을 말했던 것이지요.

교회사 속에서 만들어진 비성서적, 그러나 신앙적-목회적 교리들에 대한 입장
이러므로 성서본문에는 근거가 없으나 교회사 속에서 만들어진 교리들, 성서신학 차원에서 볼 때 상당히 어설프기도 하고 억지주장인 것으로 생각되는 교리들이 성서본문에 근거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폐기처분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본인의 입장입니다. 왜냐하면 위에서도 잠깐 언급한 대로 원래 교리의 태생적 배경이 ‘목회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신앙적 설명’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위해 주어진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한정된 지면에 다 담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불가능한 일입니다(요21:25 참조). 그러다보니 성서본문과는 직접적인 관계도 없고 성서에서는 찾아볼 수도 없는 비성서적인 교리가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되어서 만들어진 목회적 차원의 결과물입니다.

그러므로 성서본문과는 전혀 상관도 없고 성서 전체에 걸쳐 암시조차 없지만 사람의 문제가 시공에 따라 천차만별이라서 신앙적, 목회적으로 필요하여 만들어져 정통이라는 이름으로 내려 온 교리들은 오늘날 ‘그 필요성의 차원’에서 깊이 심사숙고되는 중에 그 의미와 기능이 ‘재활용’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 감리교회의 요한 웨슬레는 일찌감치 교회사를 통해 이루어진 전통을 무시하지 않아야 한다면서 ‘성서, 전통, 이성, 체험’이라는 성서해석 및 조직신학적 신앙원리의 기초를 말했습니다.

 

박경은
감신대및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신학박사(신약학)학위를 취득했다. 성서신학의 현장화를 추구하며 한책의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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