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부시대의 신학: 교부시대 개관
교부시대는 기원후 약 100~451년경의 시기입니다. 이 시기에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는 ‘정경의 범위’,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간성’, ‘삼위일체의 교리’, ‘교회의 본성’, ‘은총과 자유의지’ 등이 논의되었던 시대였습니다. 교부시대의 신학 논쟁들은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주제들일 뿐만 아니라 그 전개 양상 역시 다양하고 자극적이어서 후대 신학자들에게 사상의 발판을 제공해주었으며, 지금까지도 끊임없는 성찰과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주된 계통이라 할 수 있는 성공회, 동방 정교회, 루터 교회, 개신교, 로마 가톨릭 등은 모두 교부시대의 그리스도교 교리 발전에 근거하여 자신들을 교부들의 비판적 계승자로 자처합니다.
이 시기의 신학자들은 그리스도 교회의 공통적인 쟁점들을 정리하는 일에 주력하였습니다. 그들이 최초로 관심을 가졌던 신학적 과제는 그리스도교와 유대교 사이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구약 성경에 근거하여, 예수라는 한 인물을 구약의 모든 예언을 성취한 하나님이 보낸 구원자로 믿는 종교이기 때문에, 유대교와의 연관성과 차이를 명확히 하는 일은 초대 교부들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신앙의 본질에 관한 이러한 문제들은 신약 성경의 바울 서신에서부터도 중요하게 다루어져 왔으며, 그리스도교가 ‘이방인을 향한 선교’나 ‘구약의 해석 방법’과 같은 실천적인 문제들과 당면하면서 더욱 부각되었습니다.
2세기 무렵에 중요하게 등장한 현안은 비그리스도교 비판자들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이성적으로 설명하고 그들의 공격으로부터 믿음을 옹호하는 ‘변증론(apologetic)’이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로마로부터 많은 박해를 당하며 교회의 존립 자체의 문제에 직면하여 있었기 때문에 신학적 논쟁은 제한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활동하였던 유스티노스와 이레네우스와 오리게네스 같은 그리스도교 변증가들은 자신들을 핍박하는 이방 대중들을 상대로 자신들의 신앙의 진리를 설득하는데 힘썼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을 위협하지 않는 도덕적인 종교이며 진정한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그리스도교를 향한 반대세력들의 비난을 무마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이방인을 상대로 하는 변증론이 아닌, 그리스도교 신학만의 순수한 신학적 논쟁은 박해의 시대를 벗어나 그리스도교가 로마에 점차 정착되면서 치밀하게 전개 될 수 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로마 제국 내 그리스도교의 전파 과정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유대적인 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던 인근 지역으로 퍼졌습니다. 이 시기에 바울과 같은 신앙 전도자들을 통해 확산되기 시작한 그리스도교 신앙은 1세기 말엽에 동부 지중해 연안을 따라 전파되어 로마에서도 상당수의 신자를 확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에 처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40년대쯤이라고 생각되는데, 당시 로마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은 특별히 인정되거나 박해받지 않았던 여러 종교들 중 하나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의 수가 점차 늘어나게 되면서 그리스도교가 로마에서의 사회적 영향력을 품게 되자, 그리스도교의 성장을 우려한 로마 지배계층의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교회사에서 주목할 만한 박해로는 데시우스 황제 시대의 박해가 있습니다. 250년 1월 데시우스 황제는 로마 교회의 주교였던 파비안을 처형하였고, 이후 6월에는 로마의 신들과 황제를 위한 희생제 집행을 강요하는 데시우스 칙령을 발표하였습니다. 그가 내린 칙령은 대체로 무시되었던 것으로 생각되지만, 칙령이 강하게 집행되었던 일부 지역에서는 수천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분향에 거부하며 순교하기도 하였고, 일부는 황제의 압력에 굴복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시기 이후의 가장 가혹한 박해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였던 303년 2월경에 일어났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모든 그리스도교 예배 장소를 파괴하고 책을 제거할 것을 명령하는 칙령을 선포하였습니다. 그의 박해 당시 그리스도교도 공직자들은 지위를 잃고 노예로 강등 당하였으며, 그리스도교도로 고위 관직을 맡고 있던 자들의 경우에는 로마 관습에 따른 희생제의를 강요당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그리스도교도였던 그의 아내와 딸에게까지 희생제를 명령하였다는 사실은, 이 박해가 로마 제국 전체에서 얼마나 가혹하게 이루어졌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당시 제국 내 그리스도교의 영향력 또한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박해는 311년 갈레리우스가 박해 금지령을 내릴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로마의 박해가 그리스도교도들의 믿음을 오히려 더욱 강하게 만들며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는 것을 깨달은 갈레리우스는, 그리스도교도가 ‘공공질서를 해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종교집회를 유지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였습니다. 이로써 그전까지 로마에서 다소 모호한 법적 지위를 갖추고 있던 그리스도교 신앙은 인정되었고 교회는 불안에서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로마의 국교로 채택하면서 많은 어려움과 핍박을 견디며 법적으로 지위를 확보하였던 그리스도교는 이제 그 위상이 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부제 시절 집권 초기에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해 전혀 호의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관용을 중요한 덕목으로 생각하며 그리스도인들에게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히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는 그리스도교는커녕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시기의 태양신 신앙을 부활시켜 자신이 이 신앙의 최고 제사장 자리를 맡기도 하였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가 무슨 이유 때문인지 312년 밀비안 다리의 전투 이후 막센티우스를 격파하고 황제로 후 자신이 그리스도교도임을 선언하게 되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을 계기로 로마는 점차 그리스도교화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교도와 이교도 역사가들 모두가 증언하고 있습니다. 어떤 역사가들은 콘스탄티누스가 밀비안 전투 이전에 병사들의 방패에 십자가를 표시하라는 이상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그 이유가 정치적인 목적 때문이라는 해석 역시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유야 어찌되었건 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후 그리스도교는 단순히 합법화된 종교를 넘어 점차 로마 제국의 종교가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스도교가 국교화 되자, 신학적 논쟁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국교로서 그리스도교 교리에 대한 논의는 신학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안건이 되었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는 니케아 공의회를 개최하여 교리 차이가 합의되기를 고대하였습니다. 이 시기는 로마 교회가 점차 성장하게 되면서 훗날 동방 정교회의 분리의 계기가 된 콘스탄티노플 교회와의 갈등들이 생기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외에도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과 카르타고가 당시 여러 신학 논쟁의 중심지로 떠오르게 된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교가 지중해 전 지역에 확고하게 된 후기 교부시대(약 310년~451년)는 그리스도교 신학 사상에서 가장 많은 발전이 이루어진 시기였습니다. 신학자들은 자유롭고 활발하게 그리스도교의 중요 쟁점들에 대해 논의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광범위하고 깊은 성찰들을 전개하여 신앙의 중요 내용들 사이에 일치점을 찾아내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신학적 동의가 항상 이루어졌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교리 논쟁 속에서 서로 지속적으로 갈등하기도 하였으며 결국 의견의 불일치로 끝난 사안들도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모든 교회가 공통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신앙의 중요 내용들을 발견하여, 오늘날 ‘사도신경’으로 불리는 신앙의 고백을 정립할 수 있었다는 것은 분명 신학적으로 주목할 만한 성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출처] 교부시대의 신학: 교부시대 개관|작성자 YO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