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 이스카리옷의 멸망의 원인 이해

2015. 4. 7. 오전 11:17:26

글자

 

유다 이스카리옷의 멸망의 원인 이해   이정임 글라라

 

최승정 신부님의 탈출기 42회 강의를 듣고 공부하면서 신앙의 출발점에 대한 것을 배우면서...

 

신앙의 출발점은 잘 보고 잘 듣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이사야 예언서에 멸망하는 사람은 왜 멸망하는가 하면,

"그들은 보고 또 보아도 보지 못할 것이고 듣고 또 들어도 듣지 못할 것이다." 하셨습니다.

 

보지 못하니까 두려워하지도 않고, 믿지도 못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출발점은

잘 보고 잘 듣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는 말씀을 듣는 순간 갑자기 유다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럼 유다는 무엇을 보았을까? 그것이 궁금했습니다. 유다는 분명 예수님을 보았는데 무엇을 보지

못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까? 유다는 예수님을 보지 않고 자기 자신을 보았다고 느껴집니다.

우리가 많은 경우 이런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믿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잘 따르겠다고 신앙을 고백하고 교회로 모였지만 ...

진짜 속을 들여다 보면 자기 자신을 믿고 살아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생각하고

판단하고 그리고 내 생각대로 인생을 살아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유다가 예수님을 보았으나

결국 예수님을 보지 않고 자기 자신을 보고 살았던 모습과 너무도 같은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또한 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여러 번에 걸쳐서 당신의 제자 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

당신을 팔아 넘길 것이라고 미리 알려 주셨습니다. 미리 알려 주신다는 것은 그 길에서 돌아설

기회를 주시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유다도 그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유다가 참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면 자기가 계획한 길에서 바로

돌아섰어야 하는 것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듣지 않고 역시 이번에도 자기의 말을 따라 자신이 계획한 일을

그대로 실천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예수님을 팔아넘겼고 결국 마지막도 자기의 말을 따라 걸어

갔습니다. "아무도 나를 용서하지 않을꺼야. 내 죄가 이리도 큰 데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겠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달려와서 용서도 청해보지도 않고 자신 안에서 들려오는 자기 말을 듣고서

그걸 그대로 걸어가다가 멸망의 길로 스스로 걸어간 사람이 되었던 것이라고 저는 묵상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우리도 교회로 모였으나 유다가 그랬듯이 예수님을 보기는 보지만 결국

유다가 그랬듯이 자기 자신을 보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또한 교회를 통해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는 듣지만 결국 유다처럼 자기 안에서 들려오는 자기 말을 듣고 그 말을 선택하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이 성찰해 보아야겠습니다.

 

이와 같이 자기를 보고 사는 삶 그리고 자기 안에서 들려오는 자기의 말을 듣고 그것을 선택하고

살아가는 삶은 바로 보고 또 보아도 보지 못하는 것이고 또 들어도 듣지 못하는 삶이 아니고 무엇

이겠는지요? 나는 잘 보고 잘 듣는 신앙인입니까?

 

참고하자고 올려봅니다.

글라라님의 글에 감동과 찬사를 보냅니다.

두 성경을 대조해 보면서 묵상해 봅시다. 우린 지금 어떤가요?

주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나요? 다 아세요? 끝없이 배우고 익히며 구원을 향해가는

우리들은 구도자가 아닐까요??  주님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 부활의 축제에 나를 비우고 내안에 성령께서 임하시게 노력합시다.

저를 비롯하여~~ 살롬.

 

 이사야의 소명 (이사6,9-13)

9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가서 저 백성에게 말하여라. ‘너희는 듣고 또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마라. 너희는 보고 또 보아라. 그러나 깨치지는 마라.’ 10 너는 저 백성의 마음을 무디게 하고 그 귀를 어둡게 하며 그 눈을 들어붙게 하여라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치유되는 일이 없게 하여라.” 

11 그래서 내가 아뢰었다. “주님, 언제까지입니까?”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성읍들이 주민 없이 황폐하게 되고 집집마다 사람이 없으며 경작지도 황무지로 황폐해질 때까지다. 12 주님이 사람들을 멀리 쫓아내 이 땅에는 황량함이 그득하리라. 13 아직 그곳에 십분의 일이 남아 있다 하여도 그들마저 다시 뜯어 먹히리라. 향엽나무와 참나무가 잘릴 때 거기에 남는 그루터기와 같으리라. 그 그루터기는 거룩한 씨앗이다.” 

 

새 계약의 일꾼 (고린후서3장)

1 우리가 또 우리 자신을 내세우기 시작하려는 것처럼 들립니까? 아니면, 우리도 어떤 사람들처럼 여러분에게 내보일 추천서나 여러분이 써 주는 추천서가 필요하다는 말입니까? 2 우리의 추천서는 여러분 자신입니다. 우리 마음에 새겨진 이 추천서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으며 또 읽을 수 있습니다. 3 여러분은 분명히 우리의 봉사직으로 마련된 그리스도의 추천서입니다. 그것은 먹물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느님의 영으로 새겨지고, 돌판이 아니라 살로 된 마음이라는 판에 새겨졌습니다. 4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이러한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5 그렇다고 우리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스스로 무엇인가 해냈다고 여긴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의 자격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6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새 계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계약은 문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 7 돌에 문자로 새겨 넣은 죽음의 직분도 영광스럽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곧 사라질 것이기는 하였지만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 때문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습니다. 

8 그렇다면 성령의 직분은 얼마나 더 영광스럽겠습니까? 9 단죄로 이끄는 직분에도 영광이 있었다면, 의로움으로 이끄는 직분은 더욱더 영광이 넘칠 것입니다. 10 사실 이 경우, 영광으로 빛나던 것이 더 뛰어난 영광 때문에 빛을 잃게 되었습니다. 11 곧 사라질 것도 영광스러웠다면 길이 남을 것은 더욱더 영광스러울 것입니다. 12 우리는 이러한 희망을 가지고 있기에 아주 담대히 행동합니다.

13 그리고 우리는, 광채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이스라엘 자손들이 쳐다보지 못하게 하려고 자기 얼굴에 너울을 드리운 모세처럼 하지도 않습니다. 

14 그런데도 이스라엘 자손들은 생각이 완고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까지도 그들이 옛 계약을 읽을 때에 그 너울이 벗겨지지 않고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15 사실 오늘날까지도 모세의 율법을 읽을 때마다 그들의 마음에는 너울이 덮여 있습니다16 그러나 주님께 돌아서기만 하면 그 너울은 치워집니다. 

17 주님은 영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18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거듭 부활 축하드리며 곰곰히 묵상해 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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