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성당 닫집

2015. 2. 22. 오후 6:11:41

글자

 

 닫집

건축에 있어 제단이나 무덤 위에 있는 캐노피.baldachino, baldaquin이라고도 쓰며, ciborium이라고도 함.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당을 보고 ]

백색 대리석과 황금 조각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휘황 찬란한 거대한 성당 내부에서 저

안쪽 정면에는..... 대담하게 휘감아 비튼 금장식이 호화로운

"베르니니의 청동닫집" 이 자리하고!!!!!

 

그 너머로 집 주인인 베드로의 의자 가 보이는 데, 상부에 환한 햇살은 무슨 광채를 뜻하는 걸까?  그 외에도 다소 어둡기는 해도 구석구석 볼만한 건축물과 조각상이 늘어서 무수히 맣은 관광객들이 카메라에 정신을 빼앗기게 한다.

 

 

연방 터지는 후래쉬 너머 고개를 들면 아! 닫집 바로 위로 황금색 쿠폴라 가 높다랗게 솟아 있어 보는이의 경탄을 자아내게 한다.

지하실에는 베드로와 요한 13세의 무덤 이 있다는 데, "돔" 으로 올라가는 쪽을 택하다 보니 시간이 없어 보지 못하는게 아쉽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법!! 그러면 이 장엄하고 호화찬란한 교회가 왜 건축된 것일까? 원래 묘지로 베드로가 묻힌 이곳에 326년에 콘스탄티누스황제가 그리스도교 교회를 세운게 처음이라는 데.....

성당만큼이나 유명한 청동 닫집...이 닫집 바로 아레에 베드로의 무덤이 있다고 한다...
성베드로 대성당

닫집, 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건설한 바티칸시티의 성베드로 대성당(1624~33)

기둥에 의해 지지되며 특히 독립구조로 주변의 벽과 분리되어 있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이 용어는 스페인어 baldaquin에서 유래된 것으로 '정성스럽게 수를 놓은 비단재료'를 뜻하는데, 바그다드에서 수입되어 제단이나 문간 위에 캐노피처럼 매달려 있었다. 훗날 닫집이 제단 위의 독립해 있는 캐노피를 대표하게 되었다.

초기의 닫집은 라벤나와 로마에서 발견되었다. 일반적인 형태는 엔타블레이처를 지지하는 4개의 기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기둥들은 피라미드형이나 박공 지붕이 얹혀진 작은 크기의 열주를 받치고 있다.

로마네스크 시대에는 일반적으로 엔타블레이처 대신 아치가 나타났고, 박공지붕은 밀라노에 있는 산토암브로조 교회에서처럼 종종 4면 위에 세워졌다. 고딕 시대의 닫집은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이탈리아 국외에서는 간헐적으로 사용된 것 같다. 그러나 귀중한 고딕 양식의 한 예인 19세기 비올레 르 뒤크가 재건한 파리의 생트샤펠교회(1247~50 건설) 안에는 많은 유형들이 남아 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이러한 닫집 사용이 일반화되었고, 17세기에는 정교한 구조물들이 만들어졌다. 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설계한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대성당은 제단용으로 설계했던 거대한 청동 볼닫집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정의

불단이나 어좌 위에 목조건물의 처마구조물처럼 만든 조형물.

 

연원 및 변천

닫집은 산개(傘蓋)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면 주인공 머리 위에는 항상 양산이 받쳐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인도의 불교와 힌두교 사원에서 신상위에는 항상 천으로 만들고 화려한 장식을 한 보개(寶蓋)가 씌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산개와 보개가 건축화하여 닫집으로 만들어졌다. 따라서 산개나 보개는 모두 양산에서 기원하여 닫집으로 발전해 갔음을 알 수 있다.

 

내용

불전이나 궁궐 정전에는 불단이나 어좌 위에 작은 집 모형을 만들어 걸었는데, 이를 닫집이라고 부르며 한자로는 당가(唐家)라고 쓴다. 『인정전영건도감의궤(仁政殿營建都監儀軌)』등에는 어좌위에 설치되었던 닫집의 도면이 수록되어 있다. ‘닫’은 ‘따로’라는 옛말이므로 ‘따로 지어놓은 집’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산개가 등장하는 것으로 미루어 불전의 닫집과 궁궐의 닫집은 별개로 발전과정을 거쳐 왔다고 추론할 수 있다.

부처를 중앙에 모셨던 고대 불전에서는 금당이 부처님 집이었으므로 닫집이 필요 없었다. 그러나 예불의례가 금당 바깥을 도는 요잡(繞匝)중심이었다가 차츰 금당 안으로 들어가 절하는 것으로 바뀌면서 마루가 깔리고 불단이 뒤로 밀리면서 금당 안에 부처님의 집을 별도로 만들기 시작한 것이 닫집으로 정착하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닫집은 불국정토의 궁전을 가리키는 적멸궁, 칠보궁, 만월궁 등을 상징하는데, 이들은 각각 석가, 아미타, 약사를 모시는 궁전이다.

닫집은 모양에 따라 보궁형(寶宮形), 운궁형(雲宮形), 보개형(寶蓋形)이 있다. 보궁형은 공포를 짜 올려 건물처럼 만든 화려한 닫집으로 가장 많다. 공포 아래에는 짧은 기둥이 달려 있는데 이를 헛기둥[虛柱]이라고 한다. 운궁형은 앞쪽에 장식판재인 염우판(廉遇板)이나 적첩판(赤貼板)만을 건너지르고 안쪽에 구름, 용, 봉, 비천 등으로 장식한 천장을 말한다. 대표적으로 개심사 대웅전, 봉선사 금당에서 볼 수 있다. 보개형은 천장 일부를 감실처럼 속으로 밀어 넣은 형태인데 고대 불전에서 많이 보인다. 대표적으로 무위사 극락전과 봉정사 대웅전에서 볼 수 있다. 보개형은 닫집이라고 하기보다는 보개천장으로 불리며 천장의 한 종류로 분류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의미와 역할은 닫집과 같다. 인정전에서는 닫집과 보개천장이 동시에 설치된 사례도 볼 수 있다.

 

 

 

 

한국 천주교의 중심  명동성당

 

명동성당은 서울대교구의 주교좌성당이며 한국교회의 상징입니다. 

공중에서 보면 십자가의 모양을 하고 있으며 서양 중세 고딕양식 건물로서 처음으로 천주교 신앙 집회가 열린 장소이며,  그 문화적 가치가 높이 평가되어 사적 258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북경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영세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 베드로가 이벽에게 세례를 주고 여러 학자들을 중심으로 모임을 가지니 이때가 1784년으로 우리나라 신앙 공동체의 첫 시작이며 이는 선교사 없이 평신도에 의해 자발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인 것으로 세계에서 유래없는 일이었습니다.

처음엔 수표교 근처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모임을 갖다가 장소도 협소하고 양반의 집에 평민들이 자주 드나드는 것이 여의치 않자 명례방에 있는 중인계급의 역관 김범우의 집으로 장소를 옮겨 모임을 갖던 중 노름판으로 오인한 형조의 포졸들에게 발각됨으로써 모두 체포되어 성물, 성화, 서적등은 압수 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1785년의 을사추조적발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양반집 자제들은 문중에서 다스리도록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고 집주인인 김범우 토마스만 잡혀서 매를 맞고 유배가서 죽게되고, 이 사건을 시작으로 100여 년간 크고 작은 박해가 약 14차례나 있었고, 1801년의 신유박해, 1839년의 기해박해, 1846년의 병오박해, 1866년의 병인박해는 이른바 4대 박해라고 불리는 큰 박해였습니다.


100여년간의 처참하고 힘든 박해가 끝나고,  1882년 한미 통상조약이 체결되자 당시 7대 교구장 블랑주교는 이 땅에도 종교의 자유가 주어질 것을 예견하고 명례방 근처 윤대감의 집터를 매입하고 여러 차례에 걸쳐 지금의 부지를 마련하였습니다.

파리외방전교회 코스트 신부님의 설계, 감독하에 1892년에 짓기 시작해 1898년 5월 29일에 축성하고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마리아께 봉헌된 성당입니다.

이 성당에 사용된 벽돌은 지금의 국군 중앙성당 자리인 와고개 흙으로 구웠는데 와고개는 조선시대에 기와를 굽던 곳으로, 마지막 박해였던 병인박해 때 우리 순교자들을 임시로 매장했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벽돌 한장 한장에는 우리 순교자들의 피와 땀이 서려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는 기해박해 때 순교하신 모방, 샤스탕 신부님, 앵베르 주교님, 최경환 프란치스코, 김성우 안토니오 등 다섯 분의 성인과  병인박해때 순교하신 쁘르티에 신부님, 쁘티니콜라 신부님과 이 에메렌시아 그리고 무명 순교자 한분 등 모두 아홉분의 유해가 모셔져 있습니다.

조선교구 2대 교구장이신 앵베르 주교님은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주교님과 신부님을 보호하려는 교우들의 희생이 잇따르고 배교자의 밀고로 주교님의 신분이 노출되자 포졸들에게 자헌하시고 두 신부님에게도 자수를 권하였습니다.

그리고 새남터에서 세 분이 군문효수형으로 함께 순교하셨습니다.

세 분 성직자의 시신은 처형된 지 20여일 동안 새남터 모래사장에 버려진채 뭍혀있었는데 박바오로가 군인들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이용해 목숨을 걸고 시신을 거두어 노고산(현재 서강대 자리)에 4년간 임시로 모셨다가 선산인 삼성산으로 옮겨 모셨고 1901년 박바오로의 아들 박순집베드로가  발굴하여 이곳 명동성당 지하묘소로 옮겨 모시게 된 것입니다.

명동성당의 내부

대성당의 제대위 중앙에 성모자상이 모셔져 있고 주교좌를 의미하는 "닫집"이 있습니다.
제대와 감실 뒤쪽 벽면에는 14분의 성화가 병풍처럼 모셔져 있습니다. 이는 12제자와 사도 바오로, 바르나바입니다.
그 뒤 스테인드 그라스에는 환희, 고통, 영광의 신비 묵주기도 15단이 그려져 있고
제대 오른쪽 벽에는 김대건신부님상과 이승훈의 초상, 79위 복자화가 있고
왼쪽에는 이벽, 김범우의 초상과 명례방 공동체모습의 그림이 모셔져 있습니다 
또한 건축가의 주보 성인인 성 베네딕또 상을 모신 것은 성당 건축 당시 벽이 자주 무너지는 사고가 생겨 성인께 기도한 후 성당을 무사히 완성할 수 있었기에 모시게 되었습니다.


➀ 제대위 성 모자상
   명동대성당이 성모님께 봉헌된 것을 기리기 위해 성당 중앙에 모심

➁ 전면 스테인 그라스는 묵주기도 영광,고통,환희의 신비 15단 그림
   1982년 화가 이남규에 의해 복원 제작

➂ 제대뒤 14사도 초상 - 1925년 우석 장발 화백 作
   왼쪽부터 성 마티아, 시몬, 바로롤메오, 야고버, 요한, 안드레아, 베드로, 
     바오로, 야고버, 토마스, 필립보, 마태오, 다태오, 바르나바

주교좌 상부 닫집과 중앙제대는 ‘강대’(강론대)를 해체하여 만든 것
   ‘강대’는 1920년 본당신부 프와넬 신부가 뮈델주교 성성 25주년 기념으로 만든 것으로 위치는 제대에서 서쪽 즉 오른쪽 세 번째 기둥에 나선형계단으로 올라가게끔 되어 있는데 당시 베네딕도 수도원  목공부 독일 수사들이 만듬. 1977년 계단 부분 파손이 있자 아예 해체하여 제대와 독서대를 만들고 상부 닫집은 주교좌 위로 옮김


➅ 제대의 오른쪽 소제대 위에는 성 김대건 신부상이 있고, 왼쪽 위에는 성 베네딕도 상이 있음

 

중앙제대가 잘보입니다.

 

 

 

        

          멀리 베네딕도상이 보이네요.

 

김대건신부님상과 닫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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