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부시대의 신학: 그리스도의 신성-아리우스 논쟁

‘하나님과 예수는 어떤 관계인가?’, ‘예수는 신인가 인간인가?’라는 의문들은 교부시대의 신학에 있어 중요한 논쟁점이었습니다. 예수에 관한 이 고민들은 ‘기독론(christology)’이라는 신학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기독론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이 되는 예수를 논의함으로써 신앙 체계의 근간을 세우는 분야입니다. 교부시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동일본질(homo ousios)’이라는 결론을 내림으로써 그리스도교 신앙의 확립에 있어 초석을 다진 시기였습니다. 예수의 본성에 관한 이러한 기독론적 발전은 후에 하나님의 본성을 고민하는 ‘삼위일체론’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교부 신학자들은 신약성경에서 예수를 나타내는 여러 진술과 암시와 상징들을 통해 그리스도교 신앙에 있어 예수가 어떤 인물인지를 밝히고자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땅에서 태어나 복음을 전파하였고 십자가 위에서 죽었던 예수는 분명 육신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주어진 문제는 그 예수가 평범한 사람들과 어떻게 다른 분이었는지, 인간의 구원과 예수는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인지, 하나님과 예수는 어떤 관계인지에 대해 해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초기 기독론에서 이들의 논의는 주로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신가?’라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문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부활한 예수를 향해 도마가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요한복음 20:28)이라고 외치는 모습이나 “그리스도는 만물 위에 계시는 하나님이시며, 영원토록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십니다.”(로마서 9:5)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 등, 여러 복음서와 사도들의 서신서에서 예수를 신격으로 나타내고 있는 듯한 내용의 구절들이 보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이단으로 배격되었던 기독론 중에는 ‘에비온주의(Ebionitism)’와 ‘가현설(Docetism)’이 있었습니다. 에비온주의는 예수를 일반적인 인간들과 완전히 동일한 존재라 생각하여 예수를 통한 구원의 의미를 실추시켰고, 가현설은 이와 정반대로 예수의 육신이나 인성이 ‘거짓된 외양(假現)’이라 주장하며 인간으로서의 예수를 완전히 부정하였습니다. 이 두 사상의 기독론은 예수의 본성을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이해하여 그리스도교에 있어 예수의 의미를 제한시켰다는 점에서 반대파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이 시대에 등장한 유스티누스의 새로운 기독론은 이 두 극단적인 기독론을 잠식시키고, 그리스 철학과 신앙 사이의 연합 가능성을 조명하며 크게 부각되었습니다.

유스티누스(Justinus)와 오리게네스(Origenes)
2세기의 그리스도교 변증가인 유스티누스는 그리스 철학을 바탕으로 로고스 기독론을 전개하였습니다. 그의 기독론은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서 사셨습니다.”(요한복음 1:14)라는 성경의 증언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우리말로 흔히 ‘말씀’이라 번역되는 이 그리스어의 본래 단어가 ‘로고스(logos)’라는 점에 주목하여, 유스티누스는 이 구절에 당시 스토아 학파와 중기 플라톤주의에서 모든 지식의 궁극적 원천으로서 통용되고 있던 로고스의 의미를 접목시켰습니다. 그에 따르면, 창세 이전부터 존재하였던 하나님의 진리인 ‘로고스’는 이 세상 사람들 속에 ‘로고스의 종자(logos spermatikos)’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는데, 이것을 통해 사람들은 부분적으로 나마 진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 철학에는 이러한 로고스가 일부 나타나기 때문에, 철학이 신앙의 진리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로고스를 깨닫는 진정한 길이 로고스의 완전한 현현인 그리스도 예수에게 있다는 점 또한 분명하게 강조하였습니다. 유스티누스가 이야기하는 그리스도교 신앙이란 예수 이전에 세상에 퍼져있던 로고스의 종자들, 바로 이방 철학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암시와 예견들을 바탕으로, 로고스의 현현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하게 세상에 이룩된 하나님의 진정한 진리입니다. 유스티누스는 인간이 그리스 철학 속에서 신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 있고, 그 의문을 거쳐 예수가 완전한 로고스의 현현이라는 것을 깨달아 구원에 이르는 진리를 알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이렇듯 그리스 철학이 그리스도교를 위한 발판이 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철학의 세계 속에서 그리스도교의 위치를 견고하게 세우는 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유스티누스의 로고스 기독론은 3세기의 신학자인 오리게네스에게 전해져 그리스도의 본성에 관한 고민을 일으켰습니다. 인간인 예수가 어떻게 로고스와 관계 맺고 있는지, 예수를 어떻게 로고스의 현현으로 이해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오리게네스는 예수의 인간 육신 가운데 이루어지는 인간 영혼과 로고스의 결합을 설명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인간으로서의 예수와 신적인 로고스의 밀접한 결합을 통해 예수의 인간 영혼은 하나님의 로고스를 공유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이것을 예증적인 방법으로 설명하길 시도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비유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만일 쇠 덩어리가 계속해서 불 속에 있게 되면 그것은 모든 구멍과 틈새로 열기를 흡수할 것이다. 불이 지속되면, 쇠를 옮기지 않으면 그것은 전적으로 상대방으로 전화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지혜와 로고스 안에 계속 있으면 영혼은 행하고 느끼고 이해하는 모든 것 안에서 하나님이다.”
다른 예시에서 그는 하나님의 진리 계시를 ‘신적인 로고스의 빛’에서 뻗어 나온 하나님의 광선에 의해 인간이 계몽되는 것과 비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로고스와 하나님이 동일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둘은 모두 영원하지만, 로고스가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이 로고스에 대한 오리게네스의 이해였습니다.
지금까지의 내용들은 4세기의 가장 중요한 신학 논쟁인 ‘아리우스 논쟁’의 배경이 되었던 기독론적 발전 과정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아리우스 논쟁은 고전 기독론의 진보에 매우 결정적인 계기이므로 이 논쟁을 이해하기 위해선 여러 넓은 영역의 논의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리우스의 견해나 삶은 우리에게 거의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에게 아리우스가 보낸 편지를 제외하면, 그의 기독론은 모두 그의 반대자들의 글 속에서만 알려져 있기 때문에 이 논쟁은 다소 모호한 측면이 있기도 합니다. 이 글에서 다룰 내용은 교부시대 신학사의 핵심적인 사안으로 연구되었던 논쟁의 전반적인 측면입니다.
아리우스는 하나님만이 모든 존재의 궁극적인 원인이 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리스 철학의 일자설에 많은 영향을 받았던 그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성이나 근원이 있다는 사실에 철저히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하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신관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신성을 지니시고 태초 이전부터 존재하셨던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이라는 다른 신학자들의 주장과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아리우스의 비판자였던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주의자들을 반박함’이라는 글에서 아리우스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아버지는 아니었다. 하나님이 전적으로 홀로 있었고, 아직 아버지가 아니었을 때가 있었다. 오직 후에야 아버지가 되었다. 아들은 언제나 존재하지는 않았다. 무릇 피조물은 무에서 나온다. 따라서 하나님의 로고스도 무에서 존재하게 된 것이다. 그[로고스]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그가 나오기 전까지 그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피조적 존재에도 역시 시작이 있었다.”
이 진술 속에는 아리우스가 로고스의 현현인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여러 피조물들 중 하나로 이해하여, 하나님과 예수가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임을 주장하였다는 사실이 나타나있습니다. “아들은 언제나 존재하지는 않았다.”, “하나님의 로고스도 무에서 존재하게 된 것이다.”, “그[로고스]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라는 그의 표현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창세 이전부터 본래 존재하셨던 하나님 자신과는 달리, 하나님의 로고스인 그리스도는 존재하지 않았던 상태로부터 존재하게 된, 다시 말해 창조된 존재라는 것이 아리우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다른 피조물들과 구별되는 완전한 피조물임을 인정하였지만, 성자가 결코 완전하신 하나님과 동일할 수 없다는 것을 역설하였습니다. 그에 의하면,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에 성자는 성부를 깨달을 수조차 없습니다. 시작이 있는 자는 시작이 없는 자를 이해하거나 파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리우스는 성자가 성부를 알기 위해서는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 마찬가지로 성자 역시 하나님의 은총에 의지하여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신성을 갖춘 분으로 언급하는 성경의 구절에 대해 아리우스는 그것들이 완전한 피조물이신 성자를 공경하기 위한 표현일 뿐, 진정으로 하나님과 예수의 동일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견해를 펼쳤습니다.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하는 것은 그리스도 스스로에게 아들의 본성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지로 아들의 위치를 그에게 부여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 아리우스의 생각이었습니다. 이렇듯 그는 성자의 지위를 성부에게 종속시킴으로써 오직 하나님에게만이 신성과 주권이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려 하였습니다.
아리우스의 기독론에 반대하였던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 아타나시우스는 완전한 피조물인 성자와 그 밖의 다른 피조물들 사이의 차이에 대한 아리우스의 불분명한 해명을 공격하였습니다. 성자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면, 그는 과연 어떤 특징이 있기에 다른 피조물들을 구원할 만한 능력이 있는가라는 의문이 아타나시우스가 지적한 가장 핵심적인 논점이었습니다.

아타나시우스는 죄의 권세를 이기고 피조물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이 오직 유일하신 전능자 하나님뿐이라는 절대적인 전제로부터 그리스도교 신앙이 출발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하였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이 때문에 그 스스로가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피조물을 구원할 수도 없다는 것이 피조물이 처한 상황입니다. 이러한 전제로부터 아타나시우스는 신약성경이 온 세상의 구원자로 증언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 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도출해 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피조물들을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시라면, 그는 피조물 이상의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만이 아리우스주의에서 나타나는 성자와 피조물 사이의 모호한 관계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아타나시우스는 주장하였습니다.
아타나시우스는 또한 그리스도교가 전통적으로 예수께 경배와 기도를 올려왔다는 점에도 주목하였습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피조물들 중 하나라면 그리스도교는 지금까지 피조물을 찬양하였던 우상 숭배에 지나지 않은 것이 됩니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때로부터 사도들을 거쳐 4세기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예배의 모습이 그리스도교의 본질적인 부분이었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그는 이것이 곧 그리스도교가 예수를 성육하신 하나님으로서 경배해 왔음을 나타낸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 사이의 논쟁이 교회의 분열을 초래할 것을 우려한 신학자들은 이 논쟁을 어떻게 결론 내려야 할지를 두고 많은 고민의 과정을 거치게 되었습니다. 두 주장 사이의 타협을 추구하였던 부류의 신학자들은 성부와 성자가 ‘유사 본질’ 또는 ‘유사 존재’라는 의미의 ‘호모이우시오스(homoiousios)’라는 용어를 이 논쟁의 결론으로 선택하였습니다. 이들은 기독론적 논의가 사변적으로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성부와 성자가 근접해있다는 것으로 논의를 확증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와 대립되는 입장에서 성부와 성자 사이의 ‘동일 본질’과 ‘동일 존재’를 주장한 신학자들은 ‘호모우시오스(homoousios)’라는 용어를 주장하였습니다. 이 논쟁은 결국 ‘동일 본질’, ‘동일 존재’을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우세하게 되면서 381년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서 그리스도와 성부가 ‘동일 본질’에 속한다고 선포되어 마무리 지어졌습니다. 후에 이 확증은 교회와 교파를 막론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적 교리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참고
맥글래스, 알리스터, 박종숙 옮김, 『종교개혁 사상입문』, 성광문화사, 1992.
[출처] 교부시대의 신학: 그리스도의 신성-아리우스 논쟁|작성자 YO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