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성인] 성 암브로시오
고대 말-중세 초 특징 모두 반영된 가장 오래된 성인 이미지
성 암브로시오성당에 있는 5세기 제작 모자이크 작품
얼굴·발 아래 그림자는 사실주의 … ‘고대 로마 회화 양식’
단순화된 옷주름·인체 평면화 … ‘중세 로마 회화 특징’
성 암브로시오성당에 있는 5세기 제작 모자이크 작품
얼굴·발 아래 그림자는 사실주의 … ‘고대 로마 회화 양식’
단순화된 옷주름·인체 평면화 … ‘중세 로마 회화 특징’
- 작품 해설 : 〈성 암브로시오〉, 5세기, 모자이크, 성 암브로시오성당 내부의 성 빅토레 인 치엘 도로 경당, 밀라노.
밀라노에서 브레라 다음으로 규모가 큰 미술관의 이름은 암브로시안미술관이다. 또한 밀라노에서 가장 오래되었으며 중요한 성당으로는 단연 암브로시오성당이 꼽힌다. 두 곳 다 밀라노의 주교였던 성 암브로시오(339~397)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밀라노는 수도 로마보다 인구가 많으며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상업도시지만 시내 곳곳에서 이처럼 암브로시오 성인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그가 밀라노의 첫 주교이자 수호성인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로 밀라노 칙령(313년)을 꼽을 수 있다.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리스도교를 믿는 신앙인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선포한 것이 바로 밀라노 칙령이다.
로마제국은 그리스도교를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로마제국에는 수천명의 신들이 있었고, 율리우스 시저 이후 많은 황제들이 신격화될 정도로 로마제국은 다신교 국가이자 신들의 천국이었다. 그러나 유독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으며,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발각되면 죽음을 면치 못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숨어서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해야만 했다. 로마제국이 그리스도교를 박해한 이유는 그리스도 교인들이 유일신 하느님을 믿었기 때문에 신격화된 황제를 비롯하여 로마제국에서 인정한 다른 우상 신들을 섬기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자유를 인정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 이후 그리스도 교인들은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고, 게다가 380년 테오도시우스 황제 시절에는 그리스도교가 국교가 되었다. 이제 그리스도교는 믿어도 좋은 종교가 아니라 믿지 않으면 안되는 로마제국의 공식 종교가 된 것이다.
이때부터 교회 건축물이 정식으로 탄생하게 되었고, 전례 의식도 틀을 잡아가기 시작했는데 이때가 바로 암브로시오 성인이 밀라노에서 주교로 활동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밀라노는 로마제국의 두 번째 수도이기도 했으니 정치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성 암브로시오는 성 아고스티노, 성 예로니모, 성 그레고리오 대교황과 함께 4대 교부학자 중의 한 분이다. 성인이 쓴 많은 저서와 설교집은 그리스도교의 교리 정립에 뿌리가 되었으며, 당시에는 교리가 아직 성립 단계였기 때문에 성인은 이단교리로부터 정통교리를 지켜내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밀라노에서 가장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성당은 단연 성 암브로시오성당이다. 이 성당은 초기 순교자들의 무덤이 있었던 성 비토레 순교자 무덤 위에 암브로시오 성인이 379년부터 386년에 걸쳐 건립한 곳이다. 바로 이 성당 안에 가장 오래된 성인의 이미지가 남아있다. 5세기에 제작된 모자이크로 인물의 머리 위쪽에 ‘AMBROSIUS’라는 성인의 이름을 써 놓았다. 성인이 선종하고 얼마 되지 않아 제작한 작품이기에 그의 실제 이미지를 기억하려는 노력이 기울여진 듯 얼굴 표현은 상당히 구체적이다. 짧은 머리에 짧은 수염을 하고 있으며 주교 복장을 하고 있는 중년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이 이미지는 암브로시오 성인을 소개할 때 가장 많이 쓰이는 그림으로 고대가 끝나고 중세가 시작된 시기에 제작된 귀한 작품으로 비교적 사실적으로 표현된 성인의 얼굴과 발 아래의 그림자 표현은 사실주의에 바탕을 두었던 고대 로마 회화 양식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으나, 단순화된 옷주름과 인체를 평면화한 모습은 중세 회화 양식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로 밀라노 칙령(313년)을 꼽을 수 있다.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리스도교를 믿는 신앙인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선포한 것이 바로 밀라노 칙령이다.
로마제국은 그리스도교를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로마제국에는 수천명의 신들이 있었고, 율리우스 시저 이후 많은 황제들이 신격화될 정도로 로마제국은 다신교 국가이자 신들의 천국이었다. 그러나 유독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으며,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발각되면 죽음을 면치 못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숨어서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해야만 했다. 로마제국이 그리스도교를 박해한 이유는 그리스도 교인들이 유일신 하느님을 믿었기 때문에 신격화된 황제를 비롯하여 로마제국에서 인정한 다른 우상 신들을 섬기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자유를 인정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 이후 그리스도 교인들은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고, 게다가 380년 테오도시우스 황제 시절에는 그리스도교가 국교가 되었다. 이제 그리스도교는 믿어도 좋은 종교가 아니라 믿지 않으면 안되는 로마제국의 공식 종교가 된 것이다.
이때부터 교회 건축물이 정식으로 탄생하게 되었고, 전례 의식도 틀을 잡아가기 시작했는데 이때가 바로 암브로시오 성인이 밀라노에서 주교로 활동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밀라노는 로마제국의 두 번째 수도이기도 했으니 정치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성 암브로시오는 성 아고스티노, 성 예로니모, 성 그레고리오 대교황과 함께 4대 교부학자 중의 한 분이다. 성인이 쓴 많은 저서와 설교집은 그리스도교의 교리 정립에 뿌리가 되었으며, 당시에는 교리가 아직 성립 단계였기 때문에 성인은 이단교리로부터 정통교리를 지켜내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밀라노에서 가장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성당은 단연 성 암브로시오성당이다. 이 성당은 초기 순교자들의 무덤이 있었던 성 비토레 순교자 무덤 위에 암브로시오 성인이 379년부터 386년에 걸쳐 건립한 곳이다. 바로 이 성당 안에 가장 오래된 성인의 이미지가 남아있다. 5세기에 제작된 모자이크로 인물의 머리 위쪽에 ‘AMBROSIUS’라는 성인의 이름을 써 놓았다. 성인이 선종하고 얼마 되지 않아 제작한 작품이기에 그의 실제 이미지를 기억하려는 노력이 기울여진 듯 얼굴 표현은 상당히 구체적이다. 짧은 머리에 짧은 수염을 하고 있으며 주교 복장을 하고 있는 중년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이 이미지는 암브로시오 성인을 소개할 때 가장 많이 쓰이는 그림으로 고대가 끝나고 중세가 시작된 시기에 제작된 귀한 작품으로 비교적 사실적으로 표현된 성인의 얼굴과 발 아래의 그림자 표현은 사실주의에 바탕을 두었던 고대 로마 회화 양식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으나, 단순화된 옷주름과 인체를 평면화한 모습은 중세 회화 양식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성 암브로시오는 339년 독일 트리어(Trier)의 귀족가문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그리스도교 신자였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신앙 교육을 받았고, 부친이 사망한 후에는 가족이 로마로 이사를 하여 그곳에서 라틴어, 문학, 수사학, 그리스어 등을 공부했다.
365년경 제국의 공무를 맡기 시작하였으며 370년에는 당시 황제 발렌티아누스에 의해 리구리아, 에밀리아 지방의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며 그때 이 지방의 수도는 밀라노였다. 에밀리아와 리구리아는 오늘날까지 같은 이름으로 이어져 오는 이탈리아 북부의 중요한 지방이다. 이때가 암브로시오의 나이가 30이 갓 넘었으니 일찌감치 능력을 인정받아 중요한 인물로 발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방 총독이었던 암브로시오가 밀라노의 주교로 선출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당시 교회는 아리우스파와 정통파가 극심한 대립상태에 있었다. 아리우스파는 주장하기를 그리스도는 신에 의해 구원의 도구로 창조되었으나 신과 동일체는 아니라고 했다.
당시 밀라노의 주교는 아리우스 파였던 아욱센지우스였는데 그가 사망하자 그를 따르던 아리우스파와 정통 교리를 따르던 신자들은 극심한 대립 상태에 빠졌다. 총독이었던 암브로시오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평화적인 방법의 해결을 촉구하는 연설을 했다. 이때 한 아이가 소리쳤다.
“암브로시오를 주교로!”
그러자 군중 전체가 한목소리를 냈다.
“암브로시오를 주교로 선출합시다!”
암브로시오로서는 당시 예비신자로서 아직 세례도 받지 않은 상태였는데 주교를 맡으라니 당황스러운 일이었고, 게다가 성직에는 관심도 갖지 않았었다. 그러나 적대적이었던 아리우스 파와 정통파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그를 원하였고, 대중을 설득하는 타협 능력을 인정받아 그 일대의 주교들은 암브로시오를 주교로 임명할 것을 결정했다. 그리하여 세례를 받은 지 일주일 만에 암브로시오는 주교로 선출되었다.
밀라노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이자 최초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물로서 역사적 의미가 큰 성 암브로시오성당은 암브로시오가 주교였을 당시 직접 건립한 것으로 이후 성인에게 봉헌되었다.
성당이 처음 지어진 것은 379년에서 387년으로 이 곳은 순교자들의 무덤 터이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313년 그리스도교의 종교의 자유를 허락한 밀라노 칙령을 발표했던 건물이 있었던 터였다고 하니 역사적 의미가 크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397년 선종한 후 이곳에 묻혀 오늘날까지 유해가 보존되고 있다.
이 성당은 9세기에 들어서 교회의 제대 뒤쪽 부분을 확장했으며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이 된 것은 10세기 경이다. 이 성당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물로 아치와, 기둥들, 그리고 기둥 머리 조각 장식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성당의 백미는 중세 미술의 보물이기도 한 9세기에 제작된 제대로서 전체가 금과 은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위에 각종 보석으로 장식된 거대한 보물이다.
신자석을 향한 부분에는 그리스도의 생애가, 뒤쪽에는 성 암브로시오의 생애가 부조로 제작된 것으로 중세 성물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밀라노에는 유명한 성당들이 많이 있지만 성 암브로시오성당이 주는 고요함과 신비함, 그리고 평화로움은 그 어느 성당에 겨눌 수 없을 정도라 생각한다
365년경 제국의 공무를 맡기 시작하였으며 370년에는 당시 황제 발렌티아누스에 의해 리구리아, 에밀리아 지방의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며 그때 이 지방의 수도는 밀라노였다. 에밀리아와 리구리아는 오늘날까지 같은 이름으로 이어져 오는 이탈리아 북부의 중요한 지방이다. 이때가 암브로시오의 나이가 30이 갓 넘었으니 일찌감치 능력을 인정받아 중요한 인물로 발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방 총독이었던 암브로시오가 밀라노의 주교로 선출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당시 교회는 아리우스파와 정통파가 극심한 대립상태에 있었다. 아리우스파는 주장하기를 그리스도는 신에 의해 구원의 도구로 창조되었으나 신과 동일체는 아니라고 했다.
당시 밀라노의 주교는 아리우스 파였던 아욱센지우스였는데 그가 사망하자 그를 따르던 아리우스파와 정통 교리를 따르던 신자들은 극심한 대립 상태에 빠졌다. 총독이었던 암브로시오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평화적인 방법의 해결을 촉구하는 연설을 했다. 이때 한 아이가 소리쳤다.
“암브로시오를 주교로!”
그러자 군중 전체가 한목소리를 냈다.
“암브로시오를 주교로 선출합시다!”
암브로시오로서는 당시 예비신자로서 아직 세례도 받지 않은 상태였는데 주교를 맡으라니 당황스러운 일이었고, 게다가 성직에는 관심도 갖지 않았었다. 그러나 적대적이었던 아리우스 파와 정통파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그를 원하였고, 대중을 설득하는 타협 능력을 인정받아 그 일대의 주교들은 암브로시오를 주교로 임명할 것을 결정했다. 그리하여 세례를 받은 지 일주일 만에 암브로시오는 주교로 선출되었다.
밀라노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이자 최초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물로서 역사적 의미가 큰 성 암브로시오성당은 암브로시오가 주교였을 당시 직접 건립한 것으로 이후 성인에게 봉헌되었다.
성당이 처음 지어진 것은 379년에서 387년으로 이 곳은 순교자들의 무덤 터이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313년 그리스도교의 종교의 자유를 허락한 밀라노 칙령을 발표했던 건물이 있었던 터였다고 하니 역사적 의미가 크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397년 선종한 후 이곳에 묻혀 오늘날까지 유해가 보존되고 있다.
이 성당은 9세기에 들어서 교회의 제대 뒤쪽 부분을 확장했으며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이 된 것은 10세기 경이다. 이 성당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물로 아치와, 기둥들, 그리고 기둥 머리 조각 장식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성당의 백미는 중세 미술의 보물이기도 한 9세기에 제작된 제대로서 전체가 금과 은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위에 각종 보석으로 장식된 거대한 보물이다.
신자석을 향한 부분에는 그리스도의 생애가, 뒤쪽에는 성 암브로시오의 생애가 부조로 제작된 것으로 중세 성물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밀라노에는 유명한 성당들이 많이 있지만 성 암브로시오성당이 주는 고요함과 신비함, 그리고 평화로움은 그 어느 성당에 겨눌 수 없을 정도라 생각한다
주교가 된 이후 암브로시오는 가진 재산을 모두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누이인 성녀 마르첼리아나를 위해서는 부동산을 조금 남겨두는 등 세상사를 정리했다. 신학에 대한 지식이 부족함을 알았기에 교부들의 저서를 공부했음은 물론 사목활동에도 열심이어서 매일 미사를 집전하였고, 늘 방문을 열어놓고 그를 찾는 사람들을 맞이했으니 신자들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 성인을 존경하였다.
당시에는 아리우스파가 기세를 떨쳤지만 그는 정통 교리를 지켜내는데 무엇보다도 큰 기여를 했다. 그 예로 386년 당시 황제였던 테오도시우스가 아리우스파의 승인을 법으로 선포했고, 이들의 모임을 방해하는 자들은 사형에 처한다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주교였던 암브로시오는 이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관할 구역 단 한 곳의 교회도 이단자들에게 내주지 않았다. 신자들은 황제의 법을 어긴 암브로시오 주교를 걱정하여 함께 교회에 들어가 바리게이드를 쳤고, 황제군은 교회를 포위하고는 안에 있던 자들이 굶어 죽을 때까지 시간을 끌었다. 그러나 부활절 날 문을 열어보니 이들은 모두 살아 있었고, 암브로시오는 신자들에게 자신이 작곡한 성가를 가르치고 있었다고 한다. 성인이 선창하면 신자들은 응답하였고, 혹은 신자들끼리 서로 응송하면서 성가를 부르고 있었다. 가톨릭교회에서 성가가 도입되는 순간이었다.
암브로시오는 후에 교회와 황제와의 관계를 ‘황제는 교회 안에 존재하며 그 위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의 저서에서 명확히 했다. “암브로시오는 교회와 국가 간의 문제를 다룬 최초의 교부로서 교회가 고유한 영역에서는 최고권을 가졌으며, 도덕의 수호자라는 사실을 황제에게 인식하게 하였다.”라고 가톨릭 대사전은 소개하고 있다.
암브로시오가 주교의 직책을 맡았던 시절 교회와 황제와의 관계를 일깨워주는 또 하나의 유명한 사건이 있다. 390년 테살로니카에서 7000명이 희생되는 대학살이 자행되었다. 이 명을 내린 자는 테오도시우스 황제로서 그는 테살로니카인들의 폭력을 다스리기 위해 이 명령을 내렸다. 이에 대해 암브로시오 주교는 황제에게 공개적으로 참회할 것을 촉구하였고, 만일 응하지 않으면 그의 봉헌을 제단에서 받지 않을 것이며, 미사 집전도 거행하지 않겠다고 선포했다. 결국 황제는 만인이 보는 가운데 주교 앞에서 무릎을 꿇고 참회해야만 했다. 이 황제가 바로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정한 테오도시우스인데 395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사망하자 암브로시오 주교는 황제를 위해 애도사를 썼다고 한다.
이 사건은 신앙 앞에서 지위의 고하는 중요하지 않으며, 황제 역시 일반 신자와 신 앞에서 동일함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 황제가 사망한 2년 후인 397년 4월 4일 암브로시오 성인도 선종하였다. 사망 직전 성인은 십자가 형태로 팔을 편 채 몇 시간 동안 기도를 하다가 영면하였다고 한다. 성인의 유해는 지난주에 소개한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오성당 제대 아래 안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 암브로시오의 꿈’이라는 이 그림은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의 성 마르티노 경당에 그려진 벽화이다. 내용은 성인이 미사를 집전 하던 중 첫 제2독서인 서간을 읽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아무도 그를 깨우지 않아 미사가 잠시 중단되었다. 몇 시간이 지나서 한 사제가 성인을 깨우자 암브로시오 성인이 말하기를 친구 성 마르티노가 선종하여 잠시 그의 장례식에 다녀왔다고 설명했다는 것이다. 두 성인은 같은 해인 379년 사망했다.
그림은 성인이 앉아서 잠을 자고 있는 사이 한 사제가 어깨를 살짝 흔들어 깨우고 있으며, 또 다른 성직자는 성인 앞에서 성서를 들고 있는 광경인데 마치 눈앞에서 펼쳐지듯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당시에는 아리우스파가 기세를 떨쳤지만 그는 정통 교리를 지켜내는데 무엇보다도 큰 기여를 했다. 그 예로 386년 당시 황제였던 테오도시우스가 아리우스파의 승인을 법으로 선포했고, 이들의 모임을 방해하는 자들은 사형에 처한다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주교였던 암브로시오는 이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관할 구역 단 한 곳의 교회도 이단자들에게 내주지 않았다. 신자들은 황제의 법을 어긴 암브로시오 주교를 걱정하여 함께 교회에 들어가 바리게이드를 쳤고, 황제군은 교회를 포위하고는 안에 있던 자들이 굶어 죽을 때까지 시간을 끌었다. 그러나 부활절 날 문을 열어보니 이들은 모두 살아 있었고, 암브로시오는 신자들에게 자신이 작곡한 성가를 가르치고 있었다고 한다. 성인이 선창하면 신자들은 응답하였고, 혹은 신자들끼리 서로 응송하면서 성가를 부르고 있었다. 가톨릭교회에서 성가가 도입되는 순간이었다.
암브로시오는 후에 교회와 황제와의 관계를 ‘황제는 교회 안에 존재하며 그 위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의 저서에서 명확히 했다. “암브로시오는 교회와 국가 간의 문제를 다룬 최초의 교부로서 교회가 고유한 영역에서는 최고권을 가졌으며, 도덕의 수호자라는 사실을 황제에게 인식하게 하였다.”라고 가톨릭 대사전은 소개하고 있다.
암브로시오가 주교의 직책을 맡았던 시절 교회와 황제와의 관계를 일깨워주는 또 하나의 유명한 사건이 있다. 390년 테살로니카에서 7000명이 희생되는 대학살이 자행되었다. 이 명을 내린 자는 테오도시우스 황제로서 그는 테살로니카인들의 폭력을 다스리기 위해 이 명령을 내렸다. 이에 대해 암브로시오 주교는 황제에게 공개적으로 참회할 것을 촉구하였고, 만일 응하지 않으면 그의 봉헌을 제단에서 받지 않을 것이며, 미사 집전도 거행하지 않겠다고 선포했다. 결국 황제는 만인이 보는 가운데 주교 앞에서 무릎을 꿇고 참회해야만 했다. 이 황제가 바로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정한 테오도시우스인데 395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사망하자 암브로시오 주교는 황제를 위해 애도사를 썼다고 한다.
이 사건은 신앙 앞에서 지위의 고하는 중요하지 않으며, 황제 역시 일반 신자와 신 앞에서 동일함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 황제가 사망한 2년 후인 397년 4월 4일 암브로시오 성인도 선종하였다. 사망 직전 성인은 십자가 형태로 팔을 편 채 몇 시간 동안 기도를 하다가 영면하였다고 한다. 성인의 유해는 지난주에 소개한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오성당 제대 아래 안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 암브로시오의 꿈’이라는 이 그림은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의 성 마르티노 경당에 그려진 벽화이다. 내용은 성인이 미사를 집전 하던 중 첫 제2독서인 서간을 읽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아무도 그를 깨우지 않아 미사가 잠시 중단되었다. 몇 시간이 지나서 한 사제가 성인을 깨우자 암브로시오 성인이 말하기를 친구 성 마르티노가 선종하여 잠시 그의 장례식에 다녀왔다고 설명했다는 것이다. 두 성인은 같은 해인 379년 사망했다.
그림은 성인이 앉아서 잠을 자고 있는 사이 한 사제가 어깨를 살짝 흔들어 깨우고 있으며, 또 다른 성직자는 성인 앞에서 성서를 들고 있는 광경인데 마치 눈앞에서 펼쳐지듯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