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오로 성인의 생애 6/29 축일

2010. 6. 29. 오후 2:05:32

글자
사도 바오로의 생애
 
예수는 팔레스티나 안에서 활동하면서 주로 이스라엘 백성을 상대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였다. 예수의 비극적인 죽음과 영광스러운 부활 후에 예루살렘에서 창립된 원시 교회도 한동안 예루살렘과 그 주변의 유대 지역에 사는 유대인들에게만 전도하였다. 그 후 33년경 해외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대표 스테파노가 예루살렘에서 순교하자, 박해를 피해 달아난 해외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몇몇이 안티오키아로 가서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였는데(사도 11,19-21), 이것이 이방인 전도의 효시이다. 물론 그전에 필립보가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전도하였고(사도 8,26-40), 베드로가 가이사리아로 가서 고르넬리오 백부장 가족에게 세례를 베푼 사례가 있지만(사도 10,34-38), 그러한 전도는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것이었다.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한 사도는 바르나바와 바오로인데, 그들은 1년 동안 함께 안티오키아에 복음을 선포한 이후에(사도11,25-26) 지중해 동부 여러 지역에서 전도하였다. 특히 바오로는 세차례에 걸쳐 광범위한 전도 여행을 하였고(13,1-21,16), 그의 노력으로 민족적, 지역적 종교가 인류 전체를 향한 세계 종교로 탈바꿈하였다.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삶을 철저히 산 그리스도인이면서 지중해 곳곳에 예수를 널리 전한 사도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인생을 관조한 신학자였다.
 
사도 바오로의 초기 생애
 
1. 출생 연대와 출생지 : 33년 경 스테파노가 예루살렘에서 순교할 때, "사울로라는 젊은이"가 스테파노를 돌로 쳐죽이던 사람들의 겉옷을 맡았다고 한다(사도 7,58). 그리고 바오로는 55년경 에페소에소 필레몬에 게 보낸 편지에서 노인으로 자처한다(필레 1,9). 바오로의 출생 연대 또는 나이를 짐작할 수 있는 곳은 이 렇게 두 구절뿐인데, 젊은이와 노인의 기준이 매우 모호한 까닭에 이런 표현들을 근거로 바오로의 출생 연 대를 밝힌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학계에서는 흔히 5-10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막연하게 추정할 뿐이다.
바오로는 당시 문화,정치적으로 중요한 도시 다르소(Tarsus)에서 태어났는데(사도 9,11 : 21,39 : 22,3), 그 곳은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였고 스토아 학파의 유명한 철학자들이 활약했던 곳으로, 기원전 64년 로 마에 병합되었고 기원전 57년에는 길리기아(Cilicia) 속주의 수도로 승격되었다. 다르소에는 많은 유대인들 이 이민을 와서 정착하고 있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바오로는 태어나고 성장하였으므로 자연스럽게 그는 그리스어와 셈족어를 비롯하여 그 문화들을 익힐 수 있었다.
2. 가족관계 :바오로의 출생, 할례, 성장, 처신 등을 살펴보면 그는 독실한 유대교 가정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았으며 철저한 바리사이로 처신하였다(갈라 1,13-14). 바오로는 베냐민 지파 출신으로 자처하였는데(로 마 11,1, 필립 3,5-6), 당시 제관이나 레위가 아닌 평신도 유대인들은 유다 지파 아니면 베냐민 지파 출신으로 자처하였다. 특이한 점은 그의 부모가 유대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시민권을 획득하였기 때문에 바오로는 태생 로마 시민이었다는 사실이다(사도 16,37-38 : 22,25-29 : 23,27).
3. 이름 :바오로는 친서에서 자신을 일컬어 언제나 '바오로'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도 행전 7장 58절부터 13 장 7절까지에서는 '사울로'라고 하다가, 13장 9절에서는 "일명 바오로라고도 하는 사울로"라고 동일시한다 다음에 13장 13절-28장 25절에서는 '바오로'라고만 하였다. 또한 사도 행전에 세 번(9,1-19 : 22,3-21 : 26,9-18) 나오는 바오로의 회심에서는 그를 일컬어 ' 사울'이라고 하였다(9,4. 17 : 22,7.13 : 26,14). 이 이름은 베냐민 지파 출신이요 이스라엘 초대 임금인 사울에게서 유래한 것으로, 사울을 그리스어로 음역하면 ' 사울로'가 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바오로'는 로마-그리스식 이름이다. 바오로는 이스라엘 문화와 언어권과 아울러 그리스 문화와 언어권에 살았기 때문에 '사울(로)'과 '바오로'라는 이름을 지니게 된 것이다.
4. 직업 :바오로는 전도하면서 스스로 생계비와 전도비를 조달하였다(Ⅰ데살 2,9 : Ⅰ고린 9,4-18). 그는 신자들에게 신세를 지거나 돈 때문에 전도한다는 오해를 받기 싫어하였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였는지 바오로는 밝히지 않았지만 51~52년경 그가 고린토에서 전도할 때 아퀼라와 브리스킬라 부부와 함께 천막 짜는 일을 하였다(사도 18,3).
5. 성격과 언변 :바오로는 유대교를 믿을 때도 남달리 철저하였고 회심한 다음에는 예수를 열성적으로 선포 하였다. 그러나 그는 고린토 교우들로부터 말주변이 없다는 평을 받았고(2고린 10,10), 자기 스스로도 눌 변을 시인하였다(2고린 11,6 : 2,7).
6. 성장 배경 :바오로가 자라면서 받은 영향은 유대교, 그리스 문화, 로마 정치 배경이다. 유대교적인 측면 에서 살펴보면, 바오로는 독실한 유대교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철저한 종교 교육을 받았고(필립 3,5 : 갈라 1,14)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평신도 단체인 바리사이파에 가입하였다(필릴 3,5 : 사도 23,6 : 26,5). 그의 그리스 문화 배경을 살펴보면, 그는 그리스 견유학파와 스토아 학파에서 애용한 '디아트리베' 논법을 즐겨 사용하였는데, '디아트리베'는 반대자의 반론에 맞서 상대방을 2인칭으로 부르면서 독설을 퍼 붓는 논법이다(갈라 5-6장 : 1고린 9장).
7. 교회 박해 :회심 이전에 바오로는 율법을 구원의 방편으로 여겼기에 율법 실천과 연학에 몰두하였다(갈 라 1,13-14 : 필립 3,5-6). 그러므로 그는 율법을 비판한 예수(마태 5,21-48)를 용납할 수 없었고 율법과 성전 체제에 도전하다가 처형된 예수는 "저주받은 자"(갈라 3,13)이지 메시아일 수 없다고 확신하였다. 더 구나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가 부활하였다는 그리스도인들의 주장은 더욱 납득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부활 은 역사의 종말에 있을 미래 사건이지, 역사 한가운데서 일어난 과거 사건일 수는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 다. 그런 까닭에 다혈질인 바오로는 교회를 박해하는데 앞장섰다(갈라 1,13, 23 : 1고린 15,9 : 필립 3,6). 그가 박해한 그리스도인들은 토박이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아니고 율법과 성전에 대해 비판적인 헬라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었다(사도 6,11-14). 사도 행전에 따르면 그는 해외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대표자인 스테파노가 예루살렘에서 순교할 때 가담하였고(7,58-8,1), 시리아 지방의 다마스커스 교회를 박해하기 위해 그곳에 가기도 하였다(9,1-19 : 22,3-21 : 26,9-18).
 
회심
 
33년경 바오로는 다마스커스 교회를 박해하러 가던 도중에 예수를 뵙고 그리스도인 및 사도가 되었는데, 부활한 예수를 뵙고 그분을 대하는 시각이 한 순간에 달라진 회심이야말로 바오로의 앞날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싫어하고 예수를 주님으로 선포하는 데 전심 전력한(2고린 4,5) 사도 바오로는 그 회심 사건을 그저 몇 차례에 걸쳐 간결하게 언급하거나 암시할 뿐이다(갈라 1,15-16 : 1고린 9,1 : 15,8 : 필립 3,12 : 2고린 4,6). 그런데 루가는 세 번에 걸쳐 나오는 이야기는 바오로 체험담이 아니고 루가가 그 체험을 극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바오로는 회심한 다음 율법과 성전에 대해서 비판적인 신앙 조선을 따르면서, 유대 민족 테두리를 넘어 이방인들에게도 활발히 전도하며 스스로 이방인들의 사도로 자처하곤 하였다. 사도 행전에 따르면 회심한 다음 그는 우선 다마스커스 교회를 방문하여 세례를 받고(사도 22,16) 설교하였다고 한다(사도 9,20-22). 그 후에 그는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이들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도 않았고 아라비아로 떠나갔다가 다시 다마스커스로 돌아왔습니다. 그 다음 3년 후에 나는 게파를 만나 보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그와 함께 보름을 묵었습니다"(갈라 1,17-18). 바오로는 아라비아에서 나바테야인의 미움을 사서 다마스코스로 피신하였고, 36년경 다마스커스에 거주하던 나바테야인들이 바오로를 체포하려고 하자 극적으로 탈출하여(2고린 11,32-33 : 사도 9,23-25) 예루살렘으로 상경해서 보름 동안 게파(베드로)와 함께 지냈다. 36년경 예루살렘 교회의 두 지도자 게파와 야고보를 만난 후 바오로는 시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 가서 한동안(36~44경) 전도하였다(갈라 1,19-24 : 사도 9,30 : 11,25).
그 무렵 스테파노의 순교를 계기로 흩어진 해외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시리아의 수도 안티오키아에서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전도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의 교회를 창립하였다(사도 11,19-20).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그 교회를 돌볼 책임자로 키프로스 섬 출신인 사제 바르나바를 파견하였다. 바르나바는 다르소에 있던 바오로를 초빙하여 만 1년 동안(44~45경) 안티오키아 교회를 함께 돌보았는데, 이 사실은 바오로의 서간에는 나오지 않고 사도 행전 11장 19-26절에만 적혀 있다. 바오로는 앞으로 세 차례에 걸쳐 지중해 동부 지역으로 광범위한 전도 여행을 하게 되는데, 이때 안티오키아를 전도의 거점으로 삼았다. 그리고 예수를 신봉하는 안티오키아 시민들을 처음으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렀다(11,26).
 
1) 다마스커스에서 전도함 9,20
2) 아라비아로 감 갈 1,17
3) 다마스커스로 돌아감 갈 1,17
4) 예루살렘 방문 갈 1,18 
5) 교회의 의심을 받음 9,26
6) 바르나바와 친구가 됨 9,27
7) 유다인의 박해 22,17-18
8) 환상 중에 떠날 것을 명령 받음 9,30
9) 다르소로 감 11,25-26
10) 바르나바가 안티오키아로 감 11,26

 
 
 
제1차 전도 여행(45~49년경)
제1차 전도 여행기는 사도 행전 13-14장에 쓰여 있다. 바르나바와 그의 사촌 요한 마르코(골로 4,10)와 바오로는 안티아키아에서 서쪽으로 25㎞ 떨어진 셀류기아 항구에서 배를 타고 바르나바의 고향인 키프로스 섬으로 건너가 살라미스와 총독부가 있던 바포에서 전도하였다. 바포에서 승선하여 터키 남부 지역 베르게에 이르렀을 때 요한 마르코는 전도를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고(사도 13,14),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베르게에서 터키 중부 지역으로 가다가 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이르렀다(사도 13,14). 사도 행전 13장 14-52절에 따르면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두 안식일에 걸쳐 회당에서 설교하였는데, 이방인들은 믿었으나 유대인들은 불신하면서 전도사들을 추방하였다. 그들은 이고니온을 거쳐 리스트라에서 전도하였다. 바오로가 리스트라에서 설교하던 중 태생 앉은뱅이를 고쳐 주자, 주민들은 바르나바는 제우스 신이요 바오로는 헤르메스 신이라고 하면서 그들에게 제사를 바치려고까지 하였다(사도 14,8-18). 리스트라에 이어 데르베에서 전도한 다음(사도 14,20-21). 이제까지 전도한 지역들을 다시 들러 보살핀 후 아딸리아 항구에서 출발지였던 안티오키아행 비를 탔다(사도 14,25-26).

1. 예루살렘 사도 회의(49년경)
제1차 전도 여행 결과 많은 이방인들이 입교하자 그들에게 예수 신앙만을 요구할 것인지 유대교의 율법 준수까지 요구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크게 부각되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예루살렘 사도 회의가 소집되었고, 이 회의에 예루살렘 있던 사도들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바오로와 바르나바도 참석하였다. 이때의 합의 사항은 갈라디아서 2장 1-10절에 잘 나타나 있다. 그것은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의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고, 예루살렘 거주 사도들은 유대인들에게 전도하고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이방인들에게 전도하며, 예루살렘 모 교회의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이방계 교우들을 상대로 모금 운동을 펴기로 약속한다는 내용이다(1고린 16,1-4 : 2고린 8-9장 : 로마 15,25-28). 사도 행전 15장 1-29절에도 사도 회의에 관한 기록이 나오지만 그 결정 사항들이 사뭇 달라 회의에 참석한 바오로의 발언(갈라 2,1-10)에 더 신빙성을 둔다.

2. 안티오키아 사건 :
갈라디아서 2장 11-14절에 따르면 예루살렘 사도 회의 후에 베드로가 안티오키아 교회를 방문하였는데, 당시 그곳 그리스도인들 중 일부는 유대인들이고 또 일부는 이방인들이었다. 그들이 아무 거리낌없이 함께 모여 공동체 회식 겸 성찬을 거행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는 두 부류의 신자들이 함께 어울리는 것을 좋게 여겨 손수 공동체 회식 겸 성찬례를 집전하였다. 이런 소식이 예루살렘 교회로 알려지 자 소동이 일어났다. 유대인은 이방인과 함께 식사해선 안된다는 규정을 베드로가 어겼다는 것이었다.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이 베드로를 찾아와서 그의 행동을 나무라자 그만 베드로는 겁을 먹 고 이방인 교우들과의 회식 겸 성찬을 사양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베드로의 영향을 받아 안티오키아 교회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 심지어 바르나바조차도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의 교제를 끊기 시작함으로써 안 티오키아 교회가 양분되었다. 이에 바오로는 그곳 교우들 앞에서 공공연히 베드로의 잘못을 꾸짖고 유대인 이 이방인과 식사해서는 안된다는 율법 규정 때문에 교회 일치가 파괴될 수 없다는 논리를 폈다. 바오로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사도 회의의 규정에 따라 교회 일치의 논리를 전개하였 던 것이다. 한편 예루살렘 사도 회의와 안티오키아 사건은 제2차 전도 여행 다음에 있었다고 보는 학설도 있다.
 
제1차 전도 여행 코스
1)
키프로스에서 일함 13, 4
실라미스 13, 5
바포 13, 8-11
총독의 회심 13,12
개명 13, 9. 10
2) 베르게(마르코는 떠남) 13,13
3) 안티오키아에서 전도함 13,14-41
4) 이고니온 13,51
5) 리스트라(바오로가 돌로 맞음) 14, 8-19
6) 데르베(마지막 성을 방문) 14,20
7) 돌아오는 여행 14,21-26
 

 
 
제2차 전도 여행(50~52년경)
제2차 전도 여행기는 사도 행전 15장 36절부터 18장 22절에 나온다. 바르나바와 요한 마르코는 키프로스 섬으로 가고, 바오로와 예루살렘 출신의 유대계 그리스도인이요 로마 시민인 실라(사도 15,22. 32. 40 : 16,37)는 이미 제1차 전도 여행을 한 터키 남부 지역을 다시 찾아갔다. 아마도 다르소의 치드누스 강을 따라 북상하여 47㎞ 지점에서 길리기아 관문을 통과한 다음 데르베를 거쳐 리스트라로 갔을 것이다. 바오로는 리스트라에서 디모테오를 제자로 삼고(사도 16,1-3), 이어서 오늘날의 터키 수도인 앙카라 주변을 지나가던 중 갑작스런 발병이 계기가 되어 갈라디아 지방에 이방인 중심의 여러교회를 창립하였다(갈라 4,13-15 : 사도 16,6). 트로아스에 이르러 교회를 세운 다음(사도 16,8-10 : 20,6-12) 밤에 계시를 받고서는 에게 바다를 건너 그리스의 항구 도시 네아폴리스에 닿았다(사도 16,6-11). 그리고 바오로는 그리스 북부 지역 마케도니아에 필립비, 데살로니카, 베레아 교회를, 그리스 남부 지역 아카이아에 고린토 교회를 창설하였고, 네아폴리스에 닻을 내린 다음 에냐시아 국도를 따라 15㎞ 내륙으로 들어가 필립비에서 전도하였다(사도 16,13-15). 필립비 교회는 바오로가 유럽 대륙에 세운 첫 번째 교회이며, 바오로의 생계와 전도를 물심 양면으로 후원하였다. 필립비 전도 말기에 바오로는 점쟁이 노비에게서 점귀신을 떼어 준 관계로 감옥에 갇혔고, 그 기회에 간수의 가족을 입교시켰다. 필립비를 떠난 바오로는 암피볼리스와 아폴로니아를 거쳐 마케도니아의 수도 데살로니카로 가소 전도하였다. 바오로는 관례대로 안식일에 유대교 회당에 가서 설교하여 많은 시민을 입교시켰으나, 우대인들이 그의 전도를 반대하자 바오로 일행은 올림푸스 산중에 있는 75㎞ 떨어진 베레아 마을로 피신하였다(사도17,1-10 : 1데살 2,13-16).

바오로가 베레아 마을에서 전도할 때 데살로니카에 사는 유대인들이 와서 훼방하는 바람에 바오로는 실라와 디모테오를 베레아에 남겨 두고 홀로 아테네로 갔으나(17,10-15), 당시 정치적, 경제적으로 몰락하였지만 문화적으로는 수준이 높은 아테네에서의 바오로의 설교는 거의 성과가 없었다(사도 17,16-34)l. 실라와 디모테오가 아테네로 오자 바오로는 데살로니카 교회 형편을 알아보고 그곳 교우들을 재교육하기 위하여 디모테오를 데살로니카로 보냈으며(1데살 3,1-5), 바오로는 실라를 데리고 아테네에서 남쪽으로 89㎞ 떨어진 고린토로 가서 18개월 동안 머무르면서 큰 교회를 세웠다(사도 18,1-17). 그리고 디모테오가 고린토로 와서 데살로니카 교회의 실정을 보고하자 바오로는 데살로니카로 편지를 써 보냈는데, 이것이 곧 '데살로니카 전서'이다. 이는 바오로의 편지들 중에서 첫 번째 편지일 뿐만 아니라, 신약성서를 통틀어 제일 먼저 쓰여진 작품이다.

고린토 전도 말엽에는 유대인들이 바오로를 아카이아 총독 갈리오의 법정으로 끌고 가서 고발하였다. 갈리오 총독은 당대의 유명한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의 형으로서 매우 현명한 사람이라 함부로 종교 문제에 개입하지 않았다9사도 18,12-17). 델피에서 발견된 금석문에 의하면 갈리오는 51~52년 아카이아 총독으로 재직하였고 바오로 역시 같은 때에 고린토에 체류하였으므로 바오로의 연표들 가운데서 가장 확실한 연대이다. 사도 바오로는 겐크레아 외항에서 배를 타고 아시아 지방의 수도 에페소, 이스라엘 총독이 상주하던 가이사리아,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를 거쳐 안티오키아로 돌아갔다(사도 18,18-22).
2차전도여행 코스
1)
2)
3)
4)
5)
6)
7)
8)
9)
10)
11)
시리아와 길리기아 15,41
리스트라에서 디모테오가 합류함 16, 1-3
프리기아와 갈라디아 16, 6
트로아스에서 본 환상 16, 9
필립비에서 리디아와 간수의 회개 16,13-34
데살로니카 교회 설립 17, 4
베레아 사름들의 성경 공부 17,11-12
아테네 아레오파고 법정에서의 설교 17,16-33
고린토에서 환상을 봄. 교회 설립 18, 1-18
에페소에 잠깐 들림 18,19-20
안티오키아로 돌아옴 18,22
 

 
제3차 전도 여행(53~58년경)
 
사도 행전 18장 23절부터 21장 16절은 제3차 전도 여행기이다. 바오로는 제2차 전도 여행 때 설립한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들을 돌본 다음 아시아 지방의 수도 에페소로 가서 27개월 가까이 활약하였다(사도 19,8-10 : 20,31). 에페소에서는 전도가 잘되었고(t1고린 16,9), 바오로는 제자 에바프라를 시켜 에페소 동쪽 500리쯤에 위치한 골로사이, 라오디게이아, 히에라폴리스에 교회를 세웠다(골로 4,13). 또 갈라디아 지방의 여러 교회에 유대주의를 부르짖는 그리스도인들이 설친다는 소식을 듣고는 '갈라디아서'를 써 보냈다(갈라갈라 1,6-10). 에페소에서는 고린토 교회로 편지를 3통 써 보냈는데,

첫째 편지(1고린 5,9. 10)는 분실되었고, 셋째 편지(눈물 편지, 2고린 2,4 : 7,8)는 편린만(2고린 10-13장) 전해 오며, 단지 둘째 편지만 고린토 전서로 전해진다. 또한 에페소의 로마군 부대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는 동안(필립 1,13 : 2고린 1,8-10) 필립비 교회에, 그리고 골로사이 교회의 신자 필레몬에게 편지를 써 보냈다. 감옥에서 석방된 후 마케도니아로 건너가서 고린토 교회로 넷째 편지를 써 보냈는데(2고린 2,12-13 : 7,5-7 : 사도 20,1), 그것이 고린토 후서 1-9장이다. 마침내 바오로는 에페소를 떠나 마케도니아를 거쳐 고린토로 가서 석 달 가량 머무르는 동안(사도 20,3) 자신의 사상을 총정리해서 로마 교우들에게 보냈는데, 이것이 '로마서'이다. 고린토 교회에서 로마서를 집필한 다음 58년 필립비 교회로 가서 과월절을 보내고(사도 20,6), 에페소 남쪽에 자리잡은 항구 도시 밀레도스, 두로, 하이파, 가이사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사도20,7-21,6).

 
3차전도여행코스
1)
2)
3)
4)
5)
6)
7)
갈라디아와 프리기아를 방문함 18,23
에페소에서 2년 6개월을 지냄 19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20, 1-2
드로아에서 설교함 20, 6-12
에페소 원로들에게 권면함 21, 1-4
띠로 21, 1-4
가이사리아 21, 8
 

 
 
로마호송(58~63년경)
바오로가 상경하여 성전에서 체포되기까지의 경위는 사도 행전 21장 17-36절에 적혀 있다. 아시아 출신 해외 유대인들이 나지르 서원 제사를 바치려고 성전에 온 바오로를 알아보고 민족과 종교의 배신자로 규탄하고 그를 폭행하였다. 다행히 성전 북부에 주둔한 로마군인들이 구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으나, 안티바드리스를 거쳐(사도 23,31) 지중해변 가이사리아 총독부 감옥으로 이송되어 미결수로 2년 동안(58~60) 갇힌 몸이 되었다(사도 23,12-24,27). 바오로는 총독의 재판이 불리하게 진행되자 로마시민권을 내세워 황제에게 상소하였다.

(사도 25,1-12) 그리하여 바오로는 로마로 압송되었는데, 사도 행전 27장 1절-28장 15절에 압송에 관한 기사가 나온다. 60년 가을 (사도 27,9) 가이사리아를 떠나, 그레데 검을 거쳐(사도 27,8-12) 항해하다가 파선하여 구사일생으로 멜리데 섬에 상륙하여 겨울 석 달 동안 그곳에서 지냈다(사도 28,11). 61년 봄 다시 배를 타고 시실리 섬을 거쳐 나폴리 만에 있는 보디올리 포구에 닿아 육로로 로마에 도착하였다. 로마에서는 경비병 한 사람의 감시를 받기는 하였지만(사도 28,16) 셋집을 얻어 자유롭게 손님을 맞아들이면서 2년 동안 지냈다(사도 28,30-31). 사도 행전의 바오로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58년 봄 고린토에서 로마서를 쓸 때부터, 바오로는 예루살렘과 로마를 거쳐 스페인에 가서 전도하고 싶다는 말을 하였다(로마 15,24. 28). 글레멘스 1세 교황(90/92~101)이 95년경 고린토 교회로 써 보낸 편지(5,1-6,1)를 보면, 바오로가 스페인에 가서 전도한 후에 다시 로마로 와서 순교하였다고 한다. 64년 7월 19일 네로 황제가 로마시에 불을 지르고 나서 여론이 좋지 않자 그리스도인들을 방화범으로 몰아 4년 동안(64~68) 모질게 박해하였는데, 이 박해 때 바오로와 베드로가 순교하였을 것이다. 테르톨리아노에 따르면 베드로와 바오로는 네로 박해 때 순교하였는데, 베드로는 예수처럼 십자가형을 받았고, 바오로는 세례자 요한처럼 참수형을 당하였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바오로는 로마 남문 밖 교외에 있는 지하수가 세 줄기 솟아나는 트레 폰타네에서 순교하고, 그 근처 현재의 바오로 대성전 자리에 묻혔다고 한다.

바오로사도의 전도 행적 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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