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림동성당 > - 춘천교구 -2015년 4월 12일 -
–6.25 전쟁 때 피살 당한 성직자들의 묘소 보존 (강원도 춘천시 죽림동 38. 033-254-2631)
신해박해(1791년)와 을묘박해(1795년)에 이은 신유박해(1801년)에 이르러서는 서울과 경기도에 밀집하여 살던 교우들이 충청도 · 강원도 등의 산간벽지로 숨어 들어갔는데, 이들 중 경기도의 신태보 베드로가 40여 명의 교우를 이끌고 갖은 고생 끝에 강원도 횡성군 풍수원으로 피난하여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교우촌을 이루게 된다. 그 후 80여 년 동안, 상주하는 신부 없이도 교인 수는 천여 명에 이르렀다. 1888년 서울에서 조선 대목구장 뮈텔(Mutel) 민 주교에 의해 파견된 파리 외방전교회 르 메르(Le Merre, 李類斯) 신부가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풍수원이 본당이 되었으니 신태보의 피난 이후 무려 87년만의 일이었다.
죽림동 주교좌성당의 모체는 1920년 풍수원 성당에서 분가한 곰실 본당으로 엄주언 마르티노(말딩)의 헌신적인 전교활동의 결과로 설립되었다.
엄주언(嚴柱彦) 마르티노는 1872년 12월 10일(음) 춘성군 동면 장학리 노루목에서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착하고 총명하던 그는 열아홉 살 되던 해인 1891년 우연히 “천주실의”와 “주교요지”를 읽고 감명을 받은 나머지 구도에 나설 것을 결심하였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893년 늦가을에 그는 맏형과 함께 일곱 식구를 모두 데리고 우리나라 천주교의 발상지인 경기도 광주 천진암을 찾아가 그곳에 움막을 짓고 어렵게 지내면서 교리를 배워 이듬해에는 형과 함께 프랑스인 목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엄주언의 딸 엄 루치아의 증언이나 1894년 당시 한국에서 활동하던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중에서 ‘목’씨 성을 가진 신부는 없었다). 그렇게 3년간의 광주 생활을 마칠 무렵인 1896년에 나머지 가족도 다 영세한 후 굳은 전교 사명감을 품고 고향에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은 천주학쟁이로 냉대를 받으며 마을에서 쫓겨나 외가의 도움으로 고은리 윗 너브랭이라는 곳에 폐가 한 채를 사서 겨우 정착하였다.
엄주언 일가는 이처럼 친척과 이웃으로부터 따돌림과 수모를 당하면서도 맨손으로 어렵사리 화전을 일구어 가며 묵묵히 살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주경야독 하며 근검하게 사는 그의 모습에 사람들이 차츰 감동하여 가르침을 청하기에 이르렀다. 윗 너브랭이에서 여러 해 땀 흘린 보람이 있어 살림과 농지를 늘려 아랫 너브랭이로 옮겼다가 다시 곰실 공소로 옮긴 후 조촐한 강당까지 마련하여 공소 예절을 보게 되자, 물구비 · 춘천 · 화천 · 양구 순으로 공소를 순방하던 정규하 신부가 곰실에서 해마다 40-50명 씩 세례를 줄 정도가 되었다. 곰실 공소 교우들은 엄 회장 지도하에 자선 봉사와 엄하고 독실한 모범적 신앙생활에 전념하면서 마침내 300명 가까운 수로 늘어났다. 1920년에는 제대로 규모를 갖춘 공소를 건립하고 지역을 세 구역으로 나누어 실로 모범적인 신앙 공동체로 성장하였다.
이렇게까지 되는 동안 엄 회장이 풍수원과 서울 명동을 수년간 거듭 방문하면서 상주사제 파견을 간청한 결과 마침내 곰실 공소가 본당으로 설립되면서 1920년 9월 초대 김유룡(金裕龍) 필립보 신부를 모시게 되었다. 활기 넘치는 곰실 공동체는 춘천 시내 진출을 위해 교우 전원이 애련회(愛煉會, 연령을 위한 단체)에 가입하여 가마니 짜기, 새끼 꼬기, 짚신삼기 등을 통해 몇 해에 걸쳐 푼푼이 애써 모은 돈에 논까지 팔아 약사리(藥師里) 고개 현 죽림동 성당 아래 골롬반 병원 터와 아랫마당 그리고 수녀원 터인 당시 김영식의 대자의 집(약사리 148번지)을 사서 개조하여 1928년 5월부터 춘천 본당의 옛 성당으로 쓰게 되었다.
1938년 10월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춘천 본당 제6대 주임으로 부임한 퀸란 토마스 신부는 부임 직후 약사리 고개 언덕에 있는 도토리 밭을 매입하여 현재의 성당 자리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1950년에 죽림동 본당으로 개명하였다. 골롬반 외방선교회는 춘천 교구를 1994년에 제6대 교구장 장익 요한 주교가 부임하기까지 모두 55년간 사목하였다.
현재의 죽림동(竹林洞) 성당은 김유룡 신부와 엄 회장이 이끈 곰실 교우들이 애써 마련한 아랫터에 보태어 퀸란 토마스 신부가 매입한 언덕 위에 서게 되었는데, 그 기공식은 성당 벽에 라틴어로 붙어있는 초석이 말하듯이 1949년 4월 5일에 있었다. 새 성당의 건립은 퀸란 신부가 주임으로 부임한 지 2년 후인 1941년에 감목 대리직을 맡으면서 계획해 오던 것이지만 일제 치하의 외국인 구금 및 연금으로 착공이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해방과 더불어 1946년에 그가 다시 복직하였으나 여러 가지 어려운 일로 다시 미루다가 다행히 미군부대의 도움을 얻어 1949년 본격적으로 착공하게 되었다.
그러나 거의 한 해 동안 돌로 외벽을 훌륭하게 다 쌓고 동판 지붕까지 덮고 나서 내부 공사에 들어갈 참에 6.25 전쟁이 터졌다. 전란이 터지자 춘천시에서는 그 이튿날인 6월 26일 아침부터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남침이 시작된 바로 다음 주일인 7월 2일, 퀸란 토마스 지목구장 신부가 본당 미사를 드리는데 인민군이 들이닥쳐 성당 안에서 공포를 쏜 후 20여 명의 교우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캐나반(Canavan, 孫) 보좌신부와 함께 체포 연행하였다. 소위 이 ‘죽음의 행진’으로 교황사절 번(Byrne, 方) 주교를 비롯한 외국인 사제, 수녀, 개신교 목사 등 수백 명이 끌려가 평안북도 어느 험한 산비탈에 강제 수용되었는데, 캐나반 신부도 번 주교처럼 그곳에서 모진 고생과 추위를 못 이겨 선종하였다. 그래도 1953년 4월까지 34개월간의 포로 생활에서 기적같이 살아서 돌아온 사람 중에는 퀸란 토마스 신부와 크로스비 필립보 신부도 있었다.
그리고 라 파트리치오 신부, 고 안토니오 신부, 진 야고보 신부는 모두 아일랜드 출신으로 1950년 남한에서 피살되었다. 이렇게 6.25 전쟁 중에 순교하거나 납북되어 모진 고생 끝에 생환한 후 선종한 성직자들의 시신은 죽림동 성당 뒷마당의 성직자 묘역에 모셔져 있다.
이밖에도 춘천 지목구에서는 6.25 전쟁을 전후로 평강 본당의 백응만(白應萬, 다마소) 신부가 연행되어 옥사했고, 의주 본당의 김교명(金敎明, 베네딕토) 신부가 행방불명되었으며, 소양로 본당의 콜리어(Collier, 高) 신부와 홍천 본당의 크로스비(P. Crosbie, 趙) 신부도 퀸란 지목구장 신부와 함께 죽음의 행진을 했다. 연길 · 함흥 · 원산 지역의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신자들의 남하를 헌신적으로 돕던 양양 본당의 이광재(李光在, 티모테오) 신부 또한 1950년 6월 24일 공산군에게 연행되어 원산 와우동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0월 9일 총살당하였다.
처참한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월 3일부터 중공군이 밀물처럼 쳐들어오자 국군은 이른바 1.4 후퇴라는 참패를 당하였고, 5월에는 유엔군의 반격이 있었는데 그 작전 중의 공습으로 인해 안타깝게도 짓다만 죽림동 새 성당의 한쪽 벽이 무너지고 사제관 등 부속 건물이 대파되었다.
이 와중에서도 1951년 8월에 제13대 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커머포드(Comerford, 孔) 토마스 신부는 마당에 천막을 치고 미사를 드리면서 서서히 복구 준비를 하였다. 복구 준비는 한참 전란 중임에도 불구하고 미군과 교황청의 지원으로 비교적 잘 진전되어 1953년에는 대부분 완료되었다. 한편 수용소에서 살아온 퀸란 신부는 그곳에서 순교한 번 주교의 뒤를 이어 한동안(1953-1957년) 교황사절 서리를 겸하였다. 1955년 9월 20일 춘천이 지목구에서 대목구로 승격되자 퀸란 신부는 11월 23일 초대 춘천 대목구장으로 부임하면서 주교로 서품되었다. 이듬해인 1956년 6월 8일, 춘천 교구와 죽림동 성당 주보 축일인 예수성심 대축일에 새로운 모습을 갖춘 주교좌성당의 봉헌식이 성대히 거행되었다.
2000년 대희년과 교구 설정 60주년이라는 성숙과 도약의 뜻 깊은 해도 아울러 맞게 된 춘천 교구는 방인으로서는 처음으로 1994년 12월 14일 춘천 교구장으로 착좌한 장익 요한 주교가 죽림동 본당 제22대 주임 이정행 요한 신부를 비롯해 많은 이들의 협조와 가톨릭 미술가회 중진 작가들의 적극적 참여에 힘입어, 1998년 4월부터 다섯 달에 걸쳐 성당 안팎 공간의 형태는 역사적인 모습 그대로 보존한 채 순전히 우리나라 사람들만의 기량과 성의와 노력으로 전례 거행에도 합당하고 예술적으로도 흡족한 성당을 실현하는데 진력하여 마침내 9월 14일 십자가 현양 축일에 중창 축복식을 가졌다. 또한 80여 년 전 죽림동 성당 터를 마련하고 주교좌성당의 기초를 놓은 엄주언 마르티노 회장의 공적을 기리고 춘천교구 가톨릭 회관으로서의 전교사업을 목적으로 지하 2층 지상 6층 규모의 ‘말딩회관’(사제관 포함)을 건립하여 1999년 4월 24일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죽림동 성당은 2003년 6월 25일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54호로 지정되었고, 2012년 11월 21일 말딩회관 내에 본당 설립 100주년(2020년)을 앞두고 마련한 역사전시실 축복식을 가졌다. 그리고 2013년 6월 14일 춘천교구장 김운회 주교는 죽림동 성당 성역화 사업 기공식을 갖고 공사를 시작해 그해 12월 1일 축복식을 가졌다. 죽림동 성당 성역화 사업은 성전이 지닌 역사와 아름다움을 살리면서 근현대 신앙 증인들과 순교자들의 삶을 기억하고 현양하기 위해 마련된 사업으로, 성 골롬반 의원 폐원과 성 골롬반 수녀원 이전으로 확보된 성당 앞 부지에 전정 · 중정 · 회랑 등을 지어 새롭게 단장하였다. 2014년 6월 1일에는 교구 주보이자 본당 주보인 예수성심상(오광섭 작)을 새로 제작하여 시내 중심가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성당 입구 언덕 위에 설치하고 축복식을 가졌다. 이는 청동 소재로 된 예수성심상 중에서 국내 최대 규모이다. [출처 : 죽림동 성당 홈페이지,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4년 11월 16일)]
<곰실공소>
-춘천 죽림동 성당의 모체 (강원도 춘천시 동내면 고은리 439-1 . 033-262- 0695)
<소양로 성당 >
-콜리어 신부 살신성인 기념성당 (강원도 춘천시 소양로 2가 78-1. 033-255-2117)
소양로(昭陽路) 성당은 춘천교구 소속 본당으로 1949년 1월 죽림동(竹林洞) 본당으로부터 분리 ·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성 파트리치오(Patricius)이다.
8 · 15 광복 무렵 죽림동 본당 관할이었던 소양로 지역의 신자수가 늘어나자 1949년 1월에 소양로 본당이 설립됨과 동시에 초대 주임으로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의 콜리어(A. Collier, 고) 안토니오 신부가 부임하였는데, 설립 당시 신자수는 약 250명이었고, 이때 발산 공소와 금산 공소가 소양로 본당 관할이 되었다.
이듬해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콜리어 신부는 교구장 퀸란(T. Quinlan, 具仁蘭) 몬시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본당에 남아 신자들을 돌보고 부상자들을 치료하다가 복사 김 가브리엘과 함께 생포되어 6월 27일 인민군에 의해 사살되고 말았다. 이로써 콜리어 신부는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 선교사 가운데 한국 전쟁의 첫 희생자가 되었다.
집사 겸 복사인 김 가브리엘과 밧줄에 묶여 끌려가던 콜리어 신부는 “가브리엘, 자네는 처자식이 있으니 꼭 살아야 하네. 저들이 총을 쏘기 시작하면 재빨리 쓰러지게. 내가 쓰러지면서 자네를 덮치겠네.”라고 말했다. 예상대로 인민군 병사는 경고 한 마디 없이 총을 난사했다. 그때 김 가브리엘은 목과 어깨에 총상을 입었지만 자신을 끌어안고 쓰러진 콜리어 신부 덕분에 목숨을 건져 훗날 그 상황을 생생히 증언했다.
콜리어 신부의 순교 이후 한국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소양로 본당에는 신부가 파견되지 못했다. 그 후 휴전이 되면서 1954년 8월에서야 서울 대신학교(현 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있던 선종완(宣鍾完) 라우렌시오 신부가 2대 주임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이렇듯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으로 인하여 소양로 본당은 설립된 지 7년 만에 성당을 마련할 수 있었다. 즉 1956년 4월에 3대 주임 버클리(J. Buckley, 부) 야고보 신부가 성당 신축 공사에 착수하여 같은 해 9월 3일 국내외 여러 은인과 교우들의 도움으로 90평 규모의 성당을 완공하고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성당 건축을 진두지휘한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버클리 신부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반원형 평면 양식을 택했다. 밖에서 보면 원을 반 뚝 잘라 놓은 반달형이다. 내부는 제대를 중심으로 회중석이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 있다. 춘천교구장 퀸란 몬시뇰과 버클리 신부가 흔치 않은 반원형 평면 양식을 택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한국 전쟁 중에 소양로ㆍ묵호ㆍ삼척 성내동에서 선교하던 신부들이 공산군에게 죽음을 당하자 그들의 순교혼이 서려 있는 터에 기념성당을 짓기로 한 것이다.
성당 건립 후로도 계속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부임하다가 1967년 9월 15일 풍수원(豊水院) 본당의 이응현(李應鉉) 티모테오 신부가 6대 주임으로 부임하면서부터 한국인 사제들이 본당 사목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각종 신심 단체들이 결성되기 시작하여 본당 활성화에 기여하고 있다.
소양로 성당은 건축기법에 있어서 고전적 요소와 현대적 요소가 적절히 혼합된 형태이다. 아치형 버팀벽, 천정 몰딩 등은 교회건축에서 흔히 사용되는 고전적 기법이다. 반대로 외형을 반원형 평면으로 하고, 실내외 의장과 제단 주변을 소박하게 처리한 점은 현대건축이 추구하는 단순성 측면에서 높게 평가할 만하다. 또 원형창 유리화를 제대 십자가 조형과 일치시키고, 보존상태가 양호한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아 2005년 4월 15일 문화재청으로부터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61호로 지정되었다.
그 후 소양로 성당은 2006년부터 문화재청과 강원도 및 춘천시의 도움을 받아 원형 보존 작업을 시행하였다. 이음매가 낡은 함석지붕과 창호를 보수하고 없어졌던 성가대와 벽제대를 복원했다. 붉은 카펫이 깔려있던 제단을 나무널판으로 바꾸고 목조 난관으로 그 둘레를 둥글게 감았다. 성전 외벽을 두르고 있던 전선을 모두 지하로 넣어 원형을 최대한 살려 2009년 5월 3일 춘천 교구장 장익 주교의 주례로 중창(重創) 축복식을 가졌다. 또한 춘천교구는 양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은 콜리어 신부의 순교혼을 기억하고자 소양로 성당을 살신성인 기념성당으로 명명했다. [출처 : 한국가톨릭대사전 제7권과 평화신문, 2007년 2월 11일, 김원철 기자의 기사를 중심으로 편집(최종수정 2011년 11월 8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