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내, 베티성지 (2014년9월14일 순례)

2015. 4. 2. 오후 3: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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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별빛이 쏟아지는 < 미리내 >

 

경기도 안성에서 북쪽으로 40리쯤 떨어져 은하수라는 뜻의 아름다운 우리말로 불리고 있는 미리내는 한국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의 묘소와 그의 어머니 고() 우르술라, 김 신부에게 사제품을 준 조선 교구 제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 그리고 김 신부의 시신을 이곳에 안장했던 이민식 빈첸시오의 묘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성 김대건 신부의 일생은 짧았다. 26세의 나이에 생을 마쳤다. 당시 김 신부의 처형 소식을 들은 페레올 주교는 그의 빼어난 인품과 재능을 두고 과연 그에게는 어떤 일이든지 맡길 만하였고 그의 성품이나 일하는 태도로나 지식 등 어느 모로 보든지 성공을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 그를 잃은 것은 무엇으로도 대상(代償)하지 못할 재앙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심지어 조정에서조차 많은 대신들이 외국 문물에 능하고 박학다식한 그의 재능을 아쉬워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굽히지 않는 신앙으로 결국 헌종에 의해 직접 그의 사형이 선고되고 이튿날인 16일엔 떠들썩한 규모로 새남터에서 처형된다. 김 신부는 형장에서도 추호의 두려움도 없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의 최후의 시각이 다가왔으니 여러분은 나의 말을 잘 들으시오. 내가 외국 사람과 교제한 것은 오직 우리 교()를 위하고 우리 천주를 위함이었으며 이제 죽는 것도 천주를 위하는 것이니 바야흐로 나를 위해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려 합니다. 여러분도 죽은 후에 영복을 얻으려거든 천주교를 믿으시오.”

마침내 희광이의 칼을 대하고서도 김 신부는 태연하게 이 모양으로 있으면 칼로 치기 쉽겠느냐?”고 묻고 , 준비가 되었으니 쳐라.” 하고 말했다. 국사범으로 형을 받은 죄수는 통상 사흘 뒤에 연고자가 찾아 가는 것이 관례였으나 김 신부의 경우 장례마저 막아 참수된 자리에 묻고 파수를 두어 지켰다. 하지만 죽음을 피해 살아남은 신자들은 이를 그대로 둘 수 없었고 그들 중 한 사람인 이민식(1829-1921)은 파수의 눈을 피해 치명한 지 40일이 지난 후 김 신부의 시신을 빼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시신을 등에 지고 험한 산길을 틈타 150리 길을 밤에만 걸어 일주일이 되는 날 자신의 고향인 미리내에 도착했다.

자신의 선산에 김대건 신부의 묘를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보살피던 그는 그로부터 7년 후 페레올 주교가 선종함에 따라 주교의 유언대로 그를 김 신부의 옆자리에 안장했다.

그 무렵 김 신부의 어머니인 고 우르술라도 비극적인 처지에서 숨을 거둔다. 7년 사이로 남편과 아들을 여의고 이집 저집으로 문전걸식을 하다시피 한 눈물겨운 생애였던 것이다. 이민식은 고 우술라도 김대건 신부의 묘 옆에 나란히 모셔 생전에 함께 있지 못한 한을 위로한다. 그리고 미리내의 오늘을 있게 한 당사자인 이민식 자신도 92세까지 장수하다가 죽어서 김 신부 곁에 묻혔다.

미리내는 1883년 공소가 설치됐다가 3년 뒤인 1886년 본당으로 승격됐다. 미리내 성 요셉 성당은 성지 초입 우측 편에 초대 주임인 강도영 마르코 신부와 본당신자들에 의해 1906년에 건립되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구한말과 일제시대에 신자 자녀들에게 교리와 초등교육을 실시했던 해성학원교사 건물이 잘 보존되어 남아 있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경당 옆에 3만 평 규모로 광장을 확장하고 미리내 성당에서 경당까지 길 옆14처 조각을 세웠고, 1991년에는 103위 성인 시성 기념 대성당을 완공하여 봉헌식을 가졌다. 기념성당 제대에는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의 종아리뼈 유해가 안치되어 있고, 2층 전시실에는 박해시대 천주교인에게 사용된 고문형구와 순교 참상의 모형물들이 설치되어 그날의 교난을 오늘에 생생히 전해주고 있다.

그 후 기념성당과 경당 사이에 성모당이 건립되었고, 입구에서 경당까지 오르는 길에는 웅장한 돌조각으로 묵주기도 길이 조성되었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 14처 조각이 기념성당 초입에서 시작해 성당 뒤편으로 해서 경당 전에 기도를 마칠 수 있도록 옮겨 설치되었다.

성지의 제일 위쪽인 미리내 언덕에는 가경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시복에 맞춰 19289헌된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 기념경당이 자리하고 있다. 기념경당 내에는 김대건 신부의 발 유해 일부와 성인의 시신이 담겨져 있던 목관 일부가 안치되어 있다. 성인의 다른 유해는 현재 가톨릭 대학교 신학대학 성당 안에 안치되어 있다.

경당 구내에는 왼쪽부터 강도영 신부, 김대건 신부, 페레올 주교, 최문식 신부의 묘가 나란히 있. 경당 밖 왼편 위에는 김대건 신부의 어머니인 고 우르술라와 이민식이 나란히 누워 있다.

미리내 성당 위 광장 중앙의 대형 십자가상 왼쪽으로 해서 산길을 올라가면 여기저기 나뒹구는 위를 자연 그대로 이용해 겟세마니 동산을 꾸며 놓았는데 이는 피땀을 흘리며 기도를 바치는 예, 그와 반대로 잠에 곯아떨어진 제자들의 모습을 실물 크기로 만들어 둔 것이다.

내려오는 길에 오른쪽 등성이로는 수원 교구 성직자 묘역이 자리 잡고 있고 그 위편으로는 16무명 순교자들의 합장묘와 성 이윤일 요한 천묘 사적비가 있다. 1976624일 이동면 묵리에 있던 순교자의 유해를 미리내 무명 순교자 묘역으로 이장했다가 이윤일 성인의 유해임을 밝혀져 1987121일 대구 성모당으로 옮겨 모시고 천묘 사적비를 세웠다. 그 후 대구대교구는 성인의 유해를 1991120일 관덕정 순교기념관 성당 제대에 모시고 봉안식을 가졌다.

20051025일 성모성심수도회와 천주성삼성직수도회가 29년간 관리 · 운영해온 미리내 성지가 수원교구로 이관됐다. 수원교구는 그동안 성지를 가꾸는데 수고해온 수도회의 노고를 치하하고 미리내 성지를 김대건 신부의 영성과 믿음이 살아 숨 쉬는 성지로 더욱 발전시킬 의지를 밝혔다.

 

  

최양업 신부의 사목 중심지이자 순교자들의 본향 < 배티 >

 

천혜의 피신처라 할 수 있는 배티는 충북 진천군과 경기도 안성시가 경계를 이루는 지점에 위치한 깊은 산골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배티를 가기 위해서는 우선 진천으로 가서 백곡을 거쳐 양백리로 가는 시내버스를 이용하거나 안성에서 석남사로 가는 시내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백곡 공소가 있는 백곡에서 배티까지는 약 4km 정도이므로 도보로 순례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하다.

진천에서 18km 정도 지점에 삼박골 비밀 통로 순교자의 묘라는 푯말이 나오는데 그 중간에 백곡 공소가 길 왼쪽에 서 있다. 여기에는 병인박해 당시 순교한 윤 바르바라와 박 바르바라의 묘가 있는데 이들은 친시누이올케 관계이다. 순례객은 여기서부터 순교선조들의 향기를 조금씩 느낄 수 있다.

삼박골 비밀 통로라는 푯말을 지나 조그마한 다리를 건너면 산으로 올라가는 오솔길이 나온다. 여기서 배티까지는 약 2km 정도로 걸어서 40분 정도가 소요된다. 이 길은 박해 시대에 배티로 넘어가던 비밀 통로였는데 무성한 수풀 사이로 난 좁다란 길은 믿음 하나로 험한 산길을 마다하지 않던 당시 선조들의 가쁜 숨결을 느끼게 한다. 삼박골은 베르뇌 장 주교와 페롱 권 신부가 박해를 피해 은신했던 교우촌으로 현재 공소는 없어지고 순교자 이 진사의 부인과 딸의 묘소만이 남아 있.

푯말이 서 있는 곳에서 안성 쪽으로 계속 올라가면 드디어 배티 성지가 나온다. 입구 들머리에는 2012415일 축복식을 가진 고딕 양식의 최양업 신부 선종 150주년 기념성당이 넓은 광장과 함께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성당 맞은편에는 아담한 배티쉼터도 새로 마련되었다. 성당 오른쪽으로 오르막 길에 들어서면 순교 현양이라고 새겨진 비석이 먼저 순례객을 맞는다. 모진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꺾지 않았던 선조들의 굳은 정신이 단단한 비석을 통해 느껴진다.

100m 정도 올라가면 왼쪽으로 19976월 봉헌된 최양업 신부 기념성당이 있고, 그곳에서 시작되는 오솔길에는 적당한 간격으로 십자가의 길 14처가 세워져 있는데 특이하게도 각 처가 모두 하나씩의 커다란 맷돌에 새겨져 있어 순교자들이 겪어야 했던 박해의 육중한 무게를 보여주는 듯하다.

14처가 끝나는 곳에는 자연석 그대로의 제대와 함께 나무 밑동을 그대로 잘라 만든 야외 성당이 있고 산기슭에는 성모 마리아상이 서 있다. 제대 위의 촛대 역시 14처와 마찬가지로 맷돌로 만들어져 있고 제대 앞과 주위에는 나무 등걸로 이루어진 좌석들이 늘어서 있다.

최양업 신부가 머물던 사제관과 무명 순교자 묘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성모상을 지나 2시간 정도 소요되는 등산로를 넘어야 한다. 이것이 어려울 경우에는 성지 입구로 다시 내려와 배티 고개를 향해 약 400m 정도 올라가면 길가 오른쪽에 '최양업 신부 성당터'라고 쓴 입간판이 서있는데, 이곳에서 103위 성인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우측에 최양업 신부가 여름 장마철이면 머물던 성당 겸 사제관이 말끔하게 복원되어 있다.

1년에 5,000리에서 7,000리까지 걸어 다니며 심할 때에는 한 달에 겨우 나흘밖에 못 잤다는 최양신부는 전국을 앞마당처럼 다니다가도 장마철에는 여기에 머물며 천주가사(天主歌辭)”를 집필했고 기도서인 성교공과(聖敎功課)”를 번역했다. 그러나 그가 기거하며 성당과 사제관으로 사용하던 두 칸짜리 옛 초가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었다 

1999년 최양업 신부가 머물렀던 성당 및 사제관 터를 확인한 후 그 부근에 있던 농가를 매입해 철거하고, 2001년 원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복원한 후 최양업 신부 동상도 세웠다. 이 집은 이미 1849년 페레올 주교의 명으로 다음해 다블뤼 신부(후일 제5대 조선 대목구장)가 설립하여 페낭 신학교 유학생을 준비시키는 조선교구의 소신학교로 사용했었고, 최양업 신부뿐만 아니라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제들의 사제관과 성당으로도 활용했었다.

여기서 잘 포장된 배티 고개 길을 따라 900m 정도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면 ‘14인 순교자 묘역 입구라는 푯말이 서 있다. 이곳은 배티에 숨어 신앙생활을 하던 선조들이 포졸들에게 잡혀 안성으로 끌려가다 집단으로 순교한 곳이다. 이곳에는 모두 14기의 무명 순교자 묘가 있다. 이 외에도 배티 성재골에 6인 무명 순교자의 묘가 있으며, 신원이 알려진 순교자 묘로 백곡 공소에 2, 인근 교우촌에 6기가 더 있어 배티 인근에는 총 28기의 순교자 무덤이 산재해 있다.

배티를 중심으로 진천 일대에서 1866년 병인박해와 1868년 무진박해 때에 60여 명의 순교자가 났는데, 그 가운데 교회 순교록과 관변 기록에 그 순교 행적이 전해지는 순교자는 2014816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된 8명을 포함하여 모두 34명에 이른다. 나머지는 배티 일대에 이름 없는 묘소들로 산재해 있다.

청주교구는 이처럼 유서 깊은 배티 성지를 성역화하고 한국교회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의 영성을 본받고 현양하기 위해 최양업 신부 사제 서품 150주년을 맞은 1999년 양업 교회사연구소를 설립했다. 이 연구소는 우선적으로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신부의 선교 활동과 신앙에 대한 연구에 초점을 맞추고 현양 활동과 시복시성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2002123양업 영성관’(피정의 집)을 신축해 봉헌식을 거행했으며, 복원된 최양업 신부 옛 성당 입구에 103위 순교 성인 계단과 양업 영성관 입구의 시복시성 대상 순교자 묵주알 계단도 함께 조성하였다. 양업 영성관은 지상 2층 규모로 30여 명을 수용할 수 있어 개인이나 가족 단위의 피정이 가능하다. 또한 청주교구는 2009년 교구 내의 대표적 성지인 배티와 연풍을 잇는 84.6km의 도보성지 순례길을 마련하여 순례객들을 돕고 있다.

201134일 배티 성지의 조선교구 신학교지무명 순교자 14인 묘소그리고 삼박모녀 순교자 묘역3개소가 충청북도 기념물 제150호로 지정되면서 진천군 및 충청북도의 지원을 받아 본격적인 성지개발에 들어갔다. 2011415일 성지 들머리 주차장의 조립식 강당이 있던 자리에 최양업 신부 선종 150주년 기념성당 건립을 위한 기공식을 가졌고, 2012415일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고딕 양식 기념성당을 완공해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이어 20121010일에는 최양업 신부의 일대기와 박해시대의 역사와 신앙 선조들의 삶을 보여줄 최양업 신부 박물관 기공식을 가졌고, 2014411일 첨단 정보통신기술을 접목해 순례자들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든 최양업 신부 박물관 축복식을 가졌다. 그리고 배티 일대에 산재한 15개의 박해시대 교우촌을 산길로 잇는 배티 순례길 조성 및 삼박골 피정센터 등도 추진하고 있다.

   

< 최양업 신부와 배티의 무명 순교자 >

 

최 신부는 이후 경상도로 거처를 옮길 때까지 약 2년 동안 배티의 동골을 사목 거점으로 삼아 서선교사들이 다니기 어려운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오지의 교우촌들을 순방하였다. 그리고 휴식 기간에는 다시 이곳에 들러 이웃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하거나 동생들을 돌보았으며, 사목 보고서를 작성하거나 신자들을 위해 "천주가사"를 저술하였다.

실제로 최 신부의 사목 순방은 고난 속에서 이루어졌다. 전국을 안마당 드나들 듯이 하면서 교우촌을 찾아 수십, 수백 리를 걸어야만 했고, 때로는 신자 한 두 집을 방문하기 위해 인적이 드문 짜기를 올라가야만 하였다. 또 어느 해에는 밀고자 때문에 한겨울에 신자 집에서 쫓겨 나와 맨발산야를 헤맨 적도 있었다. 이러한 그의 삶은 곧 그리스도의 수난을 따르려 한 순교자적인 삶이었.

원컨대 지극히 강력하신 저 십자가의 능력이 저에게 힘을 응결시켜 주시어, 제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게 하시기를 빕니다. 우리의 모든 희망은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고, 하느님의 거룩한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삶 안에서 죽고 함께 묻히는 것이 소망입니다(최양업 신부의 1846-1847년 서한 중에).

이처럼 그는 조국 땅을 밟은 뒤 116개월 동안 온갖 고난을 마다하지 않고, 사랑하는 신자들을 위해 쉬지 않고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과로와 장티푸스로 1861615일 경상도 문경에서 선종하였으니, 40세의 한창 때였다. 그의 시신은 문경 부근에 가매장되었다가 그 해 10월 말 학교가 있던 제천 배론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이로써 최양업 신부는 한국 교회의 대표적인 '색 순교자'로 거듭나게 되었으니, 배티 일대는 이러한 최 신부의 신앙과 땀이 배어 있다는 두 번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배티 성지가 지니고 있는 세 번째 의미는 순교자들의 고향이라는 점이다. 현재 이곳 배티 골짜기에는 순교자들의 무덤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으며, 그중에는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들이 섞여 있. 특히 오반지(바오로)의 경우는 순교 후 친척들이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에 안장하였다고 하지만, 직까지도 그 무덤 소재지를 밝혀 내지 못하고 있다.

한편 최양업 신부가 선종한 뒤에는 프티니콜라 신부가 1858년부터 1862년까지 이곳 배티에 거처정하고 충청, 경상, 경기, 강원 일부의 교우촌을 순방하였다. 이어 칼래 신부가 삼박골에 와서 근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곤 하였는데, 그는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문경에서 쫓겨 삼박, 북면의 소학골을 거쳐 내포에서 배를 타고 중국으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나서야 마침내 오랜 박해가 서서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제 신자들은 피신처에서 나와 새 복음의 터전을 닦아 나갔다. 배티, 용진골, 삼박골은 공소로 승격되었고, 배티에는 교리 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1930년대부터 신자들이 새로운 생활 터전을 얻기 위해 하나 둘 이곳을 떠남으로써 어느 교우촌은 단 한 명의 신자, 단 하나의 가옥도 남지 않되었다. 그런데도 이 일대는 순교자들의 보금자리요, 최양업 신부나 선교사들의 고난 어린 발자취가 스며 있는 곳임에 틀림없다. 뿐만 아니라 오늘도 최양업 신부의 현양 운동에 동참하려는 신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으니, 이를 통해 그분의 삶과 신앙이 길이 남게 될 것이다.

댓글 1

  • 2015년 5월 6일 오전 12:59

    여긴 함께 못했네...원청때 아이들과 함께 갔었는데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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