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은 병자호란(1839년) 이후 처형터가 있어 기해박해(1839년)와 병인박해(1866년) 당시 광주(廣州) 일원, 양주(楊洲), 용인(龍仁), 이천(利川)에서 잡혀 온 교우들이 치명, 순교한 곳이다.
새로 복원돼 깔끔하고 세련된 모습을 자랑하는 남한산성 입구 정문을 지나면 동문이 나온다. 동문 오른쪽으로는 산비탈을 거슬러 올라가며 육중한 성벽이 위용을 자랑한다. 동문을 지나 몇 걸음을 옮기면 오른쪽으로 도랑 건너편에 '천주교 순교 성지'라는 철제 푯말이 서 있다. 여기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곳은 서기 1791년 신해(辛亥), 1801년 신유(辛酉), 1839년 기해(己亥), 1866년 병인(丙寅) 네 차례에 걸쳐 한덕운, 김덕심, 정은 등을 위시하여 70명 이상(실제 순교자 2-3백 명으로 추산) 순교한 곳임."
순교 성지의 이정표를 본 순례객들은 바로 이곳이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막 지나온 동문을 통해 신앙 선조들은 오랏줄에 묶여서 살아서 들어왔지만 혹독한 고문 끝에 결국은 시체가 되어 성 밖으로 던져졌다.
더욱이 살아서 동문을 들어온 이들은 죽어서는 물이 빠지는 구멍으로 성 밑에 파놓은 수구문을 통해 내팽개쳐졌다. 그래서 수구문(水口門)은 시구문(屍口門)이 됐고 이곳으로 흘러내리던 물도 핏물이 됐으며 동문 밖 계곡에는 시신이 쌓였다.
더욱이 살아서 동문을 들어온 이들은 죽어서는 물이 빠지는 구멍으로 성 밑에 파놓은 수구문을 통해 내팽개쳐졌다. 그래서 수구문(水口門)은 시구문(屍口門)이 됐고 이곳으로 흘러내리던 물도 핏물이 됐으며 동문 밖 계곡에는 시신이 쌓였다.
시구문은 동문을 바라보며 왼쪽 길 바로 밑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얼핏 보면 잘 알 수 없고 얼기설기 철조망으로 가려 놓은 밑으로 잘 들여다보면 어른 두어 명이 허리를 굽히고 다닐 만한 크기의 사각진 구멍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옆길로 돌아 비탈길을 내려서 시구문 바깥쪽으로 내려서면 마치 당시의 처참한 광경이 눈에 보이는 듯 선하고 그 험한 고통 속에서도 신앙을 지켜 내고야 말았던 선조들의 굳은 신앙이 메아리치는 듯하다.
동문의 애달픈 이야기를 뒤로 하고 비탈을 따라 1킬로미터 정도 걸어 올라가면 남한산성 로터리가 나온다. 로터리는 북문과 서문, 남문으로 가는 길이 교차하는 지점으로 계절이나 날씨에 따라 적절한 코스를 선택할 수 있다. 좌석 직행 버스가 성남이나 광주 쪽에서 로터리까지 올라오기 때문에 승용차를 이용하지 않더라도 쉽게 성을 둘러볼 수 있다.
이 로터리에 천주교도들을 수감했던 옥 터와 처형 터가 있다. 동문 쪽에서 올라오면서 로터리에 도착하면 오른쪽에 있는 주차장이 옥 터로 추정된다. 정면에는 섭정 10년간 2만여 명의 천주교인을 학살한 것으로 전해지는 대원군의 영세 불망비(永世不忘碑)가 세워져 있어 세월의 무상함을 일러 주는 듯하다. 어느 사찰 승려들이 세워 준 것으로 전해지는 불망비와 마주한 곳이 바로 처형지였다고 교회사가들은 전한다. 여기서 처형된 교우들이 시체가 되어 산비탈로 질질 끌려 내려가 동문 밖 개울로 던져졌다.
현재 남한산성 성지는 공영주차장 인근 작은 개천 옆으로 부지를 마련하여 순교자현양비와 한옥 양식의 성당을 건립하였고, 성당 뒤편 산에는 야외 미사터와 십자가의 길 14처를 조성하여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들어갔던 동문과 배교하지 않고 시체가 되어 나온 시구문' 모두가 우리에게 한 시대의,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될 역사를 증언해 주고 있다. 오늘도 성지에는 순교자들의 전구가 깃들어 있다.
현재 남한산성 성지는 공영주차장 인근 작은 개천 옆으로 부지를 마련하여 순교자현양비와 한옥 양식의 성당을 건립하였고, 성당 뒤편 산에는 야외 미사터와 십자가의 길 14처를 조성하여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들어갔던 동문과 배교하지 않고 시체가 되어 나온 시구문' 모두가 우리에게 한 시대의,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될 역사를 증언해 주고 있다. 오늘도 성지에는 순교자들의 전구가 깃들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