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투]2013/2/16 일만위순교자현양동산등...

2013. 2. 11. 오후 2:4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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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주골(이승훈묘),황사영생가터,일만위 순교자 현양동산,진무영, 관청리 형방성지

반주골(이승훈묘)
이승훈은 평창(平昌) 이씨 가문의 부친 이동욱(李東郁)과 모친 여주(驪州) 이씨 사이에서 1756년 태어났다. 24세의 젊은 나이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을 단념한 그는 당대의 명문가인 마재 정씨 가문 정약용의 누이동생과 결혼하여 그들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게 된다.
 
당대의 석학 이벽(李壁)과도 교분을 갖게 된 그는 정약용 형제들과 천진암 강학회에 참석하던 중 이벽의 권유로 1783년 말 동지사(冬至使)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된 부친을 따라 북경으로 가게 된다. 그는 북경에 머무르는 동안 북당(北堂)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에게서 교리를 배워 이듬해 그라몽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한국 최초의 영세자가 된다.
영세 후 천주교 교리 서적, 십자고상, 상본 등을 갖고 귀국해 이벽, 정약종 · 약전 · 약용 형제, 권일신 등에게 세례를 베풀고 다시 이벽으로 하여금 최창현, 최인길 등에게 세례를 베풀게 하며 1785년에는 서울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종교 집회를 갖는 등 신자 공동체를 형성시켜 마침내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이승훈은 여러 차례 배교를 했고 마침내 1801년 신유박해로 3월 22일 이가환, 정약용, 홍낙민 등과 함께 체포된 후 4월 8일 다른 6명의 교우들과 함께 참수되었다.
 
비록 그는 이처럼 여러 번 배교했으나 이 땅에 복음의 첫 번째 씨앗을 뿌린 선구자였고 그로부터 시작된 신앙은 후손들에게 이어져 아들 신규와 손자 재의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증손 이연구 · 균구는 1871년에 각각 순교했다.

황사영생가터
강화읍 월곳리 대금동에는 1801년 신유박해의 상황을 적은 백서(帛書)의 주인공인 황사영 알렉시오의 생가 터로 추정되는 곳이 있다황사영은 당대의 석학들을 만나 학문을 넓히던 중 다산 정약용 일가를 만나고 마침내 정약현의 사위가 된다. 처가인 마재 정씨 집안으로부터 천주교의 교리에 대해 전해들은 황사영은 그 오묘한 진리에 깊이 매료되어 입교를 청하게 되고 알렉시오라는 본명으로 영세하게 된다. 그 후 그는 활짝 열려 있던 출세 길을 마다하고 조선에 입국한 주문모 신부를 도와 전교에 전력했으며 그와 함께 동숙하며 전교길에 올랐다.
 
그 후 10년 후인 1801년, 전국에는 신유박해의 모진 회오리가 몰아친다. 주문모 신부가 순교하고 이승훈, 정약종 등 조선 교회의 핵심 지도자들이 순교한다. 황사영 역시 몸을 피하기 위해 서울을 떠나 충북 배론에 있는 토굴에 몸을 숨긴다.
조정에서는 그를 서학의 주요 지도자로 간주했고 박해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는 김 대왕 대비는 특별히 그를 10일 내 시한부로 잡아들이라는 특별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이로 인해 조선 교회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를 지켜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가까스로 추스르던 황사영은 마침내 조선의 상황을 북경 교회에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백서를 썼다. 가로 38센티미터, 세로 62센티미터의 흰 명주 천에 깨알 같은 글씨로 한 줄에 1백 10여 자씩, 1백 21행, 모두 1만 3천 3백11자를 써서 교회에 대한 박해와 앞으로의 전교를 위한 근본 대책 등을 적었던 것이다.이렇게 쓰여진 백서는 같은 해 10월 동지사 편으로 북경 주교에게 전달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밀서를 지니고 가던 황심(黃沁)이 사전에 관헌에게 체포되고 황사영도 역시 관헌에게 붙잡힌다.
 
그는 즉시 의금부에 끌려가고 그가 쓴 백서는 조정으로 알려진다. 이를 받아 읽은 조정 대신과 임금은 크게 놀라 그를 극악무도한 대역 죄인이라 하여 참수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시신을 여섯으로 토막 내는 처참한 육시형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그의 모친은 거제도로, 부인인 정 마리아는 제주도 모슬포 대정골로, 그의 두 살배기 아들 황경한(黃景漢)은 추자도로 가는 비운을 맞게 된다
황사영의 탄생지이자 소년 시절을 보낸 대금동 마을은 대대로 창원 황씨의 세도가 크게 떨치던 곳으로 말끔하게 단장되어 있는 황씨 문중 사당은 이를 잘 보여 준다. 바로 그 문중 사당 옆이 황사영의 생가 터로 추정된다. 하지만 슬프게도 사당 옆에 황사영의 생가는 흔적도 없고 다만 길게 자란 잡초와 갈대 사이로 약간의 공터만이 그 자취를 짐작케 해준다.

일만위 순교자 현양동산
1996년 가을 인천 가톨릭대학교가 주축이 되어 시작한 일만위 순교자 현양동산 조성 사업은 순교자들의 위대한 정신과 삶을 현양하고 널리 전함으로써 하느님과 선조 순교자들에게 영광을 드린다는 취지에서 추진되었다. 인천교구는 섬 전체가 역사 유적지이자 순교 터이기도 한 강화도의 ‘강화 청소년 야영장’ 내 일부 부지에 2002년 8월 14일 최기산 주교의 주례로 ‘한국 일만위 순교자 현양동산’을 조성해 한국의 순교자들, 특히 무명 순교자들에게 봉헌하였다.한국 일만위 순교자 현양동산은 ‘순교자를 위한 곳’이 아니다. 오히려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을 위한 곳이다. 순교자들의 신앙을 통해 하느님께로 더욱 가까이 가는 ‘길’을 찾고 배우는 ‘신앙의 학교’인 것이다. 또한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누구나 편하게 찾아와 기도하고 쉬어갈 수 있는 ‘삶의 성지’이다. 모든 근심 걱정을 내려놓고 오르다보면 무명 순교자들의 위로와 격려를 느낄 수 있고,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서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진무영
강화도는 19세기 후반, 한국 역사에서 동서양의 사상과 문화가 만나 첨예한 갈등을 빚은 곳으로 상징되는 곳이다. 이러한 연유로 1866년 병인년부터 시작한 박해로 강화도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으나 현재 알려진 순교자로는 1868년 5월 22일 진무영(鎭撫營)에서 최인서(崔仁瑞, 요한, 애오개 회장, 59세), 장치선(張致善, 張周基 요셉 성인의 조카, 59세), 박서방(朴順集 베드로의 형), 조서방(趙參奉의 부친, 50여세) 등이다.
 
특히 최인서와 장치선은 병인박해(1866-1871년)로 성직자 12명중 9명과 신자 10,000여 명이 처형되자 생존 성직자 중 한 분인 리델(Ridel) 신부를 배로 천진(天津)으로 탈출시키고, 서양 배를 불러다가 신교(信敎)의 자유, 남은 교우들의 구출, 성교(聖敎 : 천주교) 전파 등의 목적으로 상해(上海)까지 다녀왔다는 죄로 처형되었는데,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성직자의 보호와 신교의 자유, 그리고 복음 전파를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다가 마침내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그리고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순교한 박상손(朴常孫), 우윤집(禹允集), 최순복(崔順福) 등이 갑곶나루터(甲串津頭), 일명 '막구터'에서 목을 베어 말뚝에 올려놓아 천주교를 경계하도록 하였다.
 
진무영은 조선시대에 해상경비의 임무를 맡았던 군영이며, 동시에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지이기도 하다.

관청리형방성지
 강화 본당 위쪽으로 조금만 걸어 올라가면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항전하던 39년간의 궁궐터가 있다. 1232년 고려 고종 때 강화천도와 함께 세워진 궁궐터는 1964년 사적 제133호 '고려궁지'로 지정 보전되고 있다.
 
현재 이곳에는 조선시대에 건립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5호인 강화유수부 동헌과 유형문화재 제26호인 이방청, 외규장각(2003년 복원), 강화 동종(1999년에 만든 복제품, 원래 종은 강화역사관으로 이동 전시) 등만 남아 있다.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이곳 동헌과 형방에서 천주교인들에 대한 극심한 고문이 자행됐다고 한다.
 
고려궁지 밖에는 교우들을 끌어내다 참수했던 처형지인 진무영(鎭撫營)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또 일부 주민들이 그 위치를 증언하기도 하지만 아직 정확한 고증에 의해 확인되지는 않고 있다. 다만 연구 결과 강화 성당 부근 농협 자리(현재 은혜 교회 자리) 근처로 추정되고 있다. 강화는 굽히지 않는 신앙의 현장이자 역사의 교육장이기도 하다.

댓글 2

  • 2013년 2월 12일 오전 12:03

    일만위..십자가의길이 생각나는군~^^잘다녀오시게나..

  • 2013년 2월 12일 오후 11:39

    잘 커가고 있다..청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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