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투]2013/1/13 신암리,갈곡리,성 남종삼묘

2013. 1. 5. 오후 10:22:28

글자

<신암리 성당>
2008년 공소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은인들의 도움으로 건립한 새 성당.신암리는 지금은 농촌이지만 예전에는 산림이 울창했던 곳으로, 조선 말기에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모여들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1900년대 초 서울 종현(현 명동) 본당 관할이었던 의정부 지역은 구한말 박해를 피해 도자기를 굽던 교우촌이 신앙의 뿌리가 되었다. 구한말 우고리(양주시 광적면 우고리)와 신암리(양주시 남면 신암리) 일대에 박해를 피해 집단으로 공동체를 이루며 교우촌이 형성된 것이다.
 

구한말 박해를 피해 도자기를 굽던 교우촌이 신앙의 뿌리가 된 신암리 신앙 공동체는 1909년 개성 본당 관할 공소로 설립된 후 1925년 3월 본당으로 승격돼 본격적인 지역 복음화의 길을 걸었다. 1930년 다시 공소로 환원된 후 지난 1959년부터 동두천 본당 공소로 편입되어 신앙의 명맥을 이어 오다가 2008년 9월 12일 준본당으로 승격하는 등 다난한 역사를 걸어왔다.
 


<갈곡리 공소>
 
구한말 갈곡리와 신암리(경기도 양주시 남면 신암리) 일대에 박해를 피해 집단으로 공동체를 이루며 옹기그릇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던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이곳 칠울에 정착하게 된 동기는 칠울과 우고리 고령 등 인근에 옹기그릇을 만드는 점토가 많았기 때문이었다고 전해지며, 성당 앞마당도 옹기를 굽던 곳이었다                                                                                                                                                                                                                                                                                                                                   
고 전해진다.2009년 개보수하여 축복식을 가진 공소의 칠울 강당 외관. 강당 너머로 옛 의정부 주교좌성당을 본뜬 공소 성당이 보인다.1963년 7월 4일 법원리 본당 신설과 함께 의정부 본당에서 법원리 본당 관할 공소가 된 갈곡리
공소는 오랜 신앙의 역사답게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를 배출한 성소의 못자리이다. 2004년 6월 24일 서울대교구에서 의정부교구가 분리 · 신설됨에 따라 갈곡리 공소는 의정부교구에 속하게 되었다.
 
 










 

<성 남종삼 요한 묘>
남종삼 성인은 103위 한국 성인 중에서 가장 높은 벼슬에 오른 분이다. 원래 생부는 남탄교(南坦敎)이나 장성한 뒤 슬하에 아들이 없던 백부 남상교(아우구스티노)의 양자로 들어갔다. 남상교는 정약용의 학통을 이은 농학자(農學者)로 충주 목사와 돈녕부(敦寧府) 동지사(同知事)를 지냈다. 남종삼의 학문과 사상 형성, 그리고 훗날 천주교에 입교한 데에는 부친의 영향을 컸다.
 
기록에 나타나는 최초의 교회 활동은 1861년에 입국한 리델(Ridel) 신부에게 조선말을 가르친 것이나, 이전부터 이미 베르뇌(Berneux) · 다블뤼(Daveluy) 주교 등과 교류하면서 교회 일에 참여하고 있었다.
 
의령 남씨 가족 묘소 전경. 이곳에 남종삼 성인과 부친 남상교, 장자 남규희 삼대 순교자가 모셔져 있다.그의 입교 후 가족들도 모두 천주교를 신봉하는데 아버지 남상교는 신앙에만 더욱 전념하고자 묘재로 이사해 은거 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바로 이곳에서 1866년 병인박해 때 공주로 유배되어 순교할 때까지 아들 남종삼이 찾아오면 가르침을 베풀며 신앙과 조국애를 일깨워 주었다.
 
높은 학문을 성취한 남종삼은 일찍이 과거에 급제해 지방 장관을 거쳐 철종 때에는 승지 벼슬에 오르고 고종 초에는 왕족의 자제를 가르치기에 이른다. 그는 당시 부패된 관리들 중에서 유일하게 청백리로 의덕과 겸손의 가난한 생활을 함으로써 모든 이들에게 존경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동료 관리들에게는 시기와 질시의 대상이 되는 한편 향교 제사 문제로 신앙과 관직의 두 가지 중에서 한 가지를 선택해야 했고 당연하게도 관리직을 내놓았다. 남씨 부자의 묘재 정착은 평소에 상종하던 이들과의 생활 풍습이 신앙 계명을 지키는 데 어려움을 초래했기 때문으로, 남씨 부자에게는 높은 벼슬, 명예와 권세, 안락한 생활 등 양반으로 누릴 수 있는 영화와 특권을 스스로 끊어 버린 일대 결단이었다.
 
철종이 죽고 고종이 즉위하던 1863년 말경, 대원군이 정권을 잡으면서 남종삼은 좌승지로 발탁되어 다시 임금 앞에서 경서를 논했다. 그 때에 두만강을 사이에 둔 러시아가 수시로 우리나라를 침범하면서 통상을 요구했다. 조야는 어찌할 줄 모르던 차에 남종삼은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아책(防我策)’이라 하여 국내의 프랑스 주교를 통해 한불 수교를 맺고 서양의 세력을 이용해 러시아를 물리칠 것을 건의했다.
 
성 남종삼 요한 묘소.대원군은 그의 건의를 쾌히 받아들였으며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부주교가 모두 황해도와 충청도에서 전교 여행 중이어서 약속 시간 내에 찾아내지 못했고 대원군의 초조는 분노로 바뀌었다. 얼마 후 두 주교가 서울에 들어왔을 때 이미 때는 늦어 대원군은 정권 유지의 간계로 천주교 박해를 결심했던 터였다.
 
남 승지는 일이 그르친 것을 깨닫고 묘재로 내려가 부친에게 이런 사실을 알렸다. 남상교는 그의 말을 듣고 “너는 천주교를 위해 충(忠)을 다하였으나 그로 말미암아 너의 신명(身命)을 잃게 되었으니 앞으로 악형을 당하더라도 성교(聖敎)를 욕되게 하는 언동을 삼가라."고 가르쳤다.
 
부친의 준엄한 가르침을 받은 남 승지는 치명을 각오하고 배론 신학당을 찾아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로부터 성사를 받고 한양으로 향했다. 이미 한양으로부터 체포령이 떨어져 있던 그는 결국 한양을 채 못 들어와 고양(高陽) 땅 잔버들이란 마을에서 체포되어 의금부로 끌려가 홍봉주, 이선이, 최형, 정의배, 전장운, 그리고 베르뇌, 다블뤼 주교와 함께 병인년 3월 7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되었다.
 
이후 남종삼의 시신은 홍봉주의 시신과 함께 용산 왜고개에 매장되었다가 1909년 유해가 발굴되어 명동 성당에 안치되었고, 시복을 계기로 1967년 10월 다시 절두산 순교성지 성해실로 옮겨져 안치되었다. 이때 성인의 유해 일부를 가족 묘소인 장흥면 울대리에 모셔 안장하였다.
 
한편 남종삼이 순교한 후 그의 가족들도 모두 체포되었는데, 부친 남상교는 붙잡혀 공주로, 장자 남규희는 전주로 유배되어 순교하고, 처 이소사와 차남 명희와 두 딸은 경상도 창녕으로 유배되어 노비생활을 하게 된다. 그 후 이소사도 창녕에서 순교하니 3대에 걸쳐 4명이 순교한 셈이다. 남종삼 요한은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댓글 2

  • 2013년 1월 5일 오후 10:24

    그...유명?한....갈구리?공소..ㅋㅋㅋ...원청에겐..무척 안좋은 기억이 있습니당..ㅋ

  • 2013년 1월 7일 오전 12:35

    ㅎ그때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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