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건 신부와 함께 한국 최초의 방인 사제로 피땀 어린 사목 활동을 폈던 최양업 신부의 부친 최경환 프란치스코(崔京煥, 1805-1839년) 성인의 묘가 수리산 적막한 골짜기에 모셔져 있다. 이곳에는 남부럽지 않은 집안을 일구어 오다가 천주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고향을 멀리 떠나 방랑해야 했던 그들 일가의 애환이 서려 있다.

1839년 9월 12일 최경환 성인은 치도곤을 맞은 후유증으로 옥에서 치명한다. 그리고 이듬해 1월 31일에는 그 부인 이성례가 당고개에서 참수된다. 어머니의 참수를 앞두고 소식을 들은 어린 4형제는 온종일 동냥한 쌀자루를 메고 희광이를 찾아가 단칼에 어머니를 하늘나라로 보내 달라며 쌀자루를 건네는 눈물겨운 장면을 연출한다. 그리고 당일 한칼에 목이 떨어지는 어머니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던 어린 자식들은 동저고리를 벗어 하늘에 던지며 어머니의 용감한 순교를 기뻐했다고 전한다.
최경환 성인은 본래 청양 다락골 사람이었다. 3대째 신앙을 지켜 왔고 지역에서 당당한 풍모를 자랑하던 최씨 집안은 장남 최양업 토마스가 신학생이 되어 마카오로 떠난 후 고발을 빙자한 수많은 협잡배들로 인해 가산을 탕진하고 가족과 함께 서울 벙거지골, 강원도 춘천 땅으로 유랑길을 나선다. 하지만 계속되는 배신자들의 등쌀로 다시 경기도 부평을 헤매야 했고 최후에 정착한 곳이 바로 수리산 깊은 골짜기였다.
1837년 7월 수리산에 들어와 산을 일구어 담배를 재배하면서 박해를 피해 온 교우들을 모아 교우촌을 가꾸면서 그는 전교 회장직을 맡아 열렬한 선교 활동을 편다.
하지만 그를 쫓는 발길은 이 깊은 산 속에까지 미쳐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붙잡히고 만다. 하지만 기록에 보면 그는 체포라기보다는 스스로 순교의 각오로 포졸들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는 어느 날 새벽 포졸들이 집 앞에 들이닥치자 "어찌 이렇게 늦게 오셨습니까. 우리는 당신들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지만 아직 동이 트질 않았으니 좀 쉬었다가 떠납시다."라며 동네 사람들에게 순교의 용기를 북돋는다.
그의 부인 이성례 마리아(李聖禮, 1801-1840년)가 차려 준 아침을 먹고 난 포졸들은 40여 가구에서 골고루 한 명씩을 잡아갔지만 최경환만은 아들을 유학 보냈다는 죄목으로 부인 이성례, 아들 희정, 선정, 우정, 신정 그리고 젖먹이까지 모두 일곱 식구를 잡아가 옥에 가두었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최씨 일가의 비극은 후손들의 눈시울을 붉게 물들인다. 다섯 자식을 모두 끌고 옥에 갇히게 된 어머니 이성례는 세 살짜리 막내가 굶주림으로 숨이 끊어지자 그만 실성할 지경이 되고, 네 아이 모두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배교하겠노라 말하고 네 아이를 이끌고 풀려 나온다. 하지만 옥에 갇힌 남편 생각에 정신을 차린 그녀는 아이들이 동냥을 나간 사이에 다시 갇힌 몸이 된다. 4형제는 옥으로와 어머니를 목메어 부르지만 어머니는 다시 또 배교의 죄를 지을까 두려워 등을 돌린 채 자식들의 목소리를 애써 외면한다. 어린 자식들은 발길을 돌려야 했고 그 후로 동냥한 음식을 옥에 갇힌 부모에게 사식으로 넣어 주었다.
교우촌 수리산
수리산은 최양업 신부가 신학생으로 간택된 성소의 터전으로,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 성인을 탄생시킨 곳이었고, 성인의 시신이 묻혀있던 성지이다.
최경환은 1804년 충청도 다락골의 새터(지금의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서 태어나 세 살 위인 이성례(마리아)와 혼인하였다. 그리고 18세 때인 1821년에 아들 최양업을 얻은 뒤 형제 가족들과 함께 서울 낙동(서울 중구 회현동)으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그러던 중 거처가 발각될 위험이 있게 되자, 이곳 저곳으로 옮겨 살다가 마침내 이곳 수리산에 정착하여 교우촌을 일구게 되었다.
1836년 초에 15세의 장남 최양업을 천주의 종으로 바친 최경환은 회장으로 임명되어 교우들을 돌보다가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갖은 형벌을 받으면서 40일 이상을 항구함으로 버텨냈다. 이에 형리조차 그를 바위와 같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그러나 형벌로 헤어진 몸을 가누지 못하고 마침내 옥사로 순교하였으니, 때는 1839년 9월 12일이요 그의 나이는 36세였다.
최경환 회장이 순교한 뒤, 옥졸들은 그 시신을 가마니에 넣어 노고산(老姑山, 마포 노고산동의 서강대학교 뒷산) 밑에 갖다 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둘째 형 최영겸(崔英謙) 부자가 그 시신을 찾아 이름을 적은 사발과 함께 그 산 중턱에 가매장하였다가, 몇 해가 지난 뒤 시신을 발굴하여 뒤뜸이 앞 수리산으로 이장하였다. 그 후 최경환 회장이 1925년에 복자품에 오르게 되자 교회 당국에서는 1930년 5월에 그의 무덤을 찾아 시신을 발굴하여 명동 대성당 지하 묘지에 안치하였고, 1967년에는 다시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옮겨 모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