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을 둘러싼 뒷산이 거북이 형상을 닮았다는 구산(龜山) 마을은 팔당 부근 한강변에 위치해 순교자들의 숨결이 150여 년이 넘도록 고스란히 살아 숨 쉬는 곳이다.
경기도 하남시 망월동에 위치한 구산 마을은 먼저 103위 성인 중 71번째 성인인 김성우 안토니오를 비롯해 박해 시대에 많은 치명자가 탄생한 유서 깊은 사적지라는 데서 그 교회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특히 구산은 성인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오며 묘소를 가족 묘지에 이장, 보존하고 있어 우리나라에서 박해 시대의 자취가 가장 원형대로 남아 있는 곳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고 있다. 더군다나 150여 년 동안 교회를 지키며 신앙생활을 확고하게 지켜 가고 있는 교우촌으로 도시화로 인한 급변속에서도 구산 마을은 한마음으로 신앙 안의 일치를 잃어버리지 않고 있다.
6.25 당시에 구산 마을은 원로 신부들의 피신처로 아주 적합한 곳이었다. 낮에는 곳곳에 무성한 사람 키보다 더 큰 갈대숲 사이에서 숨죽이고 엎드려 있다가 저녁에 살금살금 나와 지친 몸을 쉬었다고 한다.
성모자상과 함께 사적지 안을 돌아보면 오른쪽으로 자그마한 기와 대문(안당문)이 보이고, 그 안으로 성인 묘역과 성당이 보인다. 숙연한 마음을 가다듬고 문을 들어서 성 김성우 안토니오 순교 현양비와 묘소 앞에 서서 잠시 눈을 감고 죽음 앞에서도 의연하게 신앙을 택했던 그의 풍모를 기린다.
양반의 자제로 유복한 살림과 존경받는 가문에서 남부러울 것 없었던 그가 신앙의 험로를 걷기 시작한 것은 1830년경으로 알려져 있다. 경주 김씨 계림군파(鷄林君派)의 15대 손인 김영춘의 맏아들로 정조 19년(1795년) 구산에서 태어난 그는 두 동생과 함께 세례를 받고 친척과 이웃들을 입교시켜 이 지역을 교우촌으로 만들었다. 한동안 유방제 신부를 모시고 회장직을 수행하며 온 마을에 복음을 전한 그는 1836년 모방(Maubant) 나(羅) 신부가 입국하자 자기 집에 모방 신부를 모시기도 했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됐다가 간신히 풀려났던 그는 1840년 다시 가족들과 함께 붙잡혀 서울 포청으로 압송됐다. 포청에서 형조로 이송돼 갖은 고문을 당한 그는 배교를 강요하는 재판관에게 "나는 천주교인이오.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것입니다."라며 결코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요지부동의 굳은 신앙에 결국 그는 이듬해 4월 47세의 나이로 순교했고 1925년 7월 복자위에 올랐다가 마침내 1984년 5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당 왼쪽으로 청동 빛의 고색창연한 14처상이 들여다보인다. 굽이굽이 말려 올라간 소나무들의 푸른빛이 십자가를 진 예수를 향해 시퍼렇게 날선 창을 겨눈 병사들의 청동 빛에 어우러져 섬뜩할 정도로 처절했던 순교 당시의 고통을 이야기해 주는 듯하다.
2001년 하남시 향토유적 제4호로 지정된 유서 깊은 교우촌인 구산 마을은 급격한 도시화와 이농 현상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신앙 공동체의 모습을 간직하려 노력하고 있는 귀중한 교회이며 순교의 얼이 살아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