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교구 1박2일 순례(2014.11.29~30 순례)

2015. 4. 2. 오후 3: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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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를 피해 안식처를 찾은 교우들의 숨결이 서린 곳 하우현 성당

 

하우현 성당은 이미 1800년대 초반부터 박해를 피해온 신앙인들에 의해 교우촌이 형성되었고, 1888년 갓등이 본당 설립과 함께 갓등이 본당 관할 공소가 되었습니다. 갓등이 본당 2대 주임인 알릭스 신부님은 교우들이 공소 강당도 없이 교우집에서 공소예절을 하는 것을 보고 강당 신축추진하여 1894년 초가목조강당 10칸을 건립했습니다.1900년 본당으로 승격된 후 1954년 다시 안양 본당 공소로 전환되었고, 1965년 은퇴 후 하우현에서 휴양하던 김영근 베드로 신부님이 성당의 붕괴 위험을 알고 미군 부대로부터 건축 자재를 원조받아 현재의 성당을 신축하였습니다. 1975군포(현 호계동) 본당 관할공소로 변경되었다가 1978년 하우현 공소가 본당으로 부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1993년 하우현 공소 건립 10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고, 20011월에는 초대주임인 샤플랭 부가 세운 사제관이 경기도 기념물 제17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이어 20047월과 20056사제관 보수 공사와 조경 공사를 실시하였습니다. 1906년에 건립된 사제관은 몸체는 서양식 석양식으로 되어 있고 지붕은 골기와를 이은 전통 한국식으로 20세기 초반에 한국식과 서양식 건축기법이 혼용된 드문 경우로 건축사적 가치가 높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제관 앞에는 1866병인박해 때 순교한 서 루도비코 볼리외 성인의 기념비와 동상이 있습니다. 성인께서 주로 하우현 인근에서 사목하시다가 인근 둔토리 동굴에서 체포되어 순교하셨기 때문입니다.

 

 

볼리외 루도비코 신부가 박해를 피해 숨었던 동굴 둔토리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와 의왕시를 잇는 342번 지방도로 중간쯤에서 위로 올라가 서울 외곽 순환 고속도로 밑의 터널을 지나 국사봉 등성이를 오르면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 볼리외 루도비코 서 신부가 박해를 피해 숨었던 동굴이 나옵니다.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들 중 가장 어린 26세에, 조선 땅에 발을 들인 지 겨우 9개월 만에 관헌에게 붙잡혀 조금도 흔들림 없이 신앙을 증거하며 혹독한 고문 끝에 순교한 성인의 열정과 자취가 서려 있는 곳입니다. 광이의 세 번째 칼날에 그의 목은 떨어지고 머리는 사흘 동안 효수되었다가 몇몇 교우들이 시신을 거두어 왜고개로 옮겼습니다. 이후 옛 용산 신학교 성당과 명동 성당 지하묘소를 거쳐 절두산 순교성지 성해실에 안치되었습니다. 볼리외 루도비코 신부는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은신 동굴로 오르는 산길에는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고, 작은 동굴 안에는 성모상과 예수상, 십자가와 촛대 등이 놓인 작은 바위가 있습니다.

 

 

성 도리 헨리코 신부님이 체포된 곳 손골

 

손골 성지는 원래 교우촌이 있던 곳으로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의 주된 선교지로, 도리 헨리코 신부가 사목하다 신자들을 모두 피신시킨 후 홀로 포졸들에게 체포된 곳일 뿐 아니라 오메트르 신부 등 여러 선교사들이 입국해서 한국말과 풍습 등을 배우며 선교를 준비하활동하던 곳입니다. 현재 이곳에는 성 도리 헨리코 신부의 유해 일부를 모신 묘와 동상, 십자가, 경당과 기념관, 그리고 1991년 경당을 준공하면서 오석으로 새로 만든 성 도리 헨리코 김 신부 순교비가 있습니다. 이 순교비 위에는 1966년 성인의 고향 본당에서 두 개를 만들어 하나는 성인의 생가 벽에 나머지 하나는 손골에 기증한 돌 십자가가 부착되어 있습니다. 201311월에는 손골에서 신앙생활하다 체포되어 서봉 인근 개울가에서 순교한 무명 순교자 4위의 유해를 미리내 무명 순교자 묘역에서 손골 성지로 옮겨 안치하였습니다.

박해시대 서양 선교사들이 입국하게 되면 안전한 곳에서 우리나라에 적응할 수 있도록 시간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 우선 선교사들이 신자들을 사목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언어와 풍습을 익혀야 했고 조선에 살기 위한 준비를 해야 했다. 그런데 선교사들이 안전하게 머물면서 이러한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신자들만 모여 사는 적합한 교우촌을 찾아야 했을 것이다.  

손골 교우촌은 이런 의미에서 다른 어떤 교우촌보다 선교사들의 신뢰를 받았던 것 같다. 박해시기인 1857년부터 1866년까지 무려 5명의 선교사가 손골에 묵으면서 신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적응기간을 거쳤다.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도 신자들을 방문하며 사목하것을 잠시 쉬는 여름철이 되면 손골을 찾아와 피정도 하고 지친 몸과 마음을 재충전하기도 하였. 이것은 그만큼 손골 교우촌의 신자들이 신앙적으로 견고하고 믿을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한수 이남 경기도 최초의 본당이 된 갓등이 공소 왕림성당

 

왕림 성당을 상징하는 갓등이는 갓을 쓴 등불이라는 뜻으로 사제를 의미하는 박해시대 왕림 교우들이 사용하던 은어였습니다. 갓등이 지방의 복음 전파 시기와 교우촌 형성 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1839년 앵베르 주교의 일기에 갓등이 공소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교우촌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8887월 종현(현재의 명동, 1882년 설립), 원산(1887년 설립) 본당에 이어 한국 교회의 세 번째 본당이자 한수 이남 경기도 최초의 본당으로 수원교구의 뿌리가 된 왕림 본당은 조선시대 선교사들이 충청도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했던 관문으로 교역과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1889년 앙드레 신부가 2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초가 성당을 지었고, 1890년 알릭스 신부는 본주보를 예수 성심으로 명명하고 문맹 퇴치와 전교를 위해 한문 서당인 삼덕학교(三德學校)를 설립하였습니다. 19506.25 전쟁으로 학교와 성당이 점령당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1963년 수원교구의 설정과 함께 본당이 수원교구로 편입되었고, 1985년 본당 설정 100주년 기념 성당 및 사제관과 수녀원을 기공하여 1988111일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식 및 성당 봉헌 미사를 거행했습니다. 왕림 성당 일대에는 수원 가톨릭대학교를 비롯해 여러 수도회가 밀집해 있고, 성당 옆 갓등이 박물관에는 초기교회 전례용품 등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내포지방과 경기도 내륙, 서울을 잇는 선교의 교두보 요당리 성지

 

요당리 성지는 1801년 신유박해를 기점으로 서울과 충청도 내포 등지의 신자들이 피난하면서 형성된 양간 공소라 불리던 교우촌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닷물이 유입되어 뱃길이 열렸던 지리적 특성상 충청도와 경기도 내륙, 서울을 잇는 선교길의 교두보 역할을 했던 곳으, 1839년 기해박해와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로 하느님을 증거한 수많은 신자들의 신앙의 요람지였습니다.
장주기 성인과 복자 장 토마스의 출생지이자 신앙의 터전이었고, 그 외에도 많은 순교자들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또한 교회 재정 확보를 위한 전답이 운영되었던 곳으로 그 책임을 맡았던 민극가 성인과 공소회장을 역임한 정화경 성인이 활동했던 곳입니다. 그리고 박해를 피해 피신했던 성 앵베르 주교와 그분의 피신을 도운 손경서 순교자의 얼이 서려 있는 곳입니다.
이런 역사적 중요성으로 인해 수원교구에서는 2006년부터 전담사제를 파견해 성지 개발을 본격화했습니다. 기도의 광장 양편으로 묵주기도 길과 십자가의 길을 조성하고, 성역화 광장에는 대형 십자가와 요당리와 관련 있는 순교자들의 의묘를 조성했습니다. 그리고 2009년 성당과 부속건물들을 완공해 다음해 511일 봉헌식을 가졌습니다.

소성당의 십자가의 길 14역시 참으로 의미 있는 작품이다. 조각가 이효주(아나스타시, 서울 중림동 본당)씨가 19982월 뜻하지 않은 화재로 일부 소실된 중림동(약현) 성당의 불에 탄 목재를 소재로 만든 작품이라고 한다. 불에 타다 남은 목재에서 아름다운 성물을 조각해 낸 것은 모진 박해를 겪고도 굳은 신앙의 싹을 피워낸 선조들의 숨결과 닮았다.

초대 성지전담 신부는 순례객들이 좀 더 경건하고 아늑한 분위기에서 성지를 순례할 수 있도성당 건축과 조경공사를 서둘렀다면서 순교자들의 피와 얼이 서려있는 요당리성지를 순례하면 공경심이 더 커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성지순례는 관광이 아닌 말 그대로 순례입니다. 단순히 볼거리를 찾기 보다는 가족과 함께 경건한 마음으로 순례지에서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얻어 가시면 좋을 것입니다.”

 

 

끌려간 사람 잊어야 하기에 이진 터인가? 죽산성지

 

죽산 마을은 조선시대 도호부가 있던 곳으로 1866년 병인박해 때 수많은 순교자들이 주님을 증하며 생명을 바친 곳입니다. 현재 치명일기증언록에 그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만 해25명이나 됩니다.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많은 순교자들이 관아에서 심문을 받고 모진 매를 맞으면서도 끝까지 주님을 증거하며 사형장으로 끌려가 순교의 깃발을 올렸습니다. 병인박해의 여파로 1968928일 이곳에서 순교한 박경진 프란치스코와 오 마르가리타 부부는 20148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병인박해 이후 이곳에 공소가 설립되기 2년 전인 1932년까지 무려 70여 년 동안 신자 공동체의 형성이 전혀 없었음은 그 당시 박해의 참상과 공포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말해줍니다.
이처럼 거룩한 순교지에 변변한 기념비 하나 없어 안타까워하던 죽산 성당 신자들은 포도를 팔모은 돈으로 원래의 장소와는 약간 떨어져 있으나 순교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에 부지를 확보하여 성지 개발을 시작하였습니다. 죽산 성지는 개발 단계부터 성체 · 성모 · 순교자 신심을 고양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고풍스런 돌담으로 둘러싸인 성지 입구에 들어서면 순교자 묘역까가장자리로 묵주기도 길이 있고, 묘역 가운데 무명 순교자 묘를 중심으로 양쪽에 병인박해 순교24기와 순교자 현양탑이 날개처럼 자리하고 있습니다. 순교자 묘역 뒤로 십자가상과 십자가, 소성당 그리고 옆에 대성당을 마련하여 200093일 최덕기 주교의 주례로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죽음으로 신앙을 지킨 윤유일 가족의 안식처 어농성지

 

어농 성지에는 한국 교회에 최초로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해 중국을 세 번이나 왕래한 윤유일 바오로와 그 일가족의 묘가 있습니다. 1795년 주문모 신부를 영입하고 돕던 윤유일, 지황, 최인길이 순교하고, 1801년 신유박해 때 윤유일의 가족 대부분이 순교하여 후손을 찾지 못하던 중 1987에 한 후손이 나타나 그의 증언에 의해 이곳 선산에서 윤유일 바오로의 부친 윤장과 동생 윤유오 야고보의 묘를 확인했습니다. 이에 따라 윤유일과 숙부 윤현과 윤관수, 그의 사촌 누이동생 윤점혜와 윤운혜 그리고 한국에 처음으로 들어온 주문모 신부 등의 의묘를 만들었고, 그 해 628일 고 김남수 주교의 주례로 축복식을 갖고 성역화를 시작했습니다.
그 후 어농 성지는 윤유일 일가 묘소를 중심으로 성지를 개발해 1999년 예수상과 십자가의 길 14처를 세우고, 2002년에는 사제관과 성당을 마련했습니다. 그 해 813일 최덕기 주교에 의해 을묘 · 신유박해 순교자 현양성지로 선포된 어농 성지는 주문모 신부를 영입하고 돕다가 치명한 을묘박해 3위 순교자와 주문모 신부를 모시고 6년 동안 조선 교회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활동하다가 순교한 신유박해 순교자 14위를 현양하고 있습니다. 이들 17위 순교자는 20148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한편 어농 성지는 청소년들에게 선조들의 순교 영성과 성소를 불어넣어 주는 청소년 성지로 개발하고 있습니다.

 

 

남한산성에서 백지사로 순교한 정은 바오로의 안식처 단내성지

 

단내 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 때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정은 바오로의 고향이자 유해가 묻혀 있는 곳입니다. 박해의 회오리가 단천리 교우촌에 몰아쳤을 때 포졸들은 정은 바오로를 붙잡기 위해 매봉에 숨어 망을 보았고, 당시 63세의 노인이었던 그는 추운 겨울날 낮에는 마을 뒤 검은 바밑 굴속에 숨어 있다가 밤이면 내려와 잠을 자고 올라갔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체포되어 남한산성으로 끌려갔고, 이때 그의 형님의 손자인 정 베드로가 병든 작은 할아버지를 모시고자 자진하여 잡혀갔습니다. 배교 강요에 끝까지 굴하지 않은 그들은 그해 말 백지사형을 받고 순교했습니다. 그들이 순교한 뒤 시체는 남한산성 동문 밖으로 시구문을 통해 던져졌는데 가족들이 몰래 정은 바오로의 시신을 찾아 이곳에 안장했습니다. 그러나 정 베드로의 시신은 당시 함께 순교한 수많은 시신들 틈에 섞여 미처 찾아오지 못했습니다.
단내 성지는 한국에 존재하는 가장 오래된 교우촌 가운데 하나이며 김대건 신부의 사목활동지이기도 합니다. 아울러 한국 103위 순교성인 가운데 이천에서 태어났거나 체포되어 순교한 5의 성인을 기념하는 곳입니다. 특히 단내가 가정성화를 위한 성가정 성지로 명명된 것은 성지에서 기념하는 5위의 성인과 순교자 중 이문우 성인을 제외하면 모두 가족 순교자이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에서는 2003년 기념성당과 5위 성인 순교비를 세우고, 지속적인 성지 개발과 성가정의 정신을 이어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먹뱅이와 미리내를 거쳐 다시 순교의 현장 대구로 이윤일 요한 묘

 

성 이윤일 요한(李尹一, 1816-1867)1812년 홍주(현 홍성)의 열심한 구교우 집안에서 태어, 186512월 고향을 떠나 경남 상주 갈골로 이주했다가, 부친이 별세한 후에는 문경 여우목으로 이사하여 살면서 30여 호를 입교시키는 등 공소회장으로서의 소임을 다 하였다.

병인박해가 일어나 18661118(음력 1012), 마을을 습격한 포졸들이 천주교 신자가 누구냐고 묻자, 그는 태연하게 내가 바로 천주교 신자요라고 대답한 뒤 마을 교우 30여명과 함께 문경 관아로 끌려갔다. 3일 동안 심한 형벌을 받은 다음, 다시 상주 진영으로 이송되어 2개월간 수 차례의 심한 형벌을 받으면서 배교를 강요당했으나, 단호하게 이를 거절하고 도리어 기도와 묵상을 열심히 하는 한편 함께 갇힌 교우들을 격려하였다.

결국 그는 사학의 괴수로 지목되어 186714일 사형선고를 받고 대구로 압송되어, 그 해 121(음력 18661216관덕정으로 끌려 나가, 마지막 음식을 들은 뒤 주머니에서 돈 몇 푼을 꺼내 희광이에게 주면서 단칼에 베어달라고 부탁한 후 순교하였다.

대구 관덕정에서 순교한 이윤일 성인은 1912년 묵리의 현 위치로 이장되었다가 다시 1976년 미리내 무명 순교자 묘역에 모셔졌습니다. 그 후 성인의 유해임이 밝혀져 1987년 순교지인 대구 관덕정으로 이장되었습니다. 이곳 사적지는 바로 이윤일 성인이 64년간 묻혔던 곳으로 표지석 옆의 민가를 왼쪽에 끼고 산길로 약 580m 올라가면 있습니다. 아담한 묘역에 이르면 가운데 인의 묘가 있고, 그 옆에는 이곳이 성인의 성해를 모셨던 거룩한 곳임을 알리고 성인의 신앙을 배우고 전하기 위해 대구대교구 이문희 주교가 세운 성인 유지비(遺址碑)가 있습니다. 그리고 성인 묘 앞 뒤로 성모상과 십자가, 야외미사를 위한 돌제대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모진 박해를 피해 모인 교우들의 보금자리 한덕골

 

한덕골(閑德洞)은 박해시대 천주교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모여들어 교우촌(敎友村)을 이루고 살았던 곳으로 한국인으로는 첫 번째 사제가 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가족들이 박해를 피해 충남 당진군 솔뫼를 떠나 서울 청파를 거쳐 피난 왔던 곳입니다. 또한 두 번째 사제가 된 최양토마스 신부가 귀국하여 어린 동생들을 눈물로 상봉하고 가끔 들러 성사를 주던 곳이기도 합니.

이곳 한덕골 출신 순교자로는 성 김대건 신부와 부친 김제준(金濟俊, 이냐시오, 1795-1839 인을 비롯하여, 김 시몬(1870년 순교, 40), 김 마리아(1866년 순교, 42) 등이 있다.
교회사 연구와 성지개발에 각별한 열정을 지닌 인천교구의 김진용 씨는 한덕골을 발굴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한덕골 사적지 부지 또한 손수 매입하여 수원교구에 기증하였습니다. 사적지를 관리하는 천리요셉 성당은 대형 십자가와 야외제대, 그리고 양 옆으로 김대건과 최양업 신부상을 설치했고, 20105월에는 파티마의 성모상을 설치하여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신앙 때문에 고향과 가산을 다 버리고 이곳에 피난 와서, 초근목피로 근근이 연명하며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면서도 신자 본분을 굳게 지키며 사셨던 신앙 선조들의 기도소리가 지금도 바람을 타고 은은히 들려오는 듯하다.

댓글 1

  • 2015년 5월 6일 오전 1:00

    한번에 열곳을 보니 좋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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