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2013/10/27 서울도보순례

2013. 10. 30. 오전 9:4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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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남터 순교성지

성당 앞마당의 성모자상.서울 용산구 이촌동 199의 1번지. 1호선 전철을 타고 용산역을 지나다 보면 말끔하게 단장된 커다란 한옥 기와집이 눈에 들어온다. 한국 천주교회 창립 2백주년 기념의 해인 1984년 공사를 시작해 3년 만에 완공한 이 집이 순교 성지 새남터 기념 성당이다.
 
이제는 교우들뿐만 아니라 무심히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 이곳이 순교 터임을 금방 알 수 있다. 하지만 높다란 아파트 숲을 배경으로 산뜻한 풍모의 건물이 자리 잡은 이 자리에서 얼마나 많은 피가 흘러내렸는지를 안다면 그렇게 무심하게 지나쳐 갈 수는 없을 것이다.
 
한양성 밖 남쪽 한강변에 있던 새남터는 본래 노들 혹은 한자로 음역(音譯)해서 사남기(沙南基)라고 불리었다. 이 자리는 조선 초기부터 군사들의 연무장으로 사용됐고 국사범을 비롯한 중죄인의 처형장으로 사용되어 왔다. 이곳은 1456년(세조 2년)에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던 사육신(死六臣)이 충절의 피를 뿌린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4세기를 건너뛴 1801년부터 1866년까지 무려 10명의 외국인 사제를 포함한 11명의 목자가 이곳에서 거룩한 순교의 피를 흘린다. 서소문 밖 네거리를 ‘평신도들의 순교지’라고 한다면 이곳은 ‘사제들의 순교지’라고 말할 수 있다.
 
새남터를 순교의 성혈로 물들이기 시작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치명한 중국인 주문모 신부부터이다. 목자 없이 스스로 교회를 세운 조선의 교우들을 위해 북경 교구는 교회 창립(1784년) 11년 뒤인 1795년에 주 신부를 조선 땅에 파견한다. 이 땅에서 맞이한 첫 사제인 주 신부는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한양에 입성, 최인길의 집에 여장을 푼 이래 6개월 만에 한 배교자의 밀고에 의해 쫓기는 몸이 된다. 가까스로 몸을 피해 여교우 강완숙의 집으로 피신하지만 그의 영입에 주역을 담당했던 윤유일, 지황은 각각 36세, 29세의 나이에 곤장을 받아 치명하고 거처를 제공했던 최인길 역시 장살(杖殺)로 순교한다.
 
박해의 와중에서도 6천여 명의 신자가 새로 탄생하는 등 조선 교회의 교세는 크게 신장됐다. 하지만 주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지 6년 만인 1801년 신유박해는 또다시 수많은 교우들의 목숨을 앗아 갔다. 명도회 회장인 정약종을 비롯해 선구적인 이 땅의 지식인들은 칼 앞에서도 주 신부의 소재를 대지 않았고 그 때문에 더 많은 희생자가 생겨났다. 주 신부는 자신 때문에 신자들이 고통 받는 것을 보고 중국으로 되돌아가려고 북행길을 나섰다. 하지만 자기 양 떼들과 생사를 함께 하고자 하는 각오로 도중에 발길을 돌려 자진해서 의금부로 나섰고 새남터에서 칼을 받고 장렬하게 순교한다
 
 
왜고개 성지
 
현재 군종교구 주교좌인 국군 중앙 성당이 자리하고 있는 이곳 왜고개는 한자로 와현(瓦峴) 또는 와서현(瓦署峴)로 불리던 곳으로 원래 옛날부터 기와와 벽돌을 구워 공급하던 와서가 있었던 데서 유래한다. 서울 명동 성당과 중림동약현 성당을 지을 때 사용했던 벽돌도 이곳에서 공급해 주었다고 전해진다.
 
한국 교회가 처음으로 맞이한 사제인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1801년 신유박해로 장렬하게 순교한 후 조선 교회는 또다시 목자 없는 양떼 신세가 됐다. 그 후 30년 만인 1831년 조선 교구는 중국 북경 교구로부터 독립해 명실 공히 교회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와 함께 1836년과 1837년 사이에 프랑스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선교사인 모방, 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주교가 입국한다. 이들 성직자들은 외인과 포졸들의 눈을 피해 상복 차림으로 변장하고 먹을 것도 여의치 못한 채 험한 산길을 걸어 다니며 전국 각지의 신자들을 찾아 다녔다.
 
제한적인 활동을 해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복음 전파에 힘쓴 결과 이들은 입국한 후 불과 1년 만에 신자가 9천여 명으로 늘어나는 성과를 얻는다. 방인 사제 양성을 위해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 등 세 소년을 뽑아 마카오로 유학을 보내는 한편 정하상 등 네 명의 열심한 신자들에게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쳐 신부로 키우고자 했던 것이 모두 이때의 일이다. 왜고개는 모두 10명의 순교자가 묻혔던 곳으로 그 중 8명이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따라서 왜고개는 순교성인들이 쉬어간 자리이면서 동시에 그들의 삶과 정신을 느끼기에 충분한 곳이다
 
당고개성지
당고개 순교지는 서소문 밖 네거리, 새남터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성인을 탄생시킨 성지이다. 한국 교회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서소문 밖 네거리 형장에서 41명의 순교자들이 목숨을 잃은 1839년 기해박해 당시 이곳 저자거리를 중심으로 하던 장사치들은 음력설 대목장에는 처형을 중지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서소문 밖 형장을 피해 조금 한강가로 나간 곳이 당고개이다. 원효로 부근 만초천(蔓草川) 변에 위치한 이곳은 1840년 1월 31일과 2월 1일 양일에 걸쳐 10명의 남녀 교우들이 순교함으로써 기해박해를 장엄하게 끝맺은 거룩한 곳이다. 특히 이들 가운데 어린 자식을 거느린 세 어머니는 천주에 대한 뜨거운 사랑에서 모성애까지도 초월하고 순교의 월계관을 차지했다.
 
이곳에서 순교한 이들 중에서 박종원 아우구스티노, 홍병주 베드로와 홍영주 바오로 형제, 손소벽 막달레나, 이경이 아가타, 이인덕 마리아, 권진이 아가타, 이문우 요한, 최영이 바르바라 등 9명이 성인품에 올랐다. 하지만 당고개의 순교자이면서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의 부인이요,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어머니인 이성례 마리아만은 시복 조서에서 제외돼 성인품에 오르지 못했다.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있던 예전 당고개 성지에 올라서면 한가운데 순교 현양탑이 있고 한쪽으로는 기념제대가 있었다. 이 제대는 여성 순교자가 많이 시성된 곳을 기념하기 위하여 1986년 서울대교구 가톨릭 여성연합회에서 봉헌하였다. 제대 뒤로 당고개 순교자들을 표현한 청동 부조상에는 열 명의 순교자와 한복 차림의 예수님이 있고, 성지 둘레에는 십자가의 길 14처가 자리 잡고 있었다.
 
노고산 성지
노고산은 천주교 박해 때 여러 처형장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이유로 많은 순교자들의 시신이 매장되었던 유서 깊은 사적지이다. 현재 노고산 일대에는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서강대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순교자들의 땅 위에 학교 부지를 마련한 서강대학교는 2009년 6월 15일 기해박해 당시 새남터에서 순교한 후 노고산에 4년 동안 매장되었던 앵베르 주교와 모방 · 샤스탕 신부를 기리기 위해 정문에서 가까운 가브리엘관 앞 소나무밭에 세 성인의 순교 현양비를 세우고 정진석 추기경의 주례로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댓글 3

  • 2013년 10월 30일 오전 9:44

    순례전에 올렸어야 했는데...너무 늦게 올려 죄송하옵니다....

  • 2013년 10월 30일 오후 1:33

    아~그런거구나^^... 이렇게 라도 자료로 올려놓으면..나중에 볼수도 있으니까 좋지~^^

  • 2013년 10월 30일 오후 11:51

    아이구~ 좋~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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