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소년 시절을 보낸 곳 골배마실
골배마실은 한국 최초의 방인 사제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가 소년 시절을 보낸 곳이다. 무덤이 있는 미리내에서 산길로 30리, 찻길로 80리 거리에 위치한 골배마실에서 그 옛날 김대건 신부는 그의 나이 15세 때 신학생 후보를 찾아 헤매던 모방 신부에 의해 장래 조선 교회를 이끌 목자의 재목으로 선택된다. 그리고 사제가 되기 위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날 때까지 몸과 마음을 준비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다.
마카오로 유학을 간 신학생 김대건은 아편 전쟁 때에는 마닐라로 피했다가 또다시 중국 땅 요동에서 공부하고 한때는 한만(韓滿) 국경을 전전하다가 서울로 돌아온 것이 9년 만인 1845년이다.
그는 겨우 5개월을 머문 후 상해로 갔다가 그 해 8월 17일 김가항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로 서품된다. 10월 해로를 택해 국내에 잠입했을 때 그는 비로소 자신이 어려서 자라던 골배마실을 찾아 어머니 고 우르술라와 감격의 재회를 한다.
귀국 후 첫 사목지를 은이 마을로 정한 김 신부는 공소를 차려 용인 일대의 사목을 시작한다. 하지만 부친의 임종을 지키지도 못하고 모친 역시 귀국 후 잠시 얼굴을 대했을 뿐, 김 신부는 사제품을 받은 지 1년 만인 1846년 9월 새남터에서 장렬한 순교로 일생을 마감한다.
김대건의 본관은 김해이고, 증조부는 김진후(金震厚, 비오, 1738-1814)이며, 조부는 김택현(金澤鉉)이다. 부친은 김제준(金濟俊, 이냐시오, 1796-1839년) 성인이며 모친은 고 우르술라로 선대 때부터 여러 대에 걸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충청도 솔뫼에서 살아왔다. 김대건은 1821년에 탄생하였고 아명(兒名)은 재복(再福)이며, 보명(譜名)은 지식(芝植)으로 관명(冠名)은 대건(大建)이다. 김대건의 가문에서 처음으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은 증조부 김진후였다. 그는 1791년(신해박해)에 체포되어 1801년(신유박해) 때에 유배되었다가 1805년 다시 잡혀 충청도 해미에서 10년간의 옥중 생활을 하던 중 1814년에 순교하였다.
김대건과 그 가족들이 생활하였던 ‘골배마실’이라는 지명은 배마실이라는 동네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즉 배마실(현 양지성당 소재지)은 옛날부터 첩첩산중인데다 뱀과 전갈이 많이 나오는 지역이라서 뱀마을, 즉 ‘배마실’이라고 불러왔다. 그리고 김대건의 가족이 거주하던 집은 배마실까지 이어지는 골짜기 안에 있어 ‘골배마실’이라고 붙여졌다.
소년 김대건이 세례성사를 받게 된 때는 한국에 프랑스 선교사로서 처음 입국한 나 모방 신부로부터 15세 되던 해인 1836년 은이 공소에서였다. 그러나 소년 김대건은 세례는 받지 않았어도 곧바로 신학생 후보로 선발이 된 사실로 미루어 보아 가정에서 이미 교리 공부와 기도 생활은 착실히 배워 실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816년 이후 시작된 평신도 지도자들의 꾸준한 성직자 영입 운동이(매년 중국교회를 방문했던 시기) 무르익어 결실을 앞두고 있던 때였기에 소년 김대건은 성직자에게 직접 세례 성사를 받고자 하는 뜻을 갖고 기다렸음이 확실하다.
이처럼 골배마실 성지는 김대건의 소년 시절의 향취가 남아 있는 곳이요, 성소의 꿈을 키우던 장소이다. 조선 땅에 이제 곧 오실 신부님을 기다리며 기도하고, 교리를 익히고, 조선 교회의 미래를 위해 한 몸을 바치고자 하는 포부를 가슴에 담고 살았던 장소이고, 세례성사와 첫 영성체를 준비하면서 설레는 마음을 간직하고 생활했던 곳이다.
골배마실은 옛날부터 양지 교우(신자)들 사이에 김대건 신부의 가족들이 살던 집터로 구전되어 왔었다. 하지만 이곳을 발굴하게 된 때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골배마실 성지는 1961년 양지 본당 5대 주임이었던 정원진 루카 신부에 의해 발굴이 시작되어 돌절구와 갖가지 생활 도구, 즉 맷돌, 우물터, 구들장 등을 발견하면서 성지 개발에 착수하게 되었다.
그리고 1997년에는 40년 가까이 옛 모습 그대로 있던 성지를 새롭게 단장하게 되었는데, 새로이 청동으로 제작된 2미터짜리 성상을 모셔 7월 5일 대축일을 맞아 축성하였고 처음 골배마실 성지에 모셔졌던 성 김대건 신부 성상은 양지 성당 정원에 모셔 지금에 이르고 있다.
교우촌 골배마실
수리산이 성 최경환과 최양업 신부의 신앙이 서려있는 곳이라면, '골배마실'은 김제준(金濟俊, 이냐시오) 성인과 김대건 신부의 신앙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김대건 신부의 가족이 고향인 충청도 솔뫼를 떠나 서울 청파동을 거쳐 용인 땅에 정착한 것은 대략 1827년경이었다. 당시 그의 가족이 정착하여 교우촌을 일군 곳은 골배마실이 아니라 남쪽 산너머에 있는 '한덕골'(寒德洞, 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묵4리)이었다.
앞에서 말한 최경환의 형 최영겸도 1832년 무렵에 이곳 한덕골로 이주해 왔으며, 1839년 이후에는 최양업 신부의 넷째 아우인 최신정(델레신포로)이 이 집에서 성장하였다. 지금의 한덕골은 용인읍에서 미리내 방향(남쪽)으로 가다가 6km 쯤에서 왼쪽으로 올라간다. 이곳에서 다시 원천(샘골) 부락을 지나면 영보 수녀원과 신원 컨트리클럽 간판이 나타나고, 더 왼쪽으로 가다보면 한덕골 본동이 나타난다.
김제준은 그 후 가족들을 이끌고 1835년 무렵에 한덕골에서 골배마실로 이주하였다. 이 골배마실은 본래 한덕골에서 북쪽으로 뻗은 산과 어은이 고개를 넘으면 곧바로 갈 수가 있었는데, 지금은 이 길이 막혀 버리고, 양지 방면에서만 들어갈 수가 있게 되어있다. 한편 골배마실 서쪽에 있는 '숨은 이들의 마을'인 '은이'는 지금으로부터 약 160년 전에 형성된 교우촌으로, 이곳 형제봉 아래는 박해 때문에 떠돌게 된 경기도와 충청도 교우들이 모여 비밀리에 신앙 공동체를 이룩한 곳이다.
모방 신부는 1836년 초에 김제준의 방문을 받고, 7월경에 골배마실을 들러 김대건을 신학생으로 선발한 뒤 은이 공소에서 성사를 집전하였다. 이처럼 이동면의 한덕골, 내사면의 골배마실과 은이 공소는 일찍부터 교우촌으로 일구어진 곳이며 김대건과 최양업 두 신부 집안과 관계가 깊은 곳이었다. 또 한덕골에는 김 신부의 조부인 김택현과 숙부인 김제철의 무덤, 최 신부의 중백부인 최영겸의 무덤이 있었고, 1839년에 체포되어 순교한 김제준 성인의 무덤도 골배마실 어딘가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금 이들의 무덤을 찾을 길은 없다.
성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1821-1846)
한국교회의 첫 번째 신부로서 거룩하게 순교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는 신앙과 활동력으로 빛나는 일생을 보냈고 죽음 또한 빛나고 장렬한 것이었다. 1821년 충청도 솔뫼, 구교우 집안에서 태어난 김대건은 어려서부터 비상한 재주와 굳센 성격과 진실한 신심을 드러내 나(모방) 신부는 마침내 그를 다른 소년 두 명과 함께 신학생으로 뽑아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는데 그 때는 1836년, 그의 나이 15세일 때였다.
그는 그곳에서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최방제(崔方濟, 프란치스코 : 수학 중 병사) 등 두 소년과 함께 6년간이나 신학 공부를 하였으며 현지에서 발생한 민란 때문에 두 차례나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고역을 치르기도 했다. 어쨌든 신학 공부를 하던 그는 기회가 오자 귀국 길에 오르게 되어 우선 요동지방에 와서 대기 중이던 고(페레올) 주교를 모시고 입국을 시도했다. 그리하여 그는 1743년 음력 11월, 변문에 이르렀으며, 그곳에서 때마침 북경으로 가던 김 프란치스코를 만나 고국의 박해 소식을 듣는다. 그의 말인즉 국내에는 아직 박해 위험이 남아있을 뿐더러 선교사의 거처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 만큼 그들의 입국은 불가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단독으로라도 입국할 것을 결심하고 혼자서 국경을 넘어 의주까지 잠입했다. 김대건은 의주에서 하룻밤 묵는 동안 포졸에게 발각되어 하는 수 없이 그들을 피해 요동으로 되돌아왔으며 한편 북경으로 갔던 김 프란치스코는 국경에서 그 이듬해 김대건과 다시 만나고 주교의 입국 시기를 음력 11월로 잡고 헤어졌다. 그러는 동안 김대건은 부제품을 받았고 약속 시기에 마중 나온 김 프란치스코 일행과 같이 서울로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때에도 국내 사정을 고려하여 고 주교는 동반치 않았다.
김 부제는 서울에 들어오자 수개월에 걸쳐 오직 주교와 외국인 선교사들을 입국시키기 위한 만반 준비를 갖추는 데 진력했고 마침내는 10여명의 사공을 거느리고 해로를 통해 중국으로 건너가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신품을 받아 드디어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되었으며 그 후 갖은 고난을 겪어가며 고 주교와 안(다블뤼) 신부를 배로 모시고 황해를 건너 조선 땅인 강경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고국에 돌아온 김 신부는 약 2개월 간 휴식 후 곧 교우들에게 성사를 주기 시작했다. 김 신부가 성사를 집전한 곳은 서울과 용인 지방이었으며 당시의 교우들 증언에 따르면 김 신부는 활발한 성격에 얼굴은 고아하고 허우대가 좋았다고 한다. 그는 모친과도 상봉하여 얼마간 같이 머무를 수 있었으나 1846년 음력 4월이 되자 주교의 명에 따라 황해도 지방으로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구라파로 보내는 선교사들의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고 선교사들의 입국하는 길을 새로 개척하기 위해서였다. 이 황해도 지방에의 항해길이 마지막 그의 순교길이 되고 말았다. 그는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고 돌아오는 도중 순위도에서 관헌에게 잡히는 몸이 되고 말았다. 그곳 관에서는 중국 배들을 쫓으려고 때마침 조선 배를 징발 중이었는데 김 신부의 "양반 배를 어찌 징발할 수 있느냐"는 항의가 도화선이 되어 결국 잡히는 몸이 되었던 것이다.
김 신부는 그곳에서 해주 감영으로 이송되었으며 문초 끝에 교회 일이 드러나자 마침내 서울 좌포도청에 갇히게 되었다. 그는 중국 배에서 압수된 주교 편지가 "네 글씨와 다른데, 누구의 것이냐"라는 문초에 "철필과 새털로 쓴 글씨는 다르기 마련이며 철필이 있으면 이렇게 쓸 수 있다"는 말로 위기를 넘기는 기지를 보이기도 했으며 그의 넓은 견식과 당당한 태도는 대관들로 하여금 죽이기에는 국가적으로도 아깝다는 말들을 하게끔 했으나 후환을 입을 것이라는 영의정 권돈인의 주장대로 결국은 사형이 선고되고 말았다. 김 신부의 처형은 9월 16일 새남터에서 모든 것이 군문효수의 절차에 따라 진행되었다 김 신부는 망나니들에게 "너희들도 천주교인이 되어 내가 있을 곳에 오도록 하라"는 말을 남기고 태연하게 칼을 받았다. 이 때 그의 나이 26세, 그의 목이 떨어지자 형장에는 큰 뇌성소리와 함께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고 전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