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동해에 실린 순교의 넋 강릉부 관아
강원도 유형 문화재 제7호인 칠사당은 대도호 부윤(大都護府尹)이 주재하던 조선시대 관공서로 이 건물의 최초 건립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인조 10년(1632년)에 중건하고, 영조 2년(1726년)에 중수했으며, 고종 3년(1866년)에는 진위병(鎭衛兵)의 군영으로 쓰이다가 이듬해 화재로 타 버린 것을 강릉 부사 조명하(趙命夏)가 중건했다고 한다.
교회 사학자들은 여러 순교자 증언록을 인용, 이곳 칠사당에서 병인박해 때 심문도 없이 목이 잘리는 참수형으로 많은 교우들이 순교했다고 말하고 있다. 칠사당 동헌 마당 한가운데에는 체포된 천주교인들을 묶어 갖은 고문을 가하며 심문했던 것으로 전하는 고목이 아직도 푸르름을 간직한 채 남아 있다.
현재 강릉에 남아 있는 유일한 조선 시대 관청 건물인 칠사당은 한쪽이 다락 형식으로 된 ‘ㄱ’자 형태의 건조물로 전국에서도 보기 드문 단아한 조선 시대의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칠사당 뒤편에 있는 임영관 삼문(객사문)은 고려 말에 지어진 것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으로 강원도 내 건축물 중 유일하게 국보 제51호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임영관 안에 들어서면 박해 시대 천주교인들이 무수한 고문에 못 이겨 신음하던 처절한 모습을 떠올리게 되는데, 이곳에서 바라다 보이는 임당동 성당의 전경은 자유로운 신앙생활에 만취해 있는 우리가 신앙 선조들로부터 얼마나 값진 은혜를 받고 있는가를 절감케 한다.
영동 지역에 신앙의 씨앗이 싹튼 곳 금광리 공소
금광리 공소는 1887년에 개설되어 영동 지역의 천주교 모태로서 그 동안 국내의 역사적인 소용돌이 속에서도 잡초처럼 신앙의 씨앗이 싹튼 곳이다.
강원도 영동 지역에 천주교가 적극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한 계기는 고종 3년(1866년) 대원군에 의해서 일어난 병인박해라고 할 수 있다. 강릉 지방에 천주교 공소가 만들어 지는 시기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에 "구한말 19세기 말경에 구정면 금광리와 내곡동 등지에 천주교인들이 이주하여 옹기 굽는 일이나 농사를 지으면서 은밀하게 전교를 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현존하고 있는 금광리 공소 현판에 '1887년 창립'이라고 적혀 있는 것과 부합된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하여 보면 교우들이 강릉에 이주한 것은 이보다 훨씬 이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공소 초기에는 원산의 백응만 신부가 배를 타고 와서 전교하였다고 하며, 그 후 안변과 원산 본당의 주 신부, 표 신부도 배를 타고 와서 전교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강릉 노암동 성당에 속한 공소이다. 현재의 공소는 약 50년 전 본래 있던 공소터에서 길가 쪽으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예전에는 금광리 공소였으며 표지판도 그렇게 되어 있으나 현재 지명은 어단리이기 때문에 어단리 공소라고도 한다. 공소 바로 옆에 김중철(필립보) 공소회장의 집이 있다.
영동 지역의 최초의 공소는 원산교구 소속인 구정면 금광리 공소라고 알려져 있었는데 "뮈텔주교일기"를 자세히 분석한 최근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현재 없어진 강릉시 구정면 금광리 삼정평 공소로 하여야 한다는 설이 있다.
착한 목자 이광재 신부가 사목한 영동지방 신앙의 모태 양양성당
춘천교구 소속 본당.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성내리 8 소재. 1921년 5월 5일 내평(內坪) 본당 관할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주보는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관할 구역은 양양읍, 서면, 손양면, 현북면 전 지역과 현남면, 강현면 일부 지역, 관할 공소는 현북 1개소.
전사 양양 지방의 전승에 따르면, 병인박해 때 충북 제천의 배론[舟論] 교우촌에 거주하던 이 베드로가 양양면 화일리(禾日里)의 범뱅이골로 피신해 오면서 복음이 전파되었다고 한다. 그 후 이 베드로의 동생 이 바오로와 김덕수, 그리고 김덕수의 숙부가 범뱅이골로 이주해 오면서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또 다른 전승은 양양 인근에 있는 속초의 싸리재(上道文里)에 관한 것으로, 충청도 청주에 살던 오광선이 병인박해를 피해 강릉 홍제동으로 이주하였고, 이어 맏아들 오춘영(바오로)이 속초 도문동으로 이주하여 ‘싸리재 옹기점’을 일구었다고 한다. 범뱅이골과 싸리재는 영동 지역에서 최초로 형성된 신앙 공동체였다.
영동 지역에는 1882년 가을 뮈텔(G. Mutel, 閔德孝) 신부가 처음으로 파견되어 이듬해 봄까지 순방하면서 양양 최초의 공소인 쉬일(양양읍 파일리) 공소를 비롯하여 8개의 공소를 설립하였었다.
영동 지역의 신자수는 점차 늘어났지만, 내평 본당과 멀리 떨어져 있어 본당 신부가 공소를 순방하는 데 어려움이 컸다. 이에 뮈텔 주교는 1921년 5월 5일 양양 본당을 설립하고 북간도 조양하(朝陽河) 본당에 있던 최문식 신부를 초대 주임으로 임명하였다. 처음에 최문식 신부는 속초 상도문리의 싸리재에 거주하였으나, 성담 겸 사제관으로 지은 초가집이 허술하였고, 전교 면에서도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성당 이전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1922년 2월 17일 양양읍 서문리 282번지로 성당을 옮긴 뒤 인근의 토지를 매입하였으며, 같은 해 11월 성당 공사에 착수하여 12월 22일 완공하였다.
그러나 1936년 여름 수해로 성당이 완전 침수되자 성당 재신축 계획을 포기하고 시내 중심지로 이전하기로 결정한 뒤 현 성당 소재지의 부지 1,140평을 매입하였다. 공산 정권이 들어서면서 소련군의 주둔으로 성당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런 가운데 1948년부터 연길 · 함흥 · 원산 지역의 성직자와 수도자들, 그리고 신자들이 양양 본당을 거쳐 남하하게 되자, 이광재 신부는 이들이 무사히 월남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그러던 중 이광재 신부는 1950년 6월 24일 공산군에게 연행되어 원산 와우동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0월 9일 총살당하였다.
전란 중 성당은 화재로 소실되었고, 본당 신부가 공석이 되면서 신자 공동체 역시 혼란에 빠졌다. 이에 주문진(注文津) 본당에 이어 동명동(東明洞) 본당에서 사목하던 맥고완(P. McGowan, 元) 신부가 1952년부터 1954년까지 양양 지역을 맡아 사목하면서 성당(65평)을 신축하였다. 그리고 4대 주임으로 부임한 설리반(T. Sullivan, 서) 신부는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1954년 11월 30일 성당 봉헌식을 거행하였고, 1956년에는 강현 공소(강현면 정암리 2구)를 설립하여 12월 25일에 강당을 신축하였으며, 1958년 1월 10일에는 현북면 상광정리에 460평의 부지를 매입한 뒤 11월 8일 32평의 현북 공소 강당을 신축했다. 또 1960년 4월 1일 수녀원 신축 공사에 착수하여 같은 해 7월 12일 2층으로 된 수녀원을 완공하였다. 한편 1960년대에 접어들어 한때 냉담자들이 크게 늘어나면서 본당 재정 상태가 매우 약화되기도 하였다.
본당에서는 2000년 10월 8일 이광재 신부 순교 50주년 기념 미사를 봉헌하는 등 이광재 신부가 시복 · 시성될 수 있도록 끊임없는 기도와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광재 신부 현양사업 또한 본당에서는 순교 50주년 기념미사뿐만 아니라 순교각(殉敎閣) 옆에 있는 옛 수녀원 건물에 ‘이광재 신부 기념관’을 개관하였으나 이광재 신부에 대해 증언해 줄 당시 생존자가 대부분 사망한데다 전쟁으로 본당 유물을 대부분 잃어버려 기념관을 꾸미는데 부족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 평신도들을 중심으로 ‘이광재 신부 기념사업회’를 구성하여 이광재 신부의 유품과 사료 등을 모으고 생존자를 찾아 증언을 녹취하는 등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기념관에는 이광재 신부의 제의와 제구, 친필 교리서 등이 보존되어 있는 이는 신자들이 그것들을 옹기에 숨겨놓고 피난을 떠난 덕분이었다.
춘천교구의 시복시성 대상자는 이광재 신부(디모테오, 1909-1950)와 백응만 신부(다마소, 1919-1950),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 고 안토니오 신부(Anthony Collier), 진 야고보 신부(James Magin), 나 파트리치오 신부(Patrick Reilly) 등 5명이다. 교구는 대상자 5명의 행적 조사와 함께 이외에도 전쟁 전후로 강원도 지역에서 순교한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를 발굴할 예정이다. 그 일환으로 양양 본당은 2009년 6월 9일 이광재 신부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석상 제막식과 기념미사를 봉헌하였다.
금광리 본당으로 설립되어 영동지방 신앙 중심지로 발전한 임당동 성당
춘천교구 소속 본당. 강원도 강릉시 임당동 159 소재. 1921년에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성 골롬바노.
공소 시대와 본당의 설립 영동 지역에 교우촌이 형성된 때는 1866년 병인박해 이후이다. 다시 충청 · 전라 · 경기도의 신자들이 산간 지대로 피신해 오면서 이곳에도 교우촌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 중 강릉 지역은 1882-1883년에 삼정평(강릉군 구정면 여찬리) · 새울(강릉군 구정면 어단리) 공소가 설립되었고, 1887년에는 금광리(강릉군 구정면 금광리) 공소가 설립되는 등 병인박해 이후 꾸준히 신자들이 존재해 있었다.
당시 영동 지역은 1893년 이후 안변(내평) 본당에서 관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지역은 내평 본당과 멀리 떨어져 있었고, 또 신자수가 점차 늘어나면서 본당의 설립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 결과 교구에서는 1921년 5월에 양양 본당을 설립하고 최문식(崔文植) 베드로 신부를 초대 주임으로 임명하였다.
그런데 양양 본당의 신설 당시, 교구에서는 이미 영동 지역에 또 하나의 본당을 설립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이에 최문식 신부의 보좌로 임명된 이철연(李喆淵) 프란치스코 신부는 1921년 12월에 금광리 본당(주문진 본당 · 임당동 본당의 전신)을 설립하고 강릉 지역의 사목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금광리는 거주하기에 적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발전 가능성도 적어, 이철연 신부는 1923년 말에 주문진(강릉군 신리면 교항리 133번지)에 새 부지를 매입한 뒤, 성당과 사제관을 짓고 주문진으로 본당을 이전하였다.
하지만 주문진에서의 전교는 활발하지 않았고, 또 지역적으로도 주문진보다는 강릉 지역의 발전 가능성이 더욱 높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9년 1월 주문진 성당이 화재로 전소되자, 2대 주임 김인상(金寅相) 야고보 신부는 금광리로 본당을 옮겼다가 1931년 6월 강릉시 임당동에 12칸짜리 가옥을 매입하고 본당의 이전을 준비하였다.
1934년 강릉으로 이전된 본당은 점차 본당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가던 가운데 광복을 맞이했다. 광복 후 본당에서는 본당의 내실화는 물론, 사회 복지 · 교육 사업을 통해 지역 속의 본당 공동체를 구현했는데, 1946년에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를 초청하여 본당 사목의 내실화를 기하는 한편, 성심보육원과 성심공민학교(1957년 폐교)를 설립하여 고아 보육과 불우한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 사업을 전개하였다.
뿐만 아니라 1951년에는 1,128평의 대지를 매입한 뒤 1955년 10월에 성당을 신축하였고, 1956년 12월에는 ‘증거자들의 모후’ 쁘레시디움을 창단하여 레지오 마리애 활동도 시작하였다. 이어 1962년 10월에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가 본당 사목을 맡았고, 1964년 3월에는 갈바리아 의원을 개원하여 의료 봉사에도 힘을 쏟았다. 또 1967년에는 소화유치원을 개원하여 유아 교육을 실시하였으며, 1968년에는 강릉시 내곡동과 강릉시 성산면 위촌리에 교회 묘지를 조성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 강릉 본당은 외형적으로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신앙적인 측면에서도 더욱 성숙해 갔다. 그리하여 1973년 3월에는 ‘신용협동조합’을 창립하여 신자와 지역 주민들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주었고, 4월부터는 울뜨레야 · 효성회 · 안나회 · 빈첸시오회 등 여러 신심 단체가 설립되어 개인 및 가정 성화의 기초를 확립해 갔다. 그런 가운데 본당의 신자수가 증가하면서, 1974년 11월에는 옥천동 본당을 분가시켰고, 아울러 본당 명칭도 강릉 본당에서 임당동 본당으로 바꾸었다.
임당동 성당은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1955년에 완공되었다고 믿기엔 너무도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다. 성당 내부는 조광호 신부의 유리화 작품에서 나오는 오묘한 색채로 가득 차 있다. 예수님의 탄생 예고, 노아의 방주와 무지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등 다양한 주제의 유리화들은 빛을 내뿜고 있다. 청동으로 만든 제대 십자가, 동을 소재로 한 십자가의 길, 나무로 만든 주수대 · 감실대 · 독서대 · 제대와 유화로 그린 제대와 독서대의 그림 등 성당 내부 전체가 조광호 신부의 성미술 작품으로 꾸며졌다.
성당에서 나와 왼쪽 건너편을 바라보면 강릉 임영관지가 있다. 이곳 칠사당과 임영관 삼문인 객사문에서 병인박해(1866년) 당시 많은 신자들이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강릉 지역의 순교자로 교회 공식 문헌에 나타나고 있는 이는 “치명 일기”에 기록되어 있는 심 스테파노 한 명뿐이다. “치명일기”에 있는 심 스테파노에 관한 내용을 보면 “본디 강릉 굴아위에 살더니, 무진 5월에 경포(포도청 포졸)에게 잡혀 지금 풍수원 사는 최 바오로와 함께 갇히었다. 치명하니 나이는 29세 된 줄은 알되 치명한 곳은 자세히 모르노라.”고 기록되어 있다.
임당동 성당은 1950년대 강원도 지역 성당 건축의 전형을 보여주는 건물로 외관의 뾰족한 종탑과 지붕 장식, 첨두형 아치 창호, 부축벽을 이용한 입면구성 및 내부의 정교한 몰딩 구성 등 의장기법에서 보존가치가 높을 뿐 아니라 영동 지역 신앙의 중심지로, 영동 지역 많은 본당의 모본당이라는 역사성도 겸비하고 있어 2010년 2월 19일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457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강릉 임영관지(臨瀛館址)는 사적 제388호, 임영관 삼문(三門)인 객사문(客舍門)은 국보 제51호, 칠사당(七事堂)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