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교구-황새바위,중동성당,수리치골-2015년1월18일

2015. 4. 14. 오후 6:5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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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주 황새바위 성지 >                          ---2015년 1월18일

-순교 역사의 시초부터 마지막까지 순교자를 낸 거룩한 땅

: 대전교구-충청남도 공주시 왕릉로118(금성동 46-1). 041-854-6321


공주는 순교 역사의 시초부터 마지막까지 순교자를 낸 거룩한 땅이다. 조선 건국 직후부터 관찰사가 관할하는 감영과 토포사가 관할하는 진영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자 충청도 전역에서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어 공주로 끌려 왔으며,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된 내포의 사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 등 10여 명의 회장들을 비롯하여 연령, 성별, 신분에 관계없이 무수히 많은 신자들이 옥에서 교수형이나 장사로 순교하거나 황새바위에서 순교하거나 참수형을 당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된 내포의 사도 이존창(1759-1801. 루도비코 곤자가)이 1801년 4월 9일 이곳에서 처음으로 참수형을 받은 것을 비롯하여, 보름 후 청주에서 체포되어 온 이종국이 참수되었고, 5월경에는 문윤진, 7월경에는 이국승이 참수형을 당하였다. 이후 공주에는 1812년 장대원 마티아와 황 바오로가 참수된 기록이 있다.

가장 나이어린 순교자는 김춘겸의 딸로 당시 불과 10살밖에 안 되었고, 최 연장자는 남상교(1783-1866, 아우구스티노)로 당시 84세 였다. 20세 미만의 순교자도 20명이나 되었으며, 양반, 중인, 농민, 노비 등 그 신분 계층도 다양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가 시작되자 공주에는 또다시 내포 지역을 비롯하여 인근의 전라도 북부와 충청북도, 경기도 일부에서까지 신자들이 체포되어 끌려왔다. 지금까지 기록상(1866-1873)당시 박해로 공주 지역에서 순교한 신자들은 1866년 109명, 1867년 56명, 1868년 12명, 1869년 이후 16명 등 총 193명으로, 이는 이름이 밝혀진 내포 지역(공주, 해미, 홍주) 순교자 334명의 57.8%를 차지하는 아주 높은 비율이다. 물론 이들 가운데 몇 명이나 황새바위에서 참수형을 당하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해미에서 체포된 이 가롤로나 연산에서 체포된 김윤지 등 여러 사람이 이곳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한 듯하다.

황새바위라는 명칭의 유래는 이곳 이곳 가까이에 황새들이 많이 서식했기 때문이라고도 하며, 혹은 목에 큰 황새 칼을 쓴 죄수들이 이 언덕바위 앞으로 끌려나와 죽어 갔기 때문에 황쇄바위라 불리기도 했다고 전한다. 황새바위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공개 처형할 때에는 맞은편 산 위에서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마치 병풍을 친 모양으로 둘러서서 구경을 하였다고 한다. 처단한 죄인들의 머리는 나무 위에 오랫동안 매달아 놓아 사람들에게 천주학을 경계하게 하였으며, 그들의 시체는 강도, 절도범들의 시체와 섞여 어느 것이 순교자의 것인지 구별하기조차 어려웠다. 황새바위 앞을 흐르는 제민천은 지금처럼 둑이 쌓여 있기 전에는 지금보다 훨씬 넓었는데, 홍수로 범람할 때에는 순교자들의 피로 빨갛게 물들어 금강으로 흘렀다고 한다. 
 

   <공주 중동성당 >

-110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공주 최초의 본당

대전교구-충청남도 공주시 성당길 6(중동 31-2), 041-856-1033


중동 성당의 전신은 1897년 5월 8일에 설립된 공주 본당으로 110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1897년 4월1일 프랑스 진베드로(가낭)신부가 유구면 요골 공소로 부임한 후 그해 7월에 성당 부지로 사들인 공주읍내 중심지인 강경골로 진출하여 교회를 설정한 곳이 현 중동 성당이다. 국 고개라고 불리던 언덕 위에 자리한 공주 중동 성당은 서양 중세 때 유행하던 고딕 양식의 건물이다.

1881-1882년 이후 약 10년 동안 로베르(바오로, 1853-1922)신부와 충청도를 나누어 담당한 두세(가밀로, 1853-1917)신부는 매우 넓은 지역에 흩어져 있는 신자들을 열정적으로 순방하였다. 당시 로베르 신부는 주로 충청도북부 지역을, 두세 신부는 충청도 남부 지역을 순회하였다. 이 때 두세 신부가 방문한 지역들은 충청남도의 천안, 공주, 부여 등 10개 지역과 경기도의 안성, 평택 등 2개 지역이었다. 그리고 모두 35개의 교우촌을 공소로 설정하였다.

공소가 설립될 무렵 공주읍내에는 신자 수가 20명 내외에 불과하였다. 1888-1889년에는 요골, 만악골(유구읍 명곡1리, 서재 공소 이웃), 사기점골, 버시니, 공주읍, 운암산 등 여섯 곳에서 공소가 열렸고, 다음 해에는 다시 삼배실(탄천면 운암리, 현재는 이인면 운암리, 운암산 공소 이웃)공소가 추가되어 7개 공소로 증가하게 되었다.

1898년 파리 외방전교회 진 베드로(기낭) 신부가 이곳에 성당을 세우고 교리 전파를 시작하면서 공주에 천주고가 자리 잡았다. 1934년에 착공하여 1936년에 완공한 성당 건물은 현재 본당과 교육관이 남아 있으며, 서양 중세기에 유행했던 고딕 양식을 따르고 있는데 평면은 약간 라틴식 십자가형이고 내부는 3랑식이다. 1982년 9월 17일 공주 교동 본당을 분리하면서 공주 중동 본당으로 개칭되었다.

<최종수 요한의 순교>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자 성당과 사제관 건물은 인민군에 의해 몰수되고 민청 및 정치 보위부 사무실로 그리고 인민재판소로 사용되었다. 이곳 공주를 점령한 인민군은 성당에 들어와 성모상을 비롯하여 감실과 제대에 닥치는 대로 총질을 하며 제의와 성작 성물들을 모두 훼손하고 군마를 성당 안으로 끌여들여 성전을 더럽혔다. 이것을 본 최종철(1890-1945, 마르코)신부의 동생인 최종수 요한은 분개한 마음을 누를 수 없어 항의하다가 7월 20일 인민군의 총탄에 쓰러져 순교하였다. 그리고 당시 본당 회장이었던 권오현 베드로는 흩어진 성체를 모두 모아 영하였다고 한다. 이런 순교와 모범적인 희생 덕분인지 더 이상 성당은 파손되지 않고 본래의 모습을 간직한 채 오늘까지 보존되고 있다. 
 

   <공주 수리치골 성지>

-한국교회를 봉헌하고 성모 성심회를 조직하였던 성모성심 신심 발상지

대전교구-충청남도 공주시 신풍면 봉갑리 산117-1 ,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041-841-7981


수리치골은 박해 시대 선교사들의 근거지이며, 충청도 지역의 선교 중심지 교우촌이었다. 특히 한국 교회와 민족을 위해 성모 성심께 한국과 한국 교회를 봉헌하고 성모 성심회를 조직하였던 성모 성심 신심의 발상지로서 한국 천주교회의 신앙 형성에 공헌을 했다는 점에 의이가 있는 곳이다. 당시 공주 지방에는 국사봉을 중심으로 둠벙이, 용수골, 덤티, 진밭, 먹방이 등 여러 군데에 교우들의 은거지가 있었는데, 그중에서 수리치골이 가장 깊숙하고 넓어 많은 교우들이 모여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수리치골이 특히 교회사적으로 의의를 갖는 것은 1846년 11월 2일 페레올(요셉, 1808-1853, 요셉)주교와 성 다블뤼(1818-1866, 안토니오)신부(1857년 주교가 됨)가 박해 받는 한국 교회와 민족을 위해 성모 성심께 한국과 한국 교회를 봉헌하고 성모 성심회를 조직하였던 성모 성심 신심의 발상지로서 한국 천주교회의 신앙 형성에 공헌을 했다는 점에 있다.

성모 성심회는 원래 1836년 프랑스 파리에서 창설된 신심 단체로 창설자는 파리의 승리의 성모 대성당 주임이던 데쥬네트 신부이며, 본부는 승리의 성모 대성당에 있다. 이 회의 목적은 성모 성심을 특별히 공경하고 성모 성심의 전구를 통해 죄인들의 회개를 하느님께 간구하는데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초기부터 성모 신심이 유달리 강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신심은 1835년 말 이래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 더욱 깊어졌다. 특히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1796-1839,라우렌시오)주교는 1838년 12월 1일에 조선교구의 주보를 성모 마리아로 모시게 해 달라고 교황청에 요청하였으며,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이를 허락하여 1841년 8월 22일에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를 ‘성 요셉’과 함께 공동 주보로 정해 주셨다.

이에 감사하기 위하여 다블뤼 신부는 페레올주교와 함께 1846년 11월 2일 공주 수리치골 성심회를 창립하고, 박해받는 조선 교회를 보호해 달라고 전구하게 되었다. 수리치골은 당시 교우촌이 아니라 단지 열심한 신입 교우 가족만이 사는 외딴 곳이었다. 그런데 다블뤼 신부가 이곳을 방문하여 성모 성심회를 설립함으로써 자연 인근의 신앙 중심지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옛 수리치골 교우촌은 미리내 ‘천주 성삼성직 수도회’ 와 ‘성모 성심 수녀회’를 창립한 정행만 신부가 오랜 답사 끝에 찾아내게 되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4년 5월 6일 명동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님이 1846년 무서운 땅 박해하에 공주 땅 수리치골에서 이 나라와 교회를 요셉 성인과 공동 주보이신 성모께 조용히 봉헌했다.”고 상기시켰다. 페레올 주교는 성 김대건 신부에게 성품성사를 준 분이다. 현재 미리내 성모 성심 수녀회가 성지를 관리하고 있다.

댓글 3

  • 2015년 4월 16일 오후 10:21

    아....이 좋은 자료들을 주욱 보는데....그것은 주마등처럼 스칠뿐...밤잡채,밤피자,생 밤...등이 생각나는 것은 어이하리요...

  • 2015년 4월 16일 오후 10:24

    시간도 꽤나 지났는데...애썼다^^

  • 2015년 5월 6일 오전 1:01

    공주밤 먹고싶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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