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교구-솔뫼성지,원머리,신평성당,합덕성당-2015년7월11-12일

2015. 10. 16. 오전 1:40:43

글자

원머리(신평 한정리) ----------------- 2015711-12

다시 돌아온 원머리 출신 순교자 박 마르코와 박 마티아 -충청남도 당진시 신평면 한정리 233 (041-363-6761)

신평 성당

순교자 박 마르코와 박 마티아가 머물던 거룩한 자리 -충청남도 당진시 신평면 금천리 907 (041-363-6761)

대전교구 신평 성당 관할 구역인 원머리(충청남도 당진시 신평면 한정리)는 성당에서 북쪽으로 약 3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이미 상당히 큰 교우촌을 이루고 있었다. 원머리라는 지명은 바닷가에 둑을 쌓기 시작한 곳이라는 뜻에서 나온 언머리가 변형된 것으로 염전과 논농사를 주로 하며 살던 박씨, 양씨, 조씨, 문씨 등이 신앙을 받아들여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이미 병인박해 때 상당히 큰 교우촌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마침내 이곳에도 박해의 광풍이 몰아쳐 1866년부터 1868년까지 3년여에 걸친 대박해로 많은 순교자를 배출하게 되는데, 현재 한정리(원머리)에 유해가 안장되어 있는 박태진 마티아와 박선진 마르코는 무진년(1868)에 수원 감옥에서 순교하였다.

순교자 박선진 마르코의 아우 박 요셉은 1920년대에 형의 순교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마르코는 모친의 뜻을 따라 착실히 수계하면서 모친과 함께 동네 교우들과 연락하고 지냈다. 신부님이 오시어 성사를 받으려하면 부친이 금하는 고로 이를 마음속으로 꺼리더니 무진년에 수원 포교에게 체포되어 잡혀 갈 때 그는 부모에게 하직하며 위로하되 거기 가서 죽으면 육정의 박절함이 없을까 만은 주 명대로 위주(爲主)하여 죽는 것이 구령에 편한 일이라, 부디 염려마시고 훗날을 조심하십시오.’라고 한 다음 사촌 형인 박태진 마티아와 함께 수원 옥에 갇혔다.”

수원 감옥에서 순교한 후 고향 원머리에 안장되었다가 신평 성당 구내로 갔다가 2009년 원머리로 재이장한 박씨 형제 순교자 묘소.모진 고문을 당할 때 박태진 마티아가 이를 못 이겨 배교하려 하자 박선진 마르코는 천주를 배반하고 영벌을 받으려 하느냐?”고 형을 깨우쳤고, 이에 박태진 마티아는 배교한 것을 뉘우치고 옥에 갇힌 지 15일 후에 같이 순교하였는데, 죽은 후 외교인의 도움으로 시신을 찾아 이곳 원머리 박씨 집안 땅에 안장하였다. 이때 박선진 마르코의 나이는 33세였고 박태진 마티아의 나이는 52세였다.

그 후 박선진 마르코와 박태진 마티아의 묘는 198944일 신평 성당 구내로 옮겨 모시고 현양비를 세웠다.

이들 박씨 형제 외에도 순교로 신앙을 증거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낸 원머리(신평) 출신 19위의 순교자들에 대해 치명일기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양 도미니코 회장 · 박 회장 · 유 서방 · 김동 4인이 정묘년(1867)에 홍주(홍성) 감옥에서 순교하였으며, 최 베드로 · 김 루치아 · 김 마리아 · 원 아나스타시아 4인이 무진년(1868)에 홍주에서 같이 순교하였으며, 또 같은 해에 박 요한과 문 마리아가 해미에서 순교하였고, 원씨 · 김 마리아 2인이 홍주에서 정묘년에 순교하였고, 최 아우구스티노 · 홍 베드로닐라 · 양정수 · 양 아우구스티노 · 홍 베드로 · 한 마티아 6인이 병인년에 홍주에서 순교 치명하였으며, 같은 해 김백선이 해미에서 순교하였으니, 이곳 원머리에 얼마나 큰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는지를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신심 또한 얼마나 깊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신평 성당은 2000년에 새 성당을 건축하면서 박선진 마르코와 박태진 마티아의 묘를 재정비하였고, 2009년 대전교구 성지위원회의 결정과 교구장 유흥식 라자로 주교의 허가를 얻어 순교자 현양과 성지 개발을 위해 그 해 113일 본래 두 순교자가 묻혔던 원머리로 유해를 재이장하였다. 그리고 현양비도 수정하여 다시 세우고 묘역 또한 재정비하였다. 아울러 20여 년간 두 순교자가 모셔져 있던 신평 성당 자리에 기념비를 세워 두 순교자의 믿음과 순교정신을 기리고 있다.

[출처 : 신평 성당 홈페이지, 내용 일부 수정(최종수정 20141221)]

솔뫼 성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탄생지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 108(041-362-5021)

1845년은 한국 교회 최초의 방인 사제인 김대건(金大建, 1821-1846) 신부가 사제품을 받고 귀국한 역사적인 해이다. 세계 교회 역사상 그 유래가 없이 자생적으로 설립된 한국 천주교회는 그 해 김대건 신부의 사제 서품과 귀국으로 비로소 명실상부한 교회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솔뫼는 바로 한국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탄생지로서, 성인이 박해를 피해 조부 김택현(金澤鉉)을 따라 용인 땅 골배마실로 이사 갈 때인 일곱 살까지 살았던 곳이다.

소나무가 우거진 작은 동산이라는 뜻을 가진 솔뫼는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이곳은 김해 김씨 안경공파에 속한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金震厚, 1739-1814년 순교), 종조부 김종한 안드레아(金宗漢, ?-1816년 순교, 족보에는 漢鉉으로 나옴), 부친 김제준 이냐시오(金濟俊, 1796-1839년 순교) 그리고 김대건 신부 등 4대의 순교자가 살던 곳이다. 김대건 신부는 바로 이곳에서 사제품 받고 1년 만인 1846년 순교하기까지 그의 삶을 채웠던 뜨거운 신앙과 열정을 배웠던 것이다.

김대건 신부가 198456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오르고 30년 뒤인 2014816, 나머지 3대 순교선조들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올라 4대 모두 복자와 성인품을 받았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상과 성인을 감싸고 있는 성모상 형상의 기념탑.이 작은 마을에 복음이 전래된 것은 김대건 신부의 조모 이씨의 삼촌이며 내포의 사도로 불리는 이존창 루도비코가 그의 고향인 충청도 지방의 전교를 맡으면서 시작되었다.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가 면천 군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 그는 이존창으로부터 복음을 전해 듣고는 곧 벼슬을 버리고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그로부터 이곳 솔뫼는 교우촌이 되었다.

하지만 1791년 전라도에서 제사 문제로 일어난 진산 사건으로 그 역시 신해박해의 회오리에 휩쓸려 홍주 · 전주 · 공주 등지의 옥에 갇히게 되었고,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귀양을 떠나야만 했다. 그 후 귀양에서 풀려 돌아온 후 1805년 또다시 붙잡혀 해미 감옥으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10년간 옥중 생활의 고통을 참아내던 중 1814121(음력 1020) 75세를 일기로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1821821일 부친 김제준 이냐시오와 모친 고 우르술라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난 김대건 신부는 재복(再福)이라는 아명으로 솔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당시 김대건 일가가 살던 집은 아흔아홉 칸이나 되는 큰 집이었다고 한다.

솔뫼에서 대대로 명망이 높았던 김씨 가문이었지만 김진후가 수차례 체포되기를 반복하고, 1805년부터 10년간의 긴 옥중 생활을 하면서 가세가 기울어 신앙을 지키고 살기가 어려워졌다. 셋째 아들 종한은 부친이 옥중에 있을 때 경상도 안동 땅으로 피난을 갔다가 붙잡혀 1816년 대구 감영에서 순교하였다. 둘째 아들 택현은 1827년 아들 김제준과 손자 김대건 등을 데리고 경기도 용인 땅 골배마실이라는 산골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오랫동안 살아왔던 집과 땅이 있는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김씨 일가의 피난길은 설움과 눈물이었지만 신앙을 지키겠다는 굳은 의지에서 나온 결단이었다.

성 김대건 신부 기념관 전시실 내부.선대의 신앙을 이어받은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은 성 모방(Maubant) 신부로부터 세례와 견진성사를 받고 회장에 임명되어 전교에 힘쓰면서 자신의 아들을 사제의 길로 인도하였다. 그리고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그 해 926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마카오로 유학을 갔던 신학생 김대건은 1845817일 상해 김가항(金家港) 성당에서 페레올(Ferreol)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고 그 해 10월 귀국하였다. 귀국 후 첫 사목지를 은이 마을로 정한 뒤 공소를 차려 용인 일대의 사목을 시작하였다. 유학 중에 부친의 임종을 지키지도 못하고 모친 역시 귀국 후 잠시 얼굴만 대했을 뿐, 김대건 신부 또한 사제품을 받은 지 1년 만인 18469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장렬한 순교로 일생을 마감하였다. 1814년 증조부인 김진후로부터 시작하여 김대건 신부까지 32년 동안 김씨 일가는 4대가 순교의 월계관을 쓰는 신앙의 명가가 된 것이다.

1906년 합덕 성당 주임 크렘프(Kremff) 신부는 솔뫼를 성역화하기 위해 인근의 토지 매입을 시작하였고, 1946년 김대건 신부의 순교 100주년을 앞두고 백문필(Perrin) 필립보 신부는 복자 김대건 신부 100주년 순교 기념비를 세우고 생가 터를 매입하였다. 그 후 대전교구는 1976년부터 성지 개발을 본격화해 이듬해 3m 높이의 김대건 신부 동상과 기념탑을 건립했다. 동상은 한국 전통 의상인 갓과 도포를 갖추고 영대를 두른 모습으로 바로 뒤에는 보호자인 성모를 의미하는 흰 기념탑을 세웠다. 이어 1983년에 순교자 신앙을 가르치고 전하는 솔뫼 피정의 집을 건립하여 솔뫼 성지를 순교자 신앙의 학교로 삼았다.

조각 작품으로 야외에 조성된 십자가의 길.대전교구는 또한 1998728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146호로 지정된 김대건 신부의 생가 터에 지자체와 함께 2004922일 생가를 복원하여 축복식을 가졌다. 복원된 성 김대건 신부 생가는 전통 한옥 구조로 당시 내포 지역 사대부가 살던 집 규모와 구조를 따라 건립되었다. 이어 2006330일에는 성 김대건 신부 기념관과 성당 축복식을 갖고 성인의 성덕과 순교 정신을 기리고 본받기 위한 장을 마련하였다.

새로 정비된 성지 입구에 들어서면 뫼산()자 모양의 정문과 그 옆의 예수성심상이 자애로운 미소로 순례자를 맞이한다. 성 김대건 신부 기념관 정면에 조성된 솔뫼 아레나와 생가 사이에는 한복을 입고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2m 크기의 솔뫼 성모상이 정겨운 시선으로 순례자를 맞이한다. 성모상을 지나면 소나무 숲속에 건립된 성 김대건 신부 동상과 기념탑, 그리고 가장자리 벽면으로 유리타일로 제작된 십자가의 길 15처와 조각 작품들로 조성된 십자가의 길 14처가 순례자들의 마음을 이끌고 있다.

이는 2009년 주차장 및 야외 화장실 건립 공사를 시작으로 5년여에 걸쳐 솔뫼 성지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 작업을 시행한 결과이다. 솔뫼 성지는 한국인 첫 사제인 성 김대건 신부가 태어난 성지의 위상에 걸맞게 야외무대와 광장을 조성하고 성지를 집회와 순례, 기념 공간으로 나누어 순례자들이 성지순례의 참 의미를 묵상하도록 단장하였다. 노후화된 솔뫼 피정의 집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13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야외 공연장이자 문화공간인 솔뫼 아레나(Arena)와 광장을 건립해 2011514일 축복식을 가졌다. 아레나는 고대 로마 원형경기장 내지 극장 중심 부분을 지칭하는 말로, 로마 시대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한 곳이기도 하다.

2014815일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솔뫼 성지를 방문해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한 청년들과 만남의 시간을 가졌고, 그해 925일 문화재청에 의해 김대건 신부의 생가가 있는 당진 솔뫼마을 김대건 신부 유적이 국가 지정문화재 사적 제529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41211)]

합덕 성당

두 개의 첨탑은 신앙의 파수꾼인가? 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읍 합덕리 275-2 (041-363-1061)

내포 지방은 예로부터 충청도 지역 교회의 중심지였다. 합덕 본당은 바로 이 내포 평야에 복음을 밝힌 지 120여 년이 넘어 한국 교회의 산 증인이 된 유서 깊은 본당이다. 합덕 성당 인근에는 손자선 토마스(?-1866) 성인의 생가이자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8-1866) 주교의 주교관으로 사용되었던 초가집 주변에 조성된 신리 성지가 있고, 옛 동헌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면천 사적지도 자리하고 있다. 합덕 삼거리에서 서야 고등학교 방면으로 조금 올라오다 보면 길 오른쪽 낮은 언덕 위에 마치 두 팔을 들어 환영하듯 두 개의 첨탑이 우뚝 서 있는 합덕 성당이 눈에 들어온다. 두 개의 첨탑으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상징하며 고딕 양식으로 1929년에 건립된 유서 깊은 성당이다.

합덕 성당의 전신은 1890년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에 설립된 양촌 성당으로, 퀴틀리에(Curlier, 南一良, 1863-1935)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였고, 1899년 현 위치로 이전하면서 합덕 성당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현재의 성당 건물은 1929년 제7대 주임인 페랭(Perrin, 白文弼, 1921-1950년 재임) 신부 때 준공된 것으로, 페랭 신부가 6.25 때 체포되어 순교한 슬픈 역사도 간직하고 있다.

1998728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145호로 지정된 성당 내부.페랭 신부 재임 때인 1926년 예산 본당, 1935년 서산 본당, 1938년 당진 본당이 각각 분리 신설되었고, 1961년 제8대 박노열 바오로 신부 때 신합덕 본당이 분리되면서 합덕 본당은 구합덕 본당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 후 1997년 다시 본래의 이름인 합덕 본당으로 변경되었다.

성당 정면으로 난 계단에 올라 도톰한 언덕배기를 바라보면 빨간 벽돌과 두 개의 첨탑으로 세워진 성당이 그림같이 펼쳐진다. 계단 왼쪽으로는 성모동산이 조성되어 평화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성당 정면에서 신자들을 반기는 예수성심상을 바라보며 오른쪽으로 돌면 초가지붕 아래 설치된 본당 주보(主保)인 성가정상과 함께 너른 잔디광장이 펼쳐진다. 광장을 지나 성당 뒷마당으로 내려가면 야외제대와 또 하나의 잔디광장 그리고 성 황석두 루카(黃錫斗, 1813-1866)6.25 순교자인 페랭 백문필 신부, 윤복수 라이문도 총회장, 송상원 요한 복사의 순교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양들을 위해 끝까지 성당에 남은 백 신부는 1950814일 고해성사 중에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피살되었고, 윤 회장과 송 복사 또한 백 신부의 곁을 지키기 위해 자진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황석두 성인 순교비와 6.25 때 순교한 분들의 순교비와 가묘가 성당 뒷마당에 자리해 있다.합덕 본당은 30년간 본당에 재임하다가 6.25 때 순교한 백문필 신부를 기념해 1957년 성당 옆에 백 비리버 문필 신부 순교비를 건립하였고, 함께 순교한 두 평신도의 순교비는 2005년 본당 설립 115주년과 순교 55주년을 맞아 그 옆에 나란히 세웠다. 그리고 순교비 옆에는 이 지역의 신자들을 하느님께 인도했던 백 신부를 포함한 네 명의 신부 묘소(유해는 2003년 대전가톨릭대학교 내 성직자 묘지로 이장하였다)와 백 신부와 함께 순교한 회장과 복사의 묘소를 조성하였다. 백 신부와 함께 순교한 두 평신도의 묘소에는 유해 없이 유물만 묻었다. 현재는 순교비와 묘소 모두를 성당과 구 사제관 사이 뒷마당, 야외제대 옆으로 옮겨 모셨다.

내포 교회 가운데서도 유서 깊은 공동체인 합덕 성당은 1998728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145호로 지정되었고, 2008년에는 성당 구내에 당진시와 함께 합덕 유스호스텔을 건립하여 젊은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신앙인들에게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였다. 2010년에는 본당 설립 120주년을 기념해 221일 모태인 양촌 공소에 기념비를, 412일 성당 내에 착한 목자 백문필 필립보 신부 흉상을, 1225일 성당 초입에 120주년 기념비를 건립해 제막식을 가졌다. 이어 2014년에는 성당 옆에 있는 구 사제관 복원공사를 마무리하였다.[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5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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