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교구-여사울성지,신리성지, 신리무명순교자묘-2015년10월17-18일

2015. 10. 16. 오전 1:42:45

글자

<대전교구>

여사울성지 ----------------- 20151017-18

내포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가 살던 곳 -----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 122-4(041-332-7860)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李存昌, 1759-1801)의 생가 터가 있는 여사울은 신례원 본당의 공소를 거쳐 2008년 성지본당으로 지정되었으며, 주민의 상당수가 천주교 신자로 구성되어 있는 선교의 요람이다.
내포’(內浦)라 함은 충남 아산(牙山)에서 태안(泰安)까지의 평야 지대를 일컫는 지명으로, 삽교천(揷橋川)과 무한천(無限川)의 두 물줄기가 흐르는 충남 중서부 지역의 총칭으로 사용된다.
이 지역은 이존창을 비롯해 복자 김진후 비오(金震厚, 1739-1814), 성 김대건 안드레아(金大建, 1821-1846) 신부 등 많은 순교자를 배출해 낸 곳이다. 김대건 신부의 출생지인 솔뫼와 인근의 합덕, 이존창의 출생지인 여사울 등 유서 깊은 교우촌과 본당들 그리고 해미 · 덕산 등의 순교자들이 이 지역에 산재해 살았다.

농민 출신으로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의 여사울에서 태어난 이존창은 초기 교회 창설자의 한 사람인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權日身, 1742-1792)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열렬한 신앙심과 학구심으로 초기 교회 가성직단(假聖職團)의 일원이 되어 신부로서 고향인 충청도 지방 복음 선교의 사명을 받았다.
그는 고향으로 내려와 가족은 물론 내포 지방 일대에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훗날 내포의 사도로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가성직 제도가 교리에 어긋남을 깨닫고 신부 영입을 위해 복자 윤유일 바오로(尹有一, 1760-1795)와 지황 사바(池璜, 1767-1795) 등에게 여비를 주어 중국 북경을 찾게 하여 마침내 복자 주문모 야고보(周文謨, 1752-1801) 신부를 맞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1791년 신해박해 때 그는 다른 수많은 천주교인들과 함께 관헌에게 붙잡혔다. 혹독한 고문과 가혹한 매질은 그로 하여금 배교의 쓴맛을 보게 하였다. 그 뒤 양심의 가책으로 내포 지방을 떠나 홍산(鴻山)으로 이사하여 전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전보다 더욱 열심히 신앙을 지키며 전교에 힘썼다.
그 결과 내포 지방은 다른 어느 지방보다도 교세가 크게 성장했고, 이에 따라 박해 때마다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방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 집안도 이존창의 전교로 입교했는데, 김대건 신부의 할머니는 그의 조카딸이 되며, 최양업 토마스(崔良業, 1821-1861) 신부도 그의 생질(甥姪)의 손자이다. 더욱이 오늘날 조선 교우의 거의가 그가 개종시킨 교우들의 자손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그가 전교 활동에 끼친 공헌은 지대하다.


1795년 말에 이르러 그는 다시금 지방 관리들에게 체포되어 고향인 천안으로 옮겨져 6년 동안 연금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1801년 다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고, 그 해 4월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丁若鍾, 1760-1801)와 함께 사형 선고를 받고 충청도의 감사가 있는 공주(公州)로 호송되어 황새바위에서 42세를 일기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내포 지역과 여사울 성지의 중요성을 인식한 대전교구는 교구의 뿌리인 여사울 성지를 개발하기 위해 2002년부터 신례원 성당을 중심으로 성지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주변 부지를 매입하고 진입도로를 넓히는 한편 십자가의 길과 강당을 추가로 조성하였다. 20081월 성지본당으로 지정하고, 그 해 1222예산 여사울 이존창 생가터라는 명칭으로 충청남도 기념물 제177호로 지정되면서부터 성역화를 본격 추진하였다.

이존창의 생가 터 앞 강당 자리에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 순교자 기념성당을 신축하고, 기존의 공소 건물 뒤에는 사제관과 수녀원을 건립하였다. 스페인풍의 기와를 얹은 기념성당은 20101016일 봉헌식을 가졌다. [출처 :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41220)]

신리성지 -다블뤼 주교의 생생한 흔적이 남은 주교관을 바라보며

----- 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읍 신리 62-3(041-363-1359)


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읍에 위치한 신리 성지는 지금은 말끔하게 단장되었지만 불과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구불구불한 길에 특별한 지형지물이 없어 택시 기사나 주민들에게 물어물어 찾아가야만 했다.

20-30평 정도 됨직한 자그마하고, 낡은 함석지붕으로 인해 조금은 초라해 보이는 공소 건물이 철조망에 둘러싸여 볼품없는 모습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이곳이 바로 손자선 토마스(--, ?-1866) 성인의 생가이자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인 다블뤼 안(Daveluy, 安敦伊, 1818-1866) 주교가 머물며 내포 지방의 선교활동을 지휘하던 주교관이자 교구청이었다. 마당에는 순교 복자 기념비와 성모상이 그 허전함을 달래주었었다.

천주강생 1815에 지어진 이 생가는 박해시대 이래로 여러 차례 소유주가 바뀌었고 그 구조 또한 개조를 거듭해왔다. 하지만 1866년의 병인박해 때 다블뤼 주교를 비롯한 여러 신부들이 체포되기 전에 피신한 이곳에는 거의 기적적으로 당시의 유물들이 보존되어 오고 있다. 원래 초가집이었던 생가가 해방 후 양철 지붕으로 개량되었고, 1964년부터는 강당 형태로 개축되어 공소로 사용되었으나 본당 중심의 사목이 강화되면서 방치되기에 이르렀다.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으로 조선 교구 제5대 교구장을 지낸 다블뤼 주교는 18457월 하순 상해로 가서 한국 교회 최초의 방인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金大建, 1821-1846) 신부와 함께 그 해 1012일 전라도 강경의 황산포(黃山浦)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 후 그는 1866년 병인박해의 와중에 순교하기까지 21년 동안 조선의 선교사로 활약, 당시 가장 오랫동안 조선에서 활동한 선교사가 되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한국 천주교회사와 조선 순교사의 편찬이었다. 그는 이 중요하고도 어려운 일을 교구장으로부터 위촉받아 1857년부터 새 자료를 발굴해 프랑스어로 옮기고 목격 증인들을 찾아 순교자들에 대한 증언을 수집하는 데 힘썼다.

특히 1859년을 전후해 그는 윤지충 바오로(尹持忠, 1759-1791) 등 주요 순교자들의 전기를 파리 본부로 보내는 한편, 조선 천주교회사의 편찬을 위해 조선사에 관한 비망기와 조선 순교사에 관한 비망기를 저술해 1862년 모두 파리로 보냄으로써 후세의 귀중한 사료가 될 수 있었다. 더욱이 1863년 그의 집에 불이 나 조선말과 한문으로 된 치명일기와 주석책 등 귀중한 자료들이 모두 타 버렸기 때문에 이 책은 한층 더 가치 있는 것이 되었다.

바로 신리의 주교관에서 수집하고 기록한 순교사 및 역사 자료 7권이 186210월 홍콩의 리부아 신부를 통해 파리로 전해져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두 권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또한 다블뤼 주교는 연풍 출신의 성 황석두 루카와 함께 신리에서 영세대의”(領洗大義), “성찰기략”(省察記略), “신명초행”(神命初行), “회죄직지”(悔罪直指), “성교요리문답”(聖敎要理問答), “천주성교예규”(天主聖敎禮規) 등과 같은 수많은 교회 서적들을 집필하고 출판했다. 이처럼 신리는 한국 교회사의 귀중한 보고이자 최초의 근대적 출판 인쇄가 시작된 곳이다.

이 집에는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기 바로 전날인 1866311일 고향의 부모님께 마지막으로 보낸 눈물겨운 최후의 편지가 기념으로 액자 속에 끼워져 있다. 이 편지는 만주의 베롤(Verolls, ) 주교에게 보내 프랑스에 있는 부모에게 전달하게 한, 이 세상에서는 마지막으로 올린 글(上書)이었다.

그는 1866년 베르뇌 주교에 이어 311일 신리에서 1km 떨어진 거더리에서 붙잡혀 한양으로 압송되어 옥중에서 갖은 고문을 받고, 충청남도 보령의 수영(갈매못 해변)으로 이송되어 330일 주님 수난 성 금요일에 참수되었다. 베르뇌 주교를 도와 9년 동안을 부주교로서 그리고 주교의 순교 후 조선 교구의 제5대 주교가 된 지 21일 만에 장엄하게 순교한 것이다.

그 후 그는 1968106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복자위에 올랐고, 198456일에는 한국 천주교 전래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시성되었다.

이토록 유서 깊은 신리 사적지는 2002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들이 파견되면서 그 중요성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대전교구는 2003년 말 다블뤼 주교가 쓰던 옛 주교관(손자선 성인 생가)을 교회사적 고증을 거쳐 본래의 초가집으로 복원하고, 2004년 성역화를 본격화하면서 기념성당의 첫 삽을 뜨고 부지매입과 진입로 확장, 편의시설 확충 등을 거쳐 2006562년 가까운 공사 끝에 완공한 성 다블뤼 안토니오 · 성 손자선 토마스 기념성당 및 사제관과 복원된 주교관에 대한 축복식을 가졌다.

20081222일에는 당진 신리 다블뤼 주교 유적지라는 명칭으로 충청남도 기념물 제176호로 등록되었고, 2009년 기념성당 외벽에 순교자들의 부활을 주제로 대형 부조상을 설치하고 다음해 7월말 야외성당(다블뤼 광장) 공사를 마무리하였다. 2013420일 성 다블뤼 기념관과 순교자 기념공원에 대한 기공식을 갖고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가, 201456일 다블뤼 주교 시성 30주년을 기념해 봉헌식을 가졌다. 지하 2층 지상 4층의 성 다블뤼 기념관은 다블뤼 성인의 유품과 성인화 등을 전시하고 있고, 기념공원에는 신리 성지에서 잡혀간 다섯 성인을 기리는 야외 경당을 봉헌하였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41216)]

= 여사울은 내포 교회가 시작된 곳이며 신리는 내포 교회가 박해를 극복해 나가던 교우촌이었고, 갈매못은 성인들의 순교 터였다. 이들은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 보이지 않는 역사의 끈으로 이어져 왔으며, 그 끈은 오늘의 교회를 지탱해 주고 있는 생명선과 같은 것이 되었다. 체포되기 직전에 다블뤼 주교가 동료인 만주 교구장에게 쓴 1866310일자 서한에서 순교자의 마지막 행로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교구장 베르뇌 주교와 선교사들이 체포되었습니다. 피할 길이 없습니다. 내 차례도 올 것이니, 제가 싸움터에서 견디어 낼 수 있기를 하느님께 청합니다. [출처 : 차기진, 사목, 19999월호]

신리 무명 순교자 묘 -성 손자선 토마스의 선산에서 발견된 무명 순교자 묘

----- 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읍 대전리 산 21-1 공동묘지내 ( 041-363-1359)

신리 무명 순교자 묘는 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읍 대전리의 손자선 토마스 성인의 선산인 한 야산에 약 40여 기가 산재해 있었다.

손자선 성인의 유해는 신리 교우들이 거두어 그가 평생을 두고 살아온 신리에서 가까운 선산에 묻었다. 그의 발 옆에는 그가 옥중에서 써 보낸 편지를 평소 그가 쓰던 술잔에 담아 표지삼아 묻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구두로 전해 오는 바에 의하면, 이 야산에는 손자선 성인의 무덤뿐만 아니라 다른 무명 순교자들도 많이 묻혔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고 하였다.

1차 파묘- 1972년에 그 야산 일부가 개발되어 94,400평이 과수원으로 변모하였다. 이때 32기의 연고자 없는 고총이 파묘되었는데, 각 묘마다 목이 없는 시신만 나왔다고 목격자들은 전하고 있다. 또한 묘마다 묵주가 나왔는데 그 양이 당시 시골 바가지로 한 바가지 정도나 될 만큼 모아져 있었다고 한다. 구전에 의하면 대원군이 천주교인들을 목 베어 죽이고, 목은 수효를 확인하기 위해 가져가고 시신만 버렸다고 한다. 32기의 시신은 그 당시 강계에 살던 손석윤 씨가 10여 명의 교우들을 데리고 와서 사과 상자 4개에 담아서 지고, 그곳에서 1km 정도 떨어진 어떤 공동묘지에 일렬횡대로 6봉분에 나누어 합장하였다고 한다. 이 이장 장소는 합덕읍 대전리 소재의 야산 중상부에서 서남향으로 6기의 분묘로 발견되었다.

2차 파묘 - 그 후 공장이 들어서기 위해 야산 일부가 다시 개발되면서 14기가 파묘되었는데, 당진시 합덕읍 대전리 공동묘지 중상부 동북향으로 있던 14기의 묘는 19854월경에 김병국(金炳國) 씨가 동료 김영기(金永寄) · 최동철(崔東喆) 씨와 함께 이장한 무명 순교자들의 묘이다. 김병국 씨는 이곳 신리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전해들은 얘기로 이 지역 대부분의 땅이 치명자 손씨 땅이었고, 손자선 성인과 많은 순교자가 이곳에 묻혀 있다고 하였다. 특히 대전리 120-8에 있는 10여 기의 묘는 손씨 가문의 치명자 묘라는 사실을 구전으로 들어서 잘 알고 있던 중, 이 묘역을 포함한 일대가 공장 부지로 개발됨에 따라 지주 서종순(徐鍾淳) 씨로부터 묘 이장 작업 청탁이 있기에 상기 동료와 함께 작업하던 중 십자가(길이 약 10cm)가 발굴되자 손씨 문중 치명자 묘라는 구전도 듣고 해서 정중히 이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 나온 십자가는 굴삭기 기사가 일도 안하고 따라다니면서 달라고 해서 주었다고 한다. 14기의 묘는 구전으로 전하는 바 손자선 성인의 가족 순교자 묘로 전해지고 있다. 현재 손자선 성인의 가족 순교자 묘는 바로 옆에 있던 무명 순교자 묘역 뒤편으로 이장하여 모셨다. [출처 : 오영환, 한국의 성지 - http://www.paxkorea.kr, 2005,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4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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