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주지 못하는 아픔들
새벽녘에 또 쥐가 났습니다.
일주일 사이 벌써 두 번째 경련입니다.
고질병이던 허리 디스크가 지난가을부터 심해지더니 이런 증상이 생겼습니다.
잠을 자다 쥐가 나본 사람은 알겠지만 갑작스러운 고통에 꼼짝할 수가 없습니다.
발가락이나 허벅지가 아니라 종아리에 생긴 쥐는 고통이 더한 것 같습니다.
누구는 ‘다리 위를 들어라, 손으로 주물러라.’ 여러 방법을 알려주었지만,
사실 별 소용이 없습니다.
그저 시간이 지나서 풀리기만 기다릴 뿐입니다.
그렇게 쥐가 난 날은 하루를 지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피곤하기도 하고 뭉친 근육이 그날의 컨디션을 다 잡아먹습니다.
얼굴은 퉁퉁 부어 왠지 심통 난 사람처럼 보이니 신자들도 자리를 피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어느 누가 알겠습니까?
사람이 갖고 있는 속사정을 말입니다.
어디 가서 하소연할 데가 없어 동창신부들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평소 약을 많이 먹는 신부는 자기도 그랬다며 뭐가 부족해서 그런 거니 이 약,
저 약을 먹으라고 소개해 주었습니다.
저는 약을 잘 안 먹는 데다 관심도 없어서 듣는둥 마는 둥 했습니다.
누구는 심각한 표정으로 빨리 병원에 가 보라고 했습니다.
또 다른 친구가 말했습니다.
“그냥, 고양이 한 마리 키워. 쥐에는 고양이가 최고야.”
고양이 이야기를 알아듣지 못한 저를 두고 친구 신부들이 한바탕 웃었습니다.
혼자서 겪어야만 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때로는 아무도 몰라 줄 때가 있지요.
곁에 있는 사람이 나의 고통을 알아본다고 하더라도 거기까지일 뿐 대신
아파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바라보고 있으면서 가슴이 아플 때가 많습니다.
어머니와 통화를 하다가 경련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모든 어머니가 그러하듯, 대신 아파해 줄 수도 없어서 어쩌냐 하셨습니다.
안타깝게 내뱉으시는 말씀 속에 당신
의 마음이 충분히 느껴졌습니다.
아마 성모님께서도 그러셨겠지요.
그리고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도 그러셨을 것입니다.
자기 개인의 십자가도 이렇듯 힘겨운데 인류를 위한 십자가는 어떤 무게였을지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마르 14,34)라고 말씀하셨을 정도니
말입니다.
이런 주님을 향해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마르 15,13.14) 하고 외치는 군중들의
고함에 저 자신도 한 몫을 보탠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저 높은 십자가에, 선하신 우리 주님이 아니라 제 아픔과 괴로움, 원망과 저주 같은
것들을 못 박고 싶습니다.
-전세원 루도비코 신부 (금곡 주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