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목숨값으로 주어진 나의 삶
로마 성지순례 때 바티칸 박물관을 관람했던 적이 있습니다.
박물관에는 수많은 그림과 조각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벽화 하나가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시스티나 성당으로 가는 통로에 있던 벽화인데,
주인공인 예수님을 그린 그림이 사람들의 시선에 따라 움직입니다.
어느 각도에서 바라봐도 예수님의 눈과 몸체가 같이 움직이며,
예수님의 시선이 성화를 보는 그 사람을 향한 채로 계속 따라오는
그림이었습니다.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로 교회는 '주님의 수난기'를 통하여
그분의 수난과 죽음을 장엄하게 선포합니다.
수난기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시선을 생각해 봅니다.
그 시선은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요?
예수님은 십자가의 무게에 눌려 쓰러지시는 순간에도 나만을
생각하셨다는 듯, 그 시선은 나를 향해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바라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바로 너 때문이다!"
당신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가, 당신께서 그 자리에서 그렇게
넘어지셔야만 했던 이유가 바로 나 자신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네."(필리 2,8 참조)
그런데, 예수님의 '너 때문에'라는 말은 결코 원망 섞인 탄식의 외침이
아닙니다.
이 말에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라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수난기의 베드로가 닭이두 번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배반했던
것처럼(마르14,66-72 참조), 네가 수없이 나를 모른다며 배반해서,
네가 그 모양이어서 내가 이렇게 되었다는 질책이 아닙니다.
오히려 네가 어떤 모습이어도 나는 너를 위하여 이렇게 기꺼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다는, 당신 사랑의 고백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6-7 참조)
예수님께서 나약하고 비천한 인간의 모습이 되어 세상에 오신 이유도,
그리고 오늘 수난기에서처럼 당신 목숨을 바치신 이유도 바로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입니다.
억지로 하는 사랑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하는 완전한 사랑의 완성입니다.
그래서 오늘 수난 중이신 예수님은 거역하지도 뒤로 물러서지도 않으시며,
수난의 여정, 사랑의 여정에 당신 자신을 기꺼이 내어놓으십니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이사 50,6)
오늘 수난기의 예수님은 그 시선으로 바라보시며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나의 목숨값으로 구한 너인데, 그러니 어떻게 하겠느냐?
나와 함께 이 길을 가겠느냐?"
예수님은 할 일을 다 하셨습니다.
당신의 모든 사랑을 다하셨습니다.
이제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주님의 목숨값으로 구한 소중한삶 안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사랑의 십자가를
주님과 함께 기꺼이 짊어지며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베드로 신부 사회사목국 이주사목위원회 위원장(서울대교구)
......................................................................................................
.jpg)
(오늘은 예수님께서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2,300m가 넘는 높은 산에서 십자가를 만난 순간, 주님의 십자가가 제 가슴에
크게 와닿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난, 죽음과 부활로 인류를 구원하셨음에도 우리는 내 십자가를
힘들다고만 생각합니다.
주님의 자녀로서 그분의 삶을 묵상하며 부활 신앙을 되새기는 신앙생활을
해야겠습니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34) )
-김승길 세실리아 | 가톨릭사진가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