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팔도를 땀으로 축성한 사제(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앙선조들의 발자취
조선인 두 번째로 사제품을 받은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1821-1861) 신부는
사목자의 생활과 성덕의 전형으로 추앙받으며 꾸준한 열성과 거룩한 땀을
통해 복음 선교에 일생을 바친 백색 순교자로 오늘날까지 신자들의 가슴 속에
이어져 오고 있다.
1. 생애 : 출생의 배경과 하느님의 부르심
최양업은 부친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 1805-1839, 1984년 시성)과
모친 이성례(李聖禮, 마리아,1801-1840, 2014년 시복) 사이에서 1821년 3월1일,
6형제의 장남으로 충청도 홍주의 다락골(현충남 청양 화성면 농암리 누곡)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본관은 경주이고, 아명은 정구(鼎九)이며, 세례명은 토마스다.
그의 증조부 최한일(崔漢馹)이 아우 최한기(崔漢驥)와 함께 이존창
(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 1752-1801)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 후 최한일은 경주 이씨와 혼인하여 아들 최인주(崔仁柱)를 낳았다.
신심이 뛰어나고 순박했던 최인주는 1791년 신해박해(辛亥迫害) 때 많은 고초를
겪고 석방된 후, 모친과 함께 청양 다락골로 피신하여 3대가 이곳에서 생활하였다.
최인주의 아들로 태어난 최경환은 강인한 성품을 타고 났으며 진정한 신앙의
실천자로 성장했다.
이후, 가족들이 신앙적으로 냉담하게 되자 그는 고향과 친척과 재산을 버리고
서울 낙동(駱洞, 현 회현동)에 거처했다가 다시 여러 산골로 이사를 다녔다.
그리고 과천 수리산 뒤뜸이(현 경기도 안양시 안양3동)에 정착하면서 교우촌(敎友村)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진하여 가시덤불과 돌 자갈밭을 개간하는 등 극도의
궁핍과 재난을 기쁘게 받아들였고, 자주 깊이 묵상하고 신심 독서를 함으로써
열렬한 애덕과 하느님 신비에대한 해박한 지식을 얻었다.
또한 과일을 추수할 때면 가장 좋은 것을 골라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모친 이성례도 남편 못지않은 극기와 신심을 지니고 있었고, 신앙생활에도
충실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 시 포도청에 갇혔다가 모성애 때문에 배교했으나, 이후 형조
감옥에 갇혔을 때는 모성애를 극복하고 배교를 취소한 뒤 1839년 12월27일
용감하게 순교하였다.
교우촌에서 열심한 부모와 함께 성장한 최양업은 경기도 부평에 살 당시 교회의
평신도 지도자들과 1835년 11월 25일(음)에 입국한 파리외방전교회 모방(Maubant)
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그는 동료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1821-1846)·최방제(崔方濟,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1837)와 함께 1836년 12월 3일(음 10월 25일) 모방 신부 앞에서 서약하며
한국 천주교회의 첫 신학생으로 선발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참조
조규식, 「최양업 신부의 영성」, 『교회사연구』 14, 한국교회사 연구소, 1999.
여진천, 「최양업 신부의 삶과 영성」, 천주교 서울대교구 순교자 현양회, 2006.
양업교회사연구소,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서한집」, 2018
-의정부교구 교회사 연구소-
